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은 그것밖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이온은 페드로와 함께 황성의 이름 없는 탑 쪽을 향했다. 초조한 마음에 무리를 해서라도 뛰어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쿠웅, 하고 지축을 울리는 듯한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그렇지만 땅이 진동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선이 황성 탑에 쏠려 있었기에 이온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게 뭐죠?”
검은 구멍.
그렇게 명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문제는 그 구멍이 허공에 났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탑의 상층부를 뻥 뚫어 버린 듯했다.
페드로도 처음 보는 현상인지 멍하니 입을 벌릴 뿐 어떤 대답을 쉬이 내놓지는 못했다.
이온은 순간 제 몸 생각도 잊고 그곳을 향해 달렸다. 만약 카밀루스에게 정말로 이상이 생긴 거라면 저 따위가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싫었다.
이온이 튀어나가는 것에 페드로가 염려가 됐는지 팔을 붙잡았다.
“제가 업어 드리겠습니다, 소공작.”
그에 페드로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이온의 앞에 창의 텍스트가 흘렀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1%입니다. ]
이제는 너무 일상이라 무뎌진 메시지.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황성 탑으로 향하시겠습니까?]
[1. 예
2. 아니오]
[선택에 따라 플레이어의 최종 생존 확률이 0 또는 100으로 조정될 수 있습니다. 최종 생존 확률 0이 될 시 플레이어는 사망합니다.]
[플레이어가 사망할 시 ◇◇의 목적 달성 확률이 0이 됩니다.]
[◇◇의 목적 달성 확률이 0이 될 시 본 시스템은 해체됩니다.]
그야말로 텍스트들이 쏟아져 내렸다. 대체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만큼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온이 결정할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었다.
[‘1. 예’가 선택되었습니다.]
이온은 벌써부터 숨이 차오르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업히는 건 괜찮아요.”
업히면 배 속의 아이가 눌릴까 봐도 걱정이었다. 이온은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발을 따라 몸을 옮겼다.
그리고 탑에 또 다른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탑의 상층부에 뻥 뚫린 그곳 근처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이온의 머리 위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마치 깨지는 듯이 커다란 천둥의 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리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이온의 옆에서 페드로마저도 당황한 소리를 냈다. 그가 이온이 비에 젖지 않도록 서둘러 제 옷을 벗어 머리 위로 펼쳤고,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곳을 보는 이온의 시야에는 검은 구멍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하얀 무언가가 들어왔다.
긴 몸체로 헤엄치듯이 하늘로 올라가는, 아주 거대한 날개를 펼친 새.
아니, 저건 새가 아닐지도 몰랐다.
왠지 무언지 알 것 같은 이온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드래곤…….”
제 방에서 뒹굴거리며 물빛의 눈을 반짝이던 그 아이.
성체가 된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 * *
탑의 돌벽으로 형편없이 내던져 처박힌 재니스였지만 떨어져 나오면서 비틀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카밀루스는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도 금방 회복해 일어서는 재니스를 보면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머리에 상처가 났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턱 밑으로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짐에도 머리칼 사이의 눈은 카밀루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을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물었다.
“넌 대체 정체가 뭐지.”
“마리엘의 뼈를 깎아 만든 사역마……?”
“마리엘의 뼈라고?”
사람의 뼈를 깎아 살아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지만, 분명한 건 연상되는 그림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카밀루스는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재니스는 평소의 그 건들거리는 자세로 카밀루스에게로 걸어왔다. 물론 그다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던 카밀루스는 차라리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뒷걸음으로 밟았다.
어차피 이 탑의 위층 어딘가에 마리엘이 있을 테니.
재니스도 그런 카밀루스의 걸음을 따라 층계를 밟으며 이야기했다.
“마리엘이 마기에 잠식됐을 때, 거의 절반은 몬스터화가 진행됐었거든요.”
마리엘은 지금으로부터 5대 전의 황제 치세에 살던 이였다.
그녀는 당시에도 마탑 소속이었고, 성실한 말단 마법사였다. 그리고 마탑의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 특유의 호기심도 가득한 사람이었다.
마법으로 여러 실험을 하는 건 그녀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마탑은 황실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어떤 것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의무가 강요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는 평화로운 삶.
당시만 해도 말단 마법사였던 마리엘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새로운 마법 이론들을 발견할 때면 성취감이 솟아올랐고, 덕분에 언제나 즐거운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제 동료들과 다른 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녀의 성장 가능성은 당시 마탑주보다도 더했다. 어쩌면 지금의 카밀루스보다 더 강해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이였다.
따라서 금세 마탑 마법사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낸 마리엘은 얼마 안 가 동기 마법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공공연하게 그녀의 대단함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는 마법사가 생겼을 정도였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마법사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고, 덕분에 마탑주도 말단 마법사였던 마리엘을 곁으로 불러들였다.
〈네가 내 옆에서 날 보조해 준다면 많은 걸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마탑에서만큼은 제국의 황제보다도 더 존중받는 존재가 마탑주였다.
마리엘도 마찬가지였다. 마탑주가 저를 눈여겨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가슴이 다 두근거릴 정도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 마리엘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위대한 마법 능력.
반짝이는 지식.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마탑주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다정했다. 또…… 멋있었다.
뒤에 햇빛이 비칠 때면 마리엘의 눈에는 그 자체가 태양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계속 마주치면서 결국 마음을 빼앗겼다.
마탑주 역시 마리엘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만 마주쳐도 싱그럽게 웃어 주었고, 마리엘이 어떤 성과를 보이면 그 자신이 더 좋아하는 기색을 비쳤다.
처음엔 그저 마탑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실험을 진행하고, 새로운 마법을 개발하거나 기존의 마법을 개선하는 것을 연구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마리엘은 서서히 그를 위해서 더 열심히 하게 됐다.
그리고 문제는, 마탑주가 마탑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것에 손을 댄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마탑주의 방 한쪽 면을 가리고 있는 책장 너머에 새로운 공간이 있었다.
결계가 쳐져 있는 그곳에는 몬스터 한 마리가 갇혀 사는 중이었다.
마리엘은 그게 무슨 종류의 몬스터인지도 잘 몰랐다. 살면서 몬스터를 별로 본 적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몬스터 도록에 나오는 어느 것과도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고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리엘은 몬스터 눈을 보고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고,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마탑주를 바라보았다.
〈……마기의 연구는 금지되어 있지 않나요?〉
마탑에서는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마법들만 연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 황실의 지원을 받는 거였다.
하지만 마탑주는 어떻게 명암 중 명만 볼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몬스터에 대해서 더 잘 알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 해도 마탑주의 방 안쪽에 이런 게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겉에서 보는 공간과 마탑주의 방 크기가 조금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런 것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저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몬스터를 보고 있자니 약간 떨떠름한 기분마저 들었지만, 마리엘은 저를 믿고 이것을 보여 준 마탑주의 신뢰와 그를 향한 존경으로 극복해 냈다.
그만큼 그는 그녀에게 절대적인 존재였으므로.
그래서 마리엘은 그 마탑주가 사실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마리엘은 그가 자신을 동료로 인정하고,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착각을 했다. 그렇지만 마탑주는 마리엘의 몸을 탐구하면서 그녀 자체를 연구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마리엘은 그에게 속아 하나의 약물을 만들었다.
대량의 마나와 대량의 마기를 한데 녹인 약이었다. 마나는 자신의 몸에서, 마기는 마탑주의 방 안쪽에 묶여 있는 몬스터에게서 뽑아낸 것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액체.
마시면 어떤 효과가 날지 마리엘도 사실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