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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54)화 (254/317)

“그냥, 대공을 낳은 뒤에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기에.”

말이 끝나자마자 마리엘의 밑에서 서슬 퍼런 얼음 송곳이 솟아났다. 마리엘은 예상했다는 듯이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고 그의 뒤에 나타난 마리엘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은 찰나, 카밀루스도 그녀의 손등을 기다렸다는 듯이 덮었다.

그러나 안쪽에서부터 얼리려는 걸 눈치챈 그녀는 재빨리 멀어지며 카밀루스에게 검은 구체를 날렸다.

카밀루스가 피해 그 구체가 바닥에 닿자마자, 소리조차 나지 않고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아래층이 훤히 보이는 걸 확인한 뒤 카밀루스가 마리엘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래서, 내 어머니가 자살을 한 게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인가?”

“탑에서 떨어졌을 때는 이미 생기를 잃은 시신이었으니까요?”

카밀루스의 어금니가 으득, 소리를 내며 깨물어졌다.

마리엘을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카밀루스의 눈에 살기가 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도, 마리엘은 전혀 겁을 먹거나 하지 않았다.

본인이 이 자리에서 살해당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혹은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거나.

사람에 대한 도덕 관념 따위 전혀 없어 보이는 저자는, 카밀루스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지만 대공도 저를 비난할 자격은 없지 않나요?”

“무슨 뜻이지?”

마치 자신이 동류라는 듯이 말하는 마리엘의 다음 말이 카밀루스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의 반문에 마리엘이 가는 손가락으로 무언가 고민하는 듯이 턱을 만지며 이야기했다.

“대공께서 몬스터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반 섞여 있는 제가 느끼기로는 많은 것들이 달라요.”

카밀루스는 제 품 안의 드래곤이 자꾸 불안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빨리 이곳의 일을 해결하고 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 카밀루스가 왠지 길어질 거 같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난 서두가 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자 마리엘이 케이프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요, 그럼 바로 말씀드리지요. 이온 크레이거, 그 소공작님을 그렇게 만든 건 대공 아닌가요?”

갑자기 이온이 화제로 끌려 나오자 카밀루스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게다가 맥락이 이상하다.

드래곤의 부활을 위해서 제 어머니의 생기를 다 빨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너도 똑같은 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카밀루스는 도대체 무엇이 똑같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온을 어떻게 했다는 거지? 저주는, 네가 건 것 아니었나?”

“제가 걸었지만, 제가 걸지 않았죠.”

“…….”

마리엘의 모순된 이야기에 카밀루스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게다가 저 발언은 문제가 있지 않나. 저주는 마리엘이 걸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죽이고 이온을 저주에서 해방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는 마리엘입니다.]

게다가 이미 매칭을 끝내 버렸으니 시스템의 모든 확률 계산 등이 모두 그녀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뜬금없는 발언으로 갑자기 혼선이 와 버리면 곤란했다.

“설마 저주의 근원이 네가 아니라는 건가?”

보라색 약물의 출처가 그녀가 아닌가?

저주의 힘을 일으키는 마기가, 그녀의 것이 아니던가.

카밀루스는 제가 잘못 짚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었을 시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라 눈앞이 아득해지기까지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빠르게 뛸 뻔한 그때 마리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저주는 틀림없이 저에게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니 저를 죽이시면 도련님의 저주는 해제될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저는 그저 헌신과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가만히 서서 이야기하기가 지루해졌는지 마리엘이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다. 탑의 상층부는 아래쪽보다 상대적으로 비좁은 탓에 그녀가 몇 걸음 걸은 것만으로도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카밀루스는 제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마리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플레이어가 마리엘을 죽일 확률을 알 수 없습니다.]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리엘을 죽일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계산을 못 해냈다.

‘희박하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조회가 안 된다는 의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당장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데, 마리엘의 손이 카밀루스의 손목에 닿았다.

“그 순한 도련님은 강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대공을 위해서.”

거슬리는 손동작에 내려다보니 마리엘이 마치, 예전에 그의 손목과 발목에 걸려 있던 금제를 상기시키듯 어루만지는 게 보였다.

카밀루스가 그에 손을 휘둘러 탁 쳐 내자 마리엘이 얼른 손을 떼 내며 항복 표시의 동작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무례를 저질렀네요.”

카밀루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가 이내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내가 이온을 어떻게 배신했다는 거지? 네가 하려는 말이 그거 아닌가.”

그녀가 말하는 헌신은 이온이 저를 탑에서 빼내 준 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마치 이온이 저주에 걸리기를 바랐다고 말하는 듯한 마리엘의 발언이 걸렸지만, 자신의 배신이 무얼 뜻하는지 도무지가 알 수 없어 거듭 물었다.

“전 대공께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황성의 결계도 사실 아주 훌륭했어요. 처음에는 저도 마법을 영영 못 쓰는 줄 알았답니다?”

“…….”

“그리고 더 궁금한 건 그것이지요. 대공께서 저도 모르는 마법을 구현하신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카밀루스가 냉기 서린 파란 눈으로 마리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맥이 잡혔다.

자신이 이온에게 한 배신.

아니, 그건 배신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은 제 실패의 기록 같은 거였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마침내 마리엘의 입에서 기다리던 질문이 나왔다.

“이온 크레이거의 영혼을 어찌하신 겁니까?”

카밀루스는 잠시 침묵했다. 품에 있는 아기 드래곤이 이 주제가 불편한지 끙끙대는 것이 보였다.

이쯤 됐으면 녀석을 그만 놔줘야겠다는 생각에 카밀루스가 팔을 조금 벌리자 욤뇽이가 뛰어내렸다.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밀루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마리엘을 마주 보았다.

“뭐가, 달라졌나?”

이것은 시치미를 떼기 위한 반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몰랐다. 이온의 영혼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

제가 마지막으로 했던 그 마법이, 이온 크레이거라는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래서 늘 불안감에 시달렸더랬다.

이온의 기억 상실마저 제 탓인 게 분명했으니까.

마리엘은 예전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되살리기 시작했다. 제 눈앞에 저를 죽이기를 기다리는 카밀루스의 존재를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제가 공작가에 찾아가서 살핀 때는 그 도련님이 13살일 때였지요. 그때 이 저주받은 손으로 조그마한 손을 만졌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마리엘이 제 검은 손을 펼쳐 카밀루스의 앞에 자랑하듯이 내보였다.

“저주는 잘 안착되었고, 대공께서는 이미 그 도련님한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으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이 한 가지 있더군요.”

“…….”

“몬스터의 눈으로 보면 말이지요. 대상의 ‘진실’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건 네가 영혼을 다루는 네크로맨서가 됐기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그런 제게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온 크레이거는.”

마리엘은 당시 공작가에 함께 갔던 버니언에게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몸과 영혼의 얼굴이 다르더군요.”

영혼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13살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카밀루스가 다시 적당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던가.”

마리엘은 고개를 기울이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카밀루스는 제 발치를 아직 떠나지 않은 아기 드래곤을 멀리 밀어 냈다.

꾸우, 꾸. 이번엔 작게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마리엘에게만 집중했다.

정확하게는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준비 중인 제 몸에.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얼마 전에 만져 봤을 때도 조금 달랐거든요.”

“……그래?”

“대공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지요? 어떤 마법을 쓴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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