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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44)화 (244/317)

“나한테 훈계하지 마, 개자식아.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다 다 잃었던 게 나니까 해 주는 말이야.”

“뭐?”

카밀루스가 마침내 몸을 떼어 냈다. 그렇지만 버니언은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제 몸에 카밀루스의 마법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버니언이 이를 갈았다.

“씨발, 너, 이 새끼, 이 마법 풀어!”

그에 카밀루스가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아스타틴이 천천히 일어나 버니언의 굳은 몸을 소파에 털썩 앉혔다.

그러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아 버니언을 올려다보았다. 곧 아스타틴의 입에서 버니언의 뒷골을 오싹하게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만 이곳에 얌전히 계시면 목숨은 보장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황제 폐하.”

버니언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를 버둥거려 테이블을 쾅 차 버렸다.

“아스타틴, 너…… 너…… 감히 날 배반할 줄 알았어! 너 같은 쓸모없는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태후가, 씨발!”

“…….”

“마지막에 칼 그 새끼를 믿으라고 지껄이는 바람에!”

칼 나르바에스는 자신의 편이라는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확실한 개소리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제 어미의 당부라 그런지 이후로 칼에 대한 경계가 흐려져 버렸다. 그와 한 묶음인 아스타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주변에 믿을 만한 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계속 주시를 했어야 하는 건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역시 아무리 제 어미라고 해도 태후의 말 따위, 경청할 만한 게 전혀 아니었는데…….

이 순간에도 묵묵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아스타틴이 시야에 들어오자 버니언은 배신감에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그를 보며 카밀루스가 마지막으로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에 대한 언도를 했다.

“얌전히 있으면 네가 죽을 일은 없을 거다. 황위를 잃고 아이오딘으로 내쫓기겠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나쁘지는 그리 나쁘지는 않아.”

“……!”

아이오딘. 그 말에 버니언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 상황이 그에겐 마치 악몽 같았다. 진짜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꿈에서 펼쳐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지극히 꿈 같은 현실 속에서, 카밀루스는 마침내 매정히 돌아섰다.

그가 이온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버니언을 내내 지켜보던 이온이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온!”

그동안 제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도 전혀 입을 열지 않는 이온을 향해 버니언이 이름을 외쳤다.

이온의 무감한 눈이 제게 향하자 버니언이 떨리는 입술 사이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이, 이거 역시 거짓말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크레이거 가문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너희는, 너희는…….”

충격 때문인지 뒷말을 더 잇지 못하는 버니언이었다. 이온이 그에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가 내뱉지 못한 정답을 대신 이야기해 주었다.

“황실의 개라고 알려졌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요.”

“…….”

“대공의 말대로입니다. 전 대공이 아니었어도 당신을 나의 태양으로 섬기진 않았을 테니.”

버니언의 파란 눈에서 빛이 스러져 버렸다. 이온은 그러나 그에게 결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방을 나서기 전에 이온이 조금 흐트러진 손목의 깃을 다듬으며 여상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도 대공이 자비심이 넘쳐서 이 상황이 최악이 아니라는 데 감사하세요. 애초에 제 계획은 훨씬 과격했으니까요.”

버니언은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뜻이 분명한 그 말에.

* * *

황궁의 응접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복도에는 이미 노아 기사단이 가득 깔려 있었다. 이온은 그 모습을 보며 칼과 아스타틴이 버니언을 완전히 배반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버니언에게 시달렸던 황궁의 시종들도 응접실에서 일어난 소란을 묵인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들에게 치하의 말을 꺼내거나 하지 않고 황궁의 미끈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기 전 황성 입구가 보이는 곳에 멈춰 선 그는 아직 황궁의 상황을 모르고 평화로이 내황성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회는 그대로 진행될 거야.”

“알고 있어.”

카밀루스와 이온은 긴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이온의 계획 일부가 수정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뒤바뀐 것은 분명 아니었다.

단지 버니언이 그들을 먼저 불러들이면서 순서가 뒤바뀌었고, 카밀루스가 이온이 손대기 전에 버니언을 제 나름의 방법으로 처리해 버렸을 뿐이었다.

“……버니언이 안타까워?”

넌지시 묻는 말에 카밀루스는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버니언이 안타깝다기보다는 내 과거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어?”

“아이오딘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야?”

버니언의 처지와는 분명히 다를 테지만, 카밀루스도 완전한 고립을 겪은 적이 있었다.

빙벽으로 둘러싸인 아이오딘에 저를 감시하는 이들을 이끌고 가, 믿을 수 없는 자들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의 일을 말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이름 없는 탑에서의 일?

카밀루스는 난간을 손으로 붙잡으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그에게서는 부정의 말도, 긍정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분노에만 가득 차 있고, 그러다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실의에만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뭔지 난 너무 잘 알아.”

“…….”

“그래도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온은 쓸데없는 것을 바라는 그의 말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안 될 사람은 죽어도 안 돼.”

이온의 한마디가 어떤 기제라도 된 것인지 카밀루스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울렁였다. 난간을 붙잡은 손의 뼈가 하얗게 불거지는 것에 이온이 그를 불렀다.

“카밀루스?”

그에 카밀루스가 그만 난간을 놓고 이온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면 그때부터는 페드로가 함께할 거야.”

“……나랑?”

카밀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온이 의문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자신에게는 에렌스트 경이 있는데 굳이 왜 호위를 더 붙여 주느냐는 의미였으나 카밀루스는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연회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고, 노아 기사단도 돌아선 걸 확인했으니 황궁에서의 위협은 없는 셈이니까.”

사실 오늘은 전야제고, 내일이 본 연회의 시작이다. 따라서 오늘 늦은 저녁에야 본격적으로 귀족들이 모두 모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버니언이 황궁 마차를 보내서 그들을 불러들인 탓에 시간이 비어 있기는 했다.

“지금 탑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시작되기 전엔 무조건 올게.”

“……그런데 페드로를 왜 두고 가?”

말하다가 저번에 페드로와 싸운 것처럼 보였던 게 결국 이것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아저씨,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능할 거야. 그래 봬도 아이오딘에서 나랑 같이 몬스터도 잡고 했던 사람이잖아.”

“지금 그런 걸 말하자는 게 아니라…….”

이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흔들던 카밀루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내가 탑에 간 사이에 너를 노릴까 봐 그래. 안심이 안 되니까.”

“…….”

“태후의 상태가 들었었잖아. 그들의 목적은 아이야. 나보다는 너야. 무슨 뜻인지 알지, 이온?”

타이르는 듯한 어투에 이온은 지금 이게 제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상황인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그 나름대로 간절히 이해를 구하는 그의 태도에 결국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럼 알겠어. 대신 탑에 위험한 게 있을 거 같으면 그냥 시간 맞춰 돌아와. 그게 더 중요하니까.”

“물론 그렇게 할게.”

뭔가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온은 카밀루스의 손에 이끌려 그만 황궁 밖으로 향했다.

거짓말인가 싶게 황궁 점령은 너무나 손쉬웠다. 잡음 하나 일으키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오며 이온은 버니언에게 약간의 연민마저 느꼈다.

제 편을 아무도 만들지 못했던 빈 껍데기 황제의 최후가 생각보다 더 비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노아 기사단의 통제로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황궁을 뒤로하고 이온은 카밀루스의 바람대로 페드로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지방의 귀족들까지 올라와 개방된 황성 안으로 들어온 탓에, 평소 꽤 휑한 편이던 황궁 앞의 정원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여타 귀족들의 눈길을 피해 황궁의 뒤편, 태후궁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푸드득 하고 날갯짓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독수리의 기척이 났다.

「야, 이거 받아!」

평소보다 더 시끄럽게 등장하는 독수리의 유난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돌리자, 녀석의 발에 잡혀 있는 어린 화이트 드래곤 녀석이 보였다.

“꾸우우!”

얼떨결에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녀석을 받은 카밀루스가 욤뇽이를 내려다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꾸우, 꾸.”

“…….”

물빛 눈을 내려다보는 사이 독수리가 카밀루스의 어깨에 앉으며 칭찬해 달라는 듯이 유세를 부렸다.

「그 녀석이 네 방에서 오고 싶어서 울고 빽빽거리고 있길래 귀찮아서 데려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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