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에 대해서는 알아봤나?”
「으스스한 결계 때문에 안에 아무것도 안 보이던걸. 그렇지만 거기 불결해, 기분 나빠.」
“……그래, 알겠어.”
카밀루스의 발걸음은 태후궁의 뒤편으로까지 향했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걸어가면 황성 내의 통제 구역까지 나오게 된다.
즉, 이름 없는 탑과 무너진 성전 터의 흔적이 있는 곳.
카밀루스는 황성 어디서든 보이는 높은 탑을 바라보며 발을 재게 옮겼다.
눈에 띄는 독수리는 그만 날려보내고 일단 쓸데없는 아기 드래곤만 품에 안은 채로 일단 태후궁 후원과 이어지는 작은 산책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향했다.
현재 통제 구역은 노아 기사단이 지키고 있지만, 황궁에서 도움을 준 이들과 달리 저들은 아마 어떤 계획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카밀루스는 일단 성전 터의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성전 터는 말 그대로 터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전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탓에 주변에는 몸을 숨길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하여 이온의 애초 계획은 저녁에 연말 연회의 전야제가 시작되면 모두의 이목을 끌고, 허술해진 틈에 탑으로 이어지는 곳을 찾자고 했지만 카밀루스는 굳이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통제 구역이 시작되는 곳에 줄을 쳐 놓고 그 앞을 일정한 간격으로 띄엄띄엄 서서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무료한 표정이 보였다.
카밀루스는 산책로가 끊기고 이제 북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몸을 숨기면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꾸…….”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했는지 팔에 걸쳐져 있는 욤뇽이가 눈을 굴리며 울었다. 그에 카밀루스는 녀석의 입을 살짝 막으며 작게 물었다.
“저 안에 들어갔을 때 어떤 곳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나?”
카밀루스는 이전에 욤뇽이가 보여 주었던 영상 속에서 탑과 이어진 공간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욤뇽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기억에 없는 모양이다.
‘그럼 거기를 다시 어떻게 빠져나왔지?’
순간 그런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카밀루스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이전에 보았던 탑과 성전의 설계도를 보았을 당시를 떠올렸다.
탑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성전 터의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성전 지하 통로의 시작이 대략 어디쯤인지 페드로와 예상을 해 보았던 적이 있었다.
카밀루스는 그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며 숨을 들이켰다.
낮이라 위험도가 높지만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결국 좁게라도 결계를 펼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부디 헛발질은 아니길 바라며, 카밀루스는 자신이 있는 위치와 통로의 시작점을 잇는 공간 왜곡 결계를 시전했다.
그리고 결계가 펼쳐지자마자 그가 목적했던 곳의 지면이 내려앉았다.
안이 비어 있는 것을 증명하듯 쑥 꺼지는 땅 앞으로 걸어갔고, 제 눈앞에 드러난 커다란 동공을 내려다보았다.
땅이 무너진 곳에 드러난 것은 예상한 대로 탑의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는 통로였다.
성인 남성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높이의 통로. 하지만 기이하게도 안에는 푸른색의 기운이 가득했다.
카밀루스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연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익숙한 느낌이 몸 안으로 스며들자 의문 어린 목소리를 냈다.
“마나?”
“꾸우…… 꾸.”
그러는 사이 욤뇽이가 빨리 들어가자는 듯, 카밀루스를 재촉했다.
그에 카밀루스도 주저하지 않고 지하의 통로로 뛰어들었다.
* * *
누군가 통행하기 위한 길로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한 성전의 지하 통로.
그곳은 마치 물속처럼 푸른빛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마나의 빛이 눈이 부시도록 차 있는 이런 공간은 카밀루스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제가 뚫어 놓은 구멍으로 기운이 새어나가는 것을 본 카밀루스는 왠지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 구멍을 결계로 막아 둔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밀루스가 뛰어든 통로는 양쪽으로 향해 있었다. 당연히 그는 탑 쪽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그러나 반대편의 성전 쪽으로도 이 마나가 가득 찬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이곳은 뭔가 싶어 카밀루스가 조금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카밀루스는 품 안의 드래곤이 몸을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꾸우…….”
녀석이 물빛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나가 가득한 이 공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안고 있는 이 화이트 드래곤은 주변의 마나를 전부 빨아들이고 크는 습성이 있었다. 심지어는 카밀루스와 한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몸집이 커졌다.
카밀루스는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도 녀석의 꼬리가 조금 길어진 것 같은 느낌에 일단 놈을 내려놓았다. 너무 커지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가끔 중간쯤 성체로 성장시켜 본 적이 있었는데, 이 통로를 반 정도 메울 크기였던 것은 분명했다.
“네가 전에 들어왔던 게 여기가 맞아?”
“꾸!”
카밀루스가 이전에 녀석의 기억의 구슬을 통해 보여 주었던 영상을 떠올리며 묻자 욤뇽이가 그렇다며 힘차게 답했다.
그런 녀석을 힐끗한 카밀루스가 왠지 못 미덥지만 데리고 탑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길이 정말로 탑과 이어진다면 애초에는 성전과 탑이 한 묶음이었다는 의미일 터였다.
카밀루스는 약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물의 내벽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통로 사방의 벽은 매끄러운 재질의 돌벽으로, 굉장히 신경 써 만든 것이 티가 났다. 과연 사람이 다니던 통로일까는 조금 의심되었다.
바닥이 미끌미끌해서 잘못하면 넘어질 것 같다. 게다가 이 마나가 가득 찬 공간을 굳이 사람이 지나다닐 이유는 없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카밀루스는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를 바라보며 욤뇽이에게 문득 물었다.
“너, 여기서 태어났지?”
“꾸……?”
벌써 마나를 머금고 들어왔을 때의 크기보다 1.3배는 커진 듯한 욤뇽이가 커다란 눈망울로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카밀루스는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면서 그간 의심만 하던 것을 입에 올렸다.
“네가 혹시 블랑셰의 현신이나 그런 거야?”
“꾸우? 꾸?”
욤뇽이가 연신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얜 진짜 자기가 뭔지 모르나 보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이 추측에 어느 정도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이 통로가 성전과 이어진 것을 알게 된 때부터 말이다.
탑에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생명체. 그 전으로도 후로도 드래곤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좀 많이 조그마한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블랑셰의 현신이 아니면 자손쯤 되는 건가 싶기도.’
아니면 힘과 기억까지 빼앗겼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다 보니 발길이 마침내 통로의 끝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걸어왔는지 가늠이 정확하게는 안 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탑의 바로 아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행히 괴물처럼 커지지는 않은 드래곤 녀석이 다시 품에 뛰어드는 것을 안으며 카밀루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곳까지 결계로 막아 두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카밀루스는 천장을 노려보았다.
과연 저 너머에 뭐가 있을 것인가.
‘태후의 아이를, 찾을 수 있나.’
카밀루스는 별로 희망적인 이야기는 아님을 알면서도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난 구원받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있을 것 같더군요.〉
생전에 자신을 ‘구원’하고 싶다고 했던 여성. 잠시지만 그녀의 사정이 안타깝다고 여겼다.
그런 사람이 이온과 같은 저주를 받아 잃은 아이.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물러난 카밀루스가 마법으로 천장에 균열을 일으키고, 통로에 개미굴처럼 불규칙적인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짓에 따라 쾅 내려앉은 천장. 그 위에서 돌이 툭툭 떨어지며 통로 안으로 검은 연기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카밀루스가 꽃 모양으로 흩어지는 마기들을 보면서 순간 당황했지만 통로 안을 가득 메운 마나의 기운이 마기를 도로 살며시 밀어 내는 것이 보였다.
카밀루스는 다시금 원래의 천장 높이까지 차오르는 마나를 따라 구멍이 뚫린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
한참을 어둠으로 가득 찬 탑을 지르보던 카밀루스가 위로 뛰어올랐다.
탁, 하고 가뿐하게 익숙한 탑의 1층으로 들어선 그는 마기가 가득 찬 안쪽의 살풍경함에 표정을 굳혔다.
“뀨우…….”
벌써부터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는지 욤뇽이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제게 자꾸만 스며들려고 덤비는 마기를 밀어 내며 녀석에게 물었다.
“뭔가 있는 것 같아?”
“……꾸, 꾸.”
욤뇽이가 눈물을 쌓은 물빛 눈으로 탑의 가운데를 올려다보았다. 이중 결계를 해 놓았을 때부터 알아챘지만, 뭔가 있는 건 확실했다.
카밀루스는 겁먹은 아기 드래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며 탑의 나선형 계단에 발을 올렸다.
어렸을 적, 자신이 학대당했던 공간.
두 손과 발이 금제에 묶여 이 탑 밖으로는 감히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저를 대상으로 무언가 실험을 하던 재니스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피를 쏟아 마나석을 뽑아 냈다.
카밀루스는 오래전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가.’
이 탑에서는 썩은내가 진동했다.
단순 비유 표현이 아니라, 지금 당장도 탑 안을 가득 채운 마기와 함께 코끝을 자극하는 시크름한 냄새가 있었다.
카밀루스는 이런 냄새를 어디서 맡았던가 생각하다가 이내 정답을 떠올렸다.
이건 오래된 몬스터의 사체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 순간 카밀루스가 걸음을 멈칫했다. 발밑으로 무언가 기어가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