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꾸우.”
지나가던 층의 바닥에서 기어다니는 걸 본 드래곤이 다시 덜덜 떨면서 카밀루스의 품에 안겼다. 카밀루스는 녀석의 엉덩이를 두드려 그냥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가게 했다.
“귀찮으니까 딴 데 붙어 있어.”
그러자 이번엔 마치 목말을 타듯이 목덜미에 꼭 안기는 욤뇽이를 느끼며 카밀루스가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 앞에 손을 내밀자 곧장 카밀루스의 중지를 타고 올라왔다.
바닥에 기어다니는 이 ‘뼈’는 얼마 전에도 봤던 것이었다.
몬스터의 영핵만 남아 움직이는 바실리스크의 뼈였다.
“마리엘인가?”
카밀루스는 이 이상한 걸 만든 이를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한데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마리엘이죠.”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위층에 있었던 듯 계단을 내려오는 재니스가 보였다.
“…….”
아직도 그인지, 그녀인지 알 수 없는 자가 카밀루스의 앞에서 능청을 떨었다.
“더 오래 끌었다면 참지 못해 제가 찾아갔을 겁니다, 대공.”
그에 움켜쥐어진 카밀루스의 손 안에서 바실리스크의 뼈와 영핵이 으스러졌다. 재니스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카밀루스의 목에 매달려 있는 하얀 생명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보니 대공께서도 이상한 걸 달고 다니시네요? 말하는 독수리까지는 이해를 했는데…….”
몸을 일으킨 카밀루스가 재니스가 있는 쪽으로 향하기 위해 층계를 밟았다.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다가가는 그를 내려다보는 재니스의 얼굴은 아직 평화로웠다.
“설마 마리엘만큼 이상한 걸 달고 다닐까.”
“마리엘이 뭘 달고 다니던가요?”
질문이 끝나는 순간 어느새 뛰어올라 앞으로 확 다가선 카밀루스가 재니스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는 손의 감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한 무성의 생명체를 느끼며 말했다.
“너 말이야, 재니스.”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손에서 뻗쳐 나온 날카로운 얼음 송곳에 의해 재니스의 얼굴이 파괴되어 나갔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튀어올랐다. 카밀루스가 본능적으로 그것에 닿지 않기 위해 방어막을 펼쳤을 때였다.
재니스의 손이 제 가슴에 닿아 있는 것을 본 카밀루스가 가는 손목을 휘어잡았다.
콰앙!
돌벽에 그보다 더 딱딱한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깊게 탑을 울렸다.
* * *
이미 몇 시간 전부터 개방되어 있는 연회장에 도착한 귀족들은 늘 그렇듯이 다른 이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연회장 건물 곳곳에 있는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온은 아직 황궁의 상황을 모르고 평화롭기만 한 안의 분위기를 확인했다.
2층 난간에서 지켜보니 크레이거 공작은 아직이지만 미아블레 후작 부처의 모습이 보였다. 이온은 그에게 말을 걸어 보려 움직이다가 저를 뒤쫓아오는 페드로를 의식하며 살짝 뒤돌아섰다.
그러자 평소 카밀루스의 뒤를 쫓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페드로의 모습이 보였다.
꽤 그럴듯한 연회복을 잘 챙겨 입고, 머리를 뒤로 넘기니 놀랄 만큼 훤칠해진 그였다. 솔직히 이쯤 되면 혹시 카밀루스가 그에게 효도를 하려고 직접 챙겨 준 게 아닌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온은 그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카밀루스가 절 지키라고 한 게 아니라 감시를 하라고 했나요?”
듣자 하니 페드로에게도 자작위가 있고 한다. 그러니 그 하나만 따로 떼 놓고 봐도 오늘 연회에 참석할 자격은 충분히 되었다.
다만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이온을 쫓아다니는 모습에 물으니 페드로가 양쪽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전 전혀 신경을 안 쓰셔도 됩니다. 다른 분들과 대화를 나누셔도 괜찮습니다.”
신경이 몹시 쓰이게 해 놓고 이런 발언을 하면 이온도 할 말이 없었다.
이온은 계단에 내려가기 전에 결론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저에게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혹시…… 카밀루스가 미리 무슨 말 해 놓은 거죠? 선구자처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 뭔가가 있잖아요.”
“그런 건 없습니다.”
“저도 궁금하다고요, 페드로.”
왠지 페드로는 편안한 촌장 아저씨 타입이라 이온도 괜히 떼쓰는 어투로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페드로는 어린아이의 떼쓰기 정도는 이미 많이 겪어 봤다는 양 태연하게 웃어넘겼다.
“대공과 오늘 하루의 계획은 전부 입을 맞춰 둔 거 아니었습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카밀루스는 아닌 거 같아요.”
“…….”
이온이 난간에 기대어서 아직은 여유 있는 홀을 바라보며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시작부터 이상하잖아요. 카밀루스는 지금 시점에 탑에 가는 것도 다 계획했겠죠.”
버니언이 불렀을 때, 마침 아스타틴이 자신들을 데리러 왔기에 약간의 계획을 수정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버니언을 제압한다거나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다.
버니언은 카밀루스가 쳐 둔 결계 안에서 활개칠 수 있는 인간이다 보니 이온은 지금도 솔직히 불안했다.
그가 몸만 자유로워진다면 황궁에서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온이 혹시 연회 때 버니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닐까 하는 경우의 수도 실제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 봤자 더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한데 조금 떨어져 있던 페드로가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팔을 올렸다. 이온이 그를 바라보기 전에 페드로가 작게 말을 걸어왔다.
“대공께서 이번에 북부에서 가신들을 불러들인 건 알고 계십니까?”
“이엘라엠과 비아트리스에서 오랜만에 온 건 알고 있는데요. ……평소 안 오던 북부 귀족들이 이번에 대거 온 건 알고 있어요.”
“대공의 명에 의한 거란 사실은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죠.”
이온의 대답에 페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께서도 ‘오늘’을 하루 이틀 준비한 건 아닙니다.”
이온은 그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더 말을 해 줄 것 같으면서도 아끼는 기색이 역력한 페드로였다.
지긋한 시선으로 더 말해 달라는 의미를 전하니 페드로가 뒷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소공작보다 훨씬 더, 오래 말입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선구자처럼 알고 있다고, 소공작께서도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비유 표현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페드로의 이 말은 왜인지 어떠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는 것 같았다.
페드로가 이온의 귓가에 조금 더 바짝 입술을 붙이면서 속삭였다.
“제 생각인데, 대공께선 본인이 선황께 대공위를 받으리란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계셨던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페드로의 말에 이온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짐작하지?
그도 그럴 것이 선황의 마지막 아이오딘행에 해서는 모두가, 심지어는 선황을 꽤 잘 알았던 크레이거 공작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카밀루스를 대공위에 올린 것도 다들 죽기 전의 변덕이라고만 말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파헤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온도 그저 이후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혹시 선황이 카밀루스가 버니언과 황위 싸움을 하길 바랐던 것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카밀루스의 세력을 이렇게까지 키워 둘 이유가 없었으므로.
혹시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온이 바라보는 페드로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다.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는 이온의 눈빛에 페드로가 말을 이었다. 오로지 이온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전 대공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이라, 억측을 하는 거라고 하면서 넘길 수 있었죠.”
페드로가 카밀루스를 처음 만난 건 아이오딘을 떠나기 전.
그의 감시를 맡은 기사의 선두가 바로 페드로였다. 카밀루스의 베너렛 기사로 임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선황은 제 아들을 억제하기 위한 인물로 그를 발탁했을 뿐이었다.
페드로는 소년인 카밀루스를 처음 만났을 당시의 모습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황도의 작은 저택에서 아이오딘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는 며칠간, 페드로는 선황의 사생아라는 그를 먼저 만나러 갔다.
〈페드로, 자작이죠?〉
저를 돌아보지도 않고 하는 그 말에 페드로는 의아해졌지만 사전에 이야기를 들었겠거니 했다.
〈저 때문에 아이오딘에서 앞으로 몬스터 고기를 먹고 살게 됐는데, 짜증이 나진 않으세요?〉
〈……짜증이라기보다는 조금 성가시긴 할 것 같군요.〉
원시시대도 아니고 직접 사냥을 하고 먹어야 한다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뒤에 덧붙일까 했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그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대로 읊었다.
〈원시시대도 아니고 직접 사냥을 하고 먹어야 한다니. ……그렇죠?〉
페드로는 그에 무척 놀랐다.
우연일까? 우연이겠지.
한 번은 그럴 수 있다며 넘겼고, 실제로 이후의 대화에서 딱히 기억나는 점은 없었다. 그런 부분이 더 있었으면 틀림없이 기억 속애 남아 있었을 텐데.
사실 그 이후에도 카밀루스는 좀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로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가진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오딘으로 간 이후 페드로는 카밀루스가 아직 탑에서 학대받은 것을 못 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당시의 카밀루스는 어렸고, 인생의 90퍼센트 이상의 기억이 탑에서의 기억일 것일 테니.
첫 2년 정도, 카밀루스는 거의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렸었다. 중간에 깨어나서 몸을 떠는 아이를 페드로가 참지 못하고 들어가 달래 주기도 했었다.
아버지인 선황을 원망해도 괜찮다고 하는 말에 카밀루스는 페드로에게 기대어 울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저에겐 분노할 자격이 없어요.〉
〈……왜.〉
〈이곳에 온 이유도, 제가 약하기 때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