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실질적으로 카밀루스를 황위에 올려 놓거나, 크레이거 공작이 버니언이 아닌 카밀루스에게 맹세하거나 할 때 완료가 되는 퀘스트일지도 모르겠다.
이온은 이 상황에 약간의 갑갑함마저 느끼며 옆의 페드로를 힐끗했다.
난간 아래의 그늘 진 곳에 서서 벽에 기대어 있는 페드로는 이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선조차 딴 데를 향하고 있었다.
품 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던 이온은 미아블레 후작에게 이야기했다.
“시작까지 1시간밖에 안 남았네요.”
“대공께서는 늦게 참석하시는 것입니까?”
조카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그에게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역시 1시간 이내에 끝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만약 그가 일을 잘 마친다면 누구보다도 빨리 자신이 소식을 알 수 있게 될 거였다.
□□, 이제 마리엘로 확정됐다고 봐도 무방한 그가 죽는다면 저주가 풀릴 것이다.
‘그럼 시스템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미친 듯이 텍스트를 흘려 줄 테니 그거 하나는 정말 다행이었다.
이온은 왠지 긴장되는 마음에 손에 든 와인 잔을 꼭 쥐게 되었다.
왜인지 미아블레 후작과 더 깊은 담소를 나누기에는 이야기가 겉도는 느낌이 있어 그만 대화를 마쳤다.
그런 뒤 이온이 홀을 가로질러 건물의 북측을 향하자 역시나 페드로가 따라왔다. 그러고 마침내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소공작,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온이 페드로에게 한숨 지으며 대꾸했다.
“멀리서라도 좀 보게요.”
카밀루스가 간 탑은 아직 멀쩡할지도 궁금했다. 물론 안 멀쩡하면 이미 연회장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겠지만…….
이온은 유리문을 열고 연회장 정원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발을 디뎠다.
홀에 사람이 꽤 많이 차 있는 만큼 테라스와 정원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 탓에 연회장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램프에 시종들이 불을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정원의 한가운데쯤에서 걸음을 멈춘 이온이 황성 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이름 없는 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직 고요한 그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히려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온이 제 바로 옆까지 바짝 다가온 페드로에게 말했다.
“금방 마치고 와야 할 텐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잘 해결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와닿지 않는 그 위로의 말을 들을 때, 시스템이 메시지 하나를 띄웠다.
[황성을 둘러싼 결계의 억지력으로 인해 제한되었던 마나의 흐름이 정상화됩니다.]
“……!”
시스템의 메세지를 확인한 이온의 눈이 재빨리 황궁을 향했다.
그러자 그 의미를 증명하는 듯 돌연 황궁 위에 떠 있던 거대한 마법진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발견한 이온이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페드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온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커졌다.
“저게, 무슨…….”
신음 같은 한마디가 나온 순간이었다. 우선 정원에 있던 사람들이 내황성을 감싸는 결계가 거두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이들이 곧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며 혼란 가득한 말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가 순식간에 결계에 대한 것으로 쏠렸다.
불길한 예감이 든 이온이 페드로의 옷깃을 더 꽉 움켜쥐었다.
“카밀루스에게…… 이상이 생긴 거 같아요. 가야 하겠어요.”
그러자 당연히 이온의 말에 동조할 줄 알았던 페드로가 몸을 돌리려는 이온의 팔을 붙잡았다.
이온이 흠칫하고 올려다보자 페드로가 이성을 붙들라는 듯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탑에요?”
반문하는 때에 맞추어서 이온의 눈앞에 마치 그게 정답이라는 양 이전에 받아 두었던 퀘스트 창이 띄워졌다.
[황성 탑으로 향하기]
[황성 탑의 결계를 걷어 내고 황성 탑 안쪽으로 진입하십시오.]
[본 퀘스트 완료 시 플레이어의 탑과 관련한 기억 일부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회복되는 기억에 따라 □□가 특정될 수 있습니다.]
틀림없다.
시스템이 저곳으로 빨리 가라고 자신의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이온은 페드로의 손을 밀어 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으나 다시 한번 그가 제 팔을 잡고서 마주 봐 왔다.
“절대 안 됩니다, 소공작.”
“불안하면 차라리 페드로도 같이 가요.”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페드로가 말하는 중간에 누군가가 황궁의 이상을 알려 왔다.
“황궁이 불타고 있다!”
그에 이온과 페드로의 눈이 동시에 황궁 쪽으로 돌아갔다. 버니언이 남아 있을 황궁의 건물 위로 검은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정면에서 불길이 정확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동요를 일으키기에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지만 아직 연회 홀의 문제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곳 사람들이 당장 어디로 피신한다거나 하는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연회장 안쪽에 있던 귀족들도 밖으로 나와 구경을 시작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자리에 와야 하는 황실 사람이 아직 도착한 바가 없다 보니,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온은 그 혼란에 상관하지 않고 연회 홀에서 테라스로 빠져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역행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아 홀 안에 있는 크레이거 공작이 이온을 불렀다.
“이온!”
불러 오는 목소리에 이온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크레이거 공작이 이온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테라스 쪽을 힐끗하며 물었다.
“밖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게야?”
“결계가 거두어지고 황궁에 불이 났어요.”
“……!”
이온의 짤막한 설명에 크레이거 공작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이온은 빨리 연회 홀을 떠나고 싶어 계속 문 쪽을 바라보면서도 빠르게 말했다.
“태후도 공석이고…… 황제도 쉽게 오지는 못할 거예요. 아버지나 다른 적절한 사람이 여기 분위기를 수습해야 할 거 같아요.”
“수습이라니…….”
이온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오늘은 때가 아닙니다.”
아쉽지만 그건 명백했다.
“황궁에 기사들은 많았으니까 그곳은 크게 이상은 없지 않을까 싶어요.”
아까 전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아스타틴은 버니언을 해칠 생각까지는 없는 듯싶었다.
그리고 결계가 거두어졌다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노아기사단은 마법 기사단이고, 버니언 또한 본인 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은 있을 테니 그쪽은 당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터였다.
다만 버니언이 이곳에 나타날지는 미지수이니 연회장의 혼란은 다른 누군가가 수습해야 한다.
황실이 없을 때는 귀족들의 수장 역할을 하는 크레이거 공작이 가장 적절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정리가 아직 다 안 된 모양이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겠구나.”
그러고 연회장을 지키고 있는 그레나 기사단의 누군가를 불렀다.
다행히 크레이거 공작과 이야기할 때는 끼어들지 않았던 페드로가 이온이 그 틈에 연회 홀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보며 앞을 가로막았다.
“소공작, 이곳에 계세요. 그게 안전합니다.”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태평하게 내 안전을 찾을 때가 아니에요, 페드로. 결계가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
“카밀루스에게 큰일이 난 거라고요.”
페드로도 이 말만큼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들처럼 여기는 카밀루스의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대공으로서의 그에게 명을 받았다고 해도, 페드로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는 갈등했다.
이온이 그의 손을 잡고 홀의 입구로 걸어갔다. 조금 순순해진 페드로에게 이온이 또다시 권유했다.
“차라리 같이 가요.”
페드로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힘으로는 이온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것이었다.
사실 카밀루스도 못 하는 걸 페드로가 할 수 있을 리 없는 게 맞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그가 이온과 함께 연회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고 북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황궁에서 연기가 더 넓게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난리가 난 것인지 짐작도 안 된다.
‘불이면, 버니언이 탈출하려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