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이 탑에서 못 나가도록 막는 거야. 마법이 걸려 있는데,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 걸어서 풀 수가 없어.”
“그렇, 구나…….”
나가고 싶지 않아? 이온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너무 당연한 대답이 돌아올 거 같아 참았다.
짧게 생각해도 카밀루스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할 거 같지는 않았다. 탈출 시도도 몇 번 했을 거라는 추측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온은 목이 바싹 말라 오는 기분이었다. 카밀루스의 눈치를 보다가 왜인지 카밀루스가 피하지 않는 듯하여 손목 위의 족쇄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혹시나 제삼자가 충격을 주면 풀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저보다 훨씬 많은 마법도 쓸 줄 아는 카밀루스도 못 푸는 걸 이온이 풀 수 있을 리는 없다.
게다가 족쇄에 마법을 건 사람이 카밀루스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실망한 표정이 된 이온이 그럴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카밀루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넌 나쁜 짓을 해서 여기 갇힌 거야?”
“……글쎄?”
모호한 반문을 한 카밀루스가 스스로의 두 무릎을 끌어안은 뒤 그곳에 제 고개를 기대었다.
“마탑에서 오는 사람들이 그래. 난 괴물이라고. 그래서 이런 데에 갇혀 사는 거라고.”
괴물이라니……. 마법을 잘 쓰는 것 때문에 그런 걸까?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런 데에서 갇혀 산다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온이었다.
“너보다 훨씬 센 사람이 있다며?”
“맞아. 내가 볼 땐 그 사람이 더 괴물인데.”
카밀루스가 팔에 힘을 꽉 쥐며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무서움에 질린 아이처럼 보였다.
숨마저 약간 거칠어지려는 카밀루스의 반응에 이온은 족쇄를 채운 사람이 저번에 카밀루스를 다치게 한 사람이겠구나 짐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괴롭히는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아내고 가서 아버지인 크레이거 공작에게 이야기하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누군데?”
“재니스.”
왜인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 이온이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떠오르는 것이 있어 신음처럼 내뱉었다.
“설마 마탑주님? 마탑주 재니스……?”
“……유명한가 봐?”
오브라이언 내에 설마 마탑주의 이름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카밀루스는 마탑 사람들도 만났다고 하면서 정작 마탑주가 어떤 존재감이 있는 자인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탑에 갇혀서 살아서 그런가.’
말은 잘하는 거 같아서 무의식중에 제 눈높이에 맞춰서 생각했던 이온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온은 카밀루스 쪽으로 몸을 확 틀고는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내가 꺼내 줄게.”
“뭐?”
“어, 네가 이런 말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난 공작 가문의 아들이야.”
카밀루스가 멀뚱히 보는 것에 이온은 머리를 긁었다. 설마 공작 가문이 뭔지도 모르나? 망설이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엄청엄청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에 황족이 갇혀 사는 걸 알면 도와줄지도 몰라……. 우리 가문은 황가에 충성하는 가문이거든.”
말하는데 왜 이렇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온은 제 말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황실의 핏줄인 아이가 여기 있다면 제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사실만큼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될걸.”
카밀루스의 말이 이온을 힘 빠지게 했다. 퍽 단호한 말이라 이온이 멍하니 물었다.
“왜?”
“날 여기 가둔 사람은 황제 폐하거든.”
“…….”
벙벙해진 이온이 입을 살짝 벌린 채 반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자, 카밀루스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더 대단해?”
당연히, 더 안 대단했다…….
이온은 이제 뭐라고 말해야 할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이곳에 카밀루스를 가두었다고?
‘왜?’
이온의 기준에서 현 황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온이 느끼기엔 그랬다.
한데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반응을 못 하는 이온을 보더니 카밀루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을 보고 이온이 입술을 지분거리다 물었다.
“너 왜 웃어?”
되게 심각한 상황인데.
그러자 카밀루스가 살짝 눈매를 휘며 대답했다. 목소리에도 약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네가 재밌어서.”
농담 한마디 안 했는데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이온은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뚱하게 보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이온이 둘 사이에 띄워 놓은 빛 구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문득 물었다.
“마법, 알려 줄까?”
그에 약간 우울해하고 있던 이온의 눈이 반짝였다.
“어떤 마법?”
안 그래도 이 아이가 왠지 자신의 마법 선생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이온이었다.
천재에게 마법을 배우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런 질문을 떠올리자 가슴이 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온이 몸까지 돌리며 얼른 가르쳐 달라는 의미로 카밀루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침을 삼켜 목울대를 위아래로 한 번 움직였다.
어째선지 귀 끝이 붉어진 것 같은 카밀루스가 이온의 눈을 살짝 피하며 작게 스펠을 외웠다.
잠시 뒤였다. 카밀루스의 작은 두 손 사이에서 투명하고 녹지 않는 얼음 장미가 피어났다.
* * *
〈다음에 또 올래? ……다른 것도 가르쳐 줄 테니까.〉
이온은 제 침대 위에 누워서 카밀루스가 만들어 준 얼음 장미를 계속해서 들여다보았다.
머리맡 협탁에 켜 놓은 촛불이 장미에 발갛게 비치는 모습이 예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연회장에서 자리를 비우면 다른 애들이 떠들다가 언젠가 자신을 찾을 게 뻔해서, 카밀루스 옆에 오래 있을 수 없었지만 만남은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게다가 다음에는 5층 정도에서 기다려 준다고 했다.
‘카밀루스도 날 좋아하는 거 같아.’
얼음 장미를 보다가 카밀루스의 발개진 귀끝을 떠올린 이온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가 깜짝 놀라 정정했다.
카밀루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탑에 가는 걸’ 좋아하는 거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인데, 너무 심각한 오류를 범해 버렸다.
이온이 속으로 스스로에게 바보라고 욕하던 그때였다.
내내 촛불을 켜 두고 자지 않고 있으니 바깥으로 불빛이 새어 나갔던지 누군가가 이온의 방 문을 똑똑, 똑똑똑 두드렸다.
여러 번, 그것도 아주 소심하게 두드리는 걸 보면 자신의 버틀러는 아니었다. 이온이 협탁에 카밀루스가 만들어 준 얼음 장미를 올려 두고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예상되는 이의 이름을 읊었다.
“에밀리?”
“으응, 오빠아.”
살짝 열린 문 틈으로 에밀리가 작은 머리를 쏙 내밀었다. 혼자 온 것은 아닌지 뒤에 하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렇지만 에밀리는 하녀가 들어오지 않게 먼저 문을 닫고 이온이 누워 있는 침대 위에 쪼르르 달려왔다.
실처럼 가는 금발이 약간 흐트러진 채인 에밀리가 이온이 살짝 들어 준 이불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러고는 베개에 얼른 기대며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이온과 같은 초록빛 눈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에밀리, 악몽 꿨어…….”
“악몽? 어떤 건데?”
얘길 들어 보니 그냥 단순 귀신이 쫓아오는 꿈이었다. 이온이 동생의 안정을 위해서 협탁 서랍에 미리 준비해 둔 동화책을 꺼내 들려고 했을 때였다.
“오빠, 그건 뭐야?”
에밀리가 협탁 위의 투명한 장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온은 잠시 잊고 있던 장미의 존재에 움찔했다.
‘뭐라고 말하지……?’
에밀리를 다시 돌아보는 순간까지의 시간이 다소 길게 느껴졌다.
에밀리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이온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온이 하는 수 없이 협탁 위의 얼음 장미를 에밀리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오빠가 만든 거야.”
통통한 볼을 붉힌 에밀리가 초록빛 눈을 반짝거리며 차가운 얼음 장미를 내려다보았다. 줄기를 만지는 손이 찬지 중간중간 꼼지락거리는 게 귀여웠다.
“이거 어떻게 만들어?”
“……마법으로.”
“에밀리도 마법 배울래!”
에밀리가 금세 흥분해 크게 외쳤다. 방금 전 말했던 악몽에 대해서는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방 안을 메우다 못해 문 너머까지 울릴 아이의 커다란 목소리에 이온은 깜짝 놀라 쉿, 쉿 하고 자신의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웠다.
그러자 에밀리가 움찔하며 똑같이 이온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에 이온은 웃으며 에밀리와 몸을 가까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