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의 마지막에는 항상 문이 나왔다.
예의 문은…… 이 탑 1층의 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온은 등 뒤로 약간의 소름마저 돋는 느낌을 받았다.
에밀리를 찾으러 왔던 당시를 비추어 준 주마등과 ‘문’에 대한 꿈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그리고 지금의 감각과 그것들의 일치점들을 찾으면서 이온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대체 뭐지?’
이온이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어느새 3층 정도까지 올라선 탑 안을 멍하니 바라보자 에렌스트 경이 말을 붙여 왔다.
“도련님? 많이 힘드십니까?”
“아니야…….”
이온은 이 묘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억 일부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라는 걸 반대로 말하면 안 돌아올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의미다.
무언가 조건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몇 층에 도달해야 한다든가, 혹은 이 탑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등.
저도 모르게 긴장해 버린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손을 꽉 잡았다.
“더, 올라가자. 대공이 보일 때까지.”
“힘드시면 업히세요.”
“괜찮아. 마나가 가득 차 있어서.”
꿈속에서의 탑은 훨씬 더 음침했었는데, 마나의 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나쁜 것을 전부 모아서 가져가 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설마…….’
이온은 탑에 들어오기 전의 상층부의 검은 구멍을 떠올렸다. 혹시 그게, 이 달라진 느낌과 관련이 있는 걸까?
가슴이 덜컥했다. 이온은 무의식중에 살짝 떨리는 손을 제 배 위에 올렸다.
아이를 두고 카밀루스가 잘못된 선택을 할 리는 없다. 그렇지만 이온은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이온 크레이거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지?
불안감과 비례해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도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단숨에 그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을 처음 만난 층에 도달했습니다.]
“……?”
몇 층인지 세지 않았던 터라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다음의 메시지들이 펼쳐졌을 때, 이온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의 기억 일부를 재생합니다.]
* * *
[……플레이어의 기억을 재생 중입니다…….]
〈카밀루스 클로델이야.〉
탑에 갇힌 아이의 이름.
그것을 듣고 이온은 몇 날 며칠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허름한 옷도 옷이지만 손목에 묶인 검은 족쇄가 뇌리에 너무 깊게 박혀 있었다. 죄인에게나 채울 법한 것을 왜 ‘클로델’이라는 황가의 성을 가진 아이가 차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 이외에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가의 핏줄은 없었다. 그런데 황성 구석에 있는 그 의문의 탑에 황제 폐하의 핏줄로 보이는 아이가 갇혀 있다니.
눈도 파란색이었으니 성이 클로델이라는 건 확실할 터였다.
이온은 제 이런 호기심이 무척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황제의 만찬에 초대된 날, 어른들의 대화를 원하는 황제와 크레이거 공작의 눈치를 보다가 황실 도서관에 가 있겠다는 허락을 얻었다.
황실 도서관은 아주아주 넓은 곳이었고, 이온 정도의 조그마한 몸으로 책장 사이에 숨어 있으면 모두의 눈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분위기를 떠올려 봤을 때 황제와 공작의 대화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이온은 기회다 싶어 몰래 도서관을 빠져나왔고, 다시 탑으로 찾아와 버렸다.
‘금방 갈 거야…….’
일탈을 하는 와중이라 이온은 가슴이 마구 두근거림을 느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빛구슬을 띄워 놓고 역시나 어두운 탑을 천천히 오르던 이온은 그런 생각도 했다.
혹시나 제가 환상을 본 건 아닐까.
사실 이 탑에 아무도 없는데 제가 그날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발목도 확 접질렀었는데 제 또래의 아이가 치료 마법을 써서 아무런 이상도 없게 고쳐 주었다는 것은 아직도 환상 같았다.
그런 마법은 마탑 사람들만, 그것도 나이 많은 중견 마법사들이나 쓸 수 있는 줄 알았다.
당장 크레이거 공작만 봐도 마법 하나 쓸 줄 아는 게 없지 않던가.
‘아니야, 그래도 꿈이라기에는.’
제가 그런 꿈을 꿀 너무 근거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음침한 탑에서 꾸는 꿈이라니.
이온은 왠지 어디선가 마기가 뿜어져 나올 것만같이, 여전히 으스스한 탑의 분위기에 어깨를 떨었다.
더 올라가면 시간도 지체될 테니 한 10층까지만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갈까 싶기도 했다.
아이를 만난 곳이 그쯤이었던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에서 돌아가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 어른들한테도 딱히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고 못 만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 거야.’
이온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이곳에 또 올 생각을 했던 걸까?
두 번으로 끝내지 않고 세 번째, 네 번째도 상정해 두고 있었던가.
끝없는 계단 때문에 서서히 다리가 아파와 이온이 돌벽을 짚었다. 서늘하고 살짝 습기가 차 있어 벽이 미끈거렸다. 자세히 보니 돌 사이사이나 울퉁불퉁한 곳을 중심으로 푸른 이끼가 껴 있었다.
‘……겨울엔 춥겠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딱 봐도 그렇게 족쇄를 차고 있는 아이가 이런 곳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카밀루스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얼마나 이곳에서 살았던 걸까.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도 뭔가 큰 잘못을 해서 여기에 갇혀 있는 것 아닐까.
황제 폐하는 무서운 분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정을 잃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크레이거 공작 역시 그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내내 황도를 떠나지 않는 거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알겠느냐, 이온? 크레이거 가문의 사람이라면 언제나 황가에 대한 경외를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그게 우리 가문의 존재 의의인 법이야.〉
이온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을 떠올리며 이온은 지금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탈을 속으로 변명했다.
‘황가와 얽힌 일이니까.’
황가의 아이가 부당한 일을 겪고 있으면 자신이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지만.
‘족쇄를 풀어 준다든가.’
하지만 만약 아이가 죄를 지어서 여기에 있는 거라면 그런 건 오히려 황제 폐하를 배신하는 일 아닐까.
이온은 작은 머리를 팽팽 굴리다가 결국 ‘모르겠다.’로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자신은 궁금해서 이곳에 온 것이다.
그 아이의 정체가.
그렇게 깔끔하게 인정한 이온이 괜스레 입술을 지분거리며 탑을 계속해서 올랐다.
이제 한 8층 정도 됐을까.
무언가 직, 긁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 소리가 꽤 소름 끼치는 터라, 이온은 순간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그 아이 말고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안 되기에, 이온은 잠시 계단 올라가는 걸 멈추고 잠시 계단 밑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조금 기다려 봤지만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계속 무언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 이온은 그때마다 어깨를 흠칫댔다.
눈치를 보다가 다시 계단을 오른 이온이 두 층을 더 올라간 뒤,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했다.
층의 구석, 벽에 몸을 기대고 쓰러져 있는 아이였다.
“……!”
이온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얼른 입을 막았다. 아까의 직, 직, 하고 긁던 소리는 그곳에서 나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듯이 바닥을 손으로 긁고 있었다. 그러니까, 방금의 그것은 손톱이 바닥에 갈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온은 주변을 둘러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걸음을 가까이할수록 어둠에 가려져 있던 아이의 상태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헉, 허억…….
거친 숨소리. 그리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이온은 이런 상태의 사람은 처음 보는 터라 두려움에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의 두 손을 맞잡으며 그 앞으로 다가갔지만, 아이는 고통 때문인지 이온이 꽤 가까이 왔는데도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로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