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오빠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또 될지는 잘 몰라.”
사실 이 얼음 장미도 카밀루스가 만든 거였다. 그 아이가 방법을 알려 주기는 했지만 이온이 잘해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렇지만 에밀리의 반짝거리는 눈을 실망으로 물들이고 싶지는 않아 카밀루스가 했던 말을 열심히 떠올렸다.
탑 안에서 들었던 음성이 머릿속에 퍼졌다.
조용조용한데 집중력 있는 목소리였다.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어른들처럼 신중함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이온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폐하께서 가두었다고…….’
게다가 카밀루스를 괴롭히는 장본인은 마탑주인 것 같았다.
지금의 마탑주는 다들 괴짜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온은 실제로 본 적 없지만 보고 온 친구들이 다들 생김새도, 말투도 이상하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지만, 만났을 때 마탑주에게서 뭔가 하나씩 얻어 온 아이들은 결국은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아이는 마법을 배웠고, 어떤 아이는 마법사들이 쓰는 귀한 물건을 가져왔다. 또 어떤 아이는 궁금했던 마탑에 가서 궁금했던 이것저것 보고 듣고 왔다고 했다.
사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경험을 자랑할 때 조금 부럽기도 했던 이온이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두 번째 봤던 카밀루스를 그렇게 만든 게 그라면, 너무 못된 사람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꺼내 줄 방법이 없을까.’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카밀루스가 떠올라 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족쇄를 푼다면…….’
그렇지만 풀려면 엄청난 마법사여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그 족쇄를 마탑주가 채워 놓은 것 같으니, 그보다 더 뛰어나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온은 마탑주보다 뛰어나기는커녕 마탑주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카밀루스보다도 못했다.
친구들보다 그냥 조금 잘하는 정도다.
그렇지만 이온은 카밀루스를 보는 순간 느껴 버렸다. 자신의 마법적 재능은 그냥 아무것도 아님을.
카밀루스의 눈에도 아주 하찮아 보일 거였다.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닌 듯 보였다.
역시나 어른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황제 폐하를 존경하는 아버지라도, 탑에 억울한 아이가 갇혀 있다고 하면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거북함이 느껴졌다 왠지 아버지한테만큼은 절대 말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의외로 엄격하시니까.’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을 기본적으로 예뻐하지만 기본적으로 꽤 엄격한 사람이었다.
‘……금지에 들어갔다고 하면 혼부터 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였다.
“오빠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밀리의 시선에 이온이 흠칫 놀라 얼른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그러자 에밀리가 입술을 삐죽삐죽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려다보니 이온의 손에는 장미인지 아니면 미역 줄기인지 모를 투명한 뭔가가 들려 있었다. 에밀리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뺨을 부풀렸다.
“모양이 이상해.”
“미, 미안, 에밀리.”
이온이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급하게 사과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에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이온은 얼른 정체 불명의 그것을 없애 버리고 금세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움찔움찔하는 에밀리의 앞에서 서둘러 변명을 입에 올렸다.
“오빠가 이걸 오늘 배워서 서툴렀나 봐.”
“거짓말. 오늘 마법 선생님 안 왔잖아.”
“…….”
에밀리의 말에 이온은 뜨끔해 버렸다. 에밀리의 한마디가 가끔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이온은 난처해하며 얼른 대꾸했다.
“그게, 오빠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는 친구가 있거든. 오늘 파티에 다녀왔잖아? 거기서 배워 왔어.”
“친구……?”
이온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에밀리가 눈을 다시 빛냈다.
“에밀리도 오빠 친구한테 마법 배울래! 나도, 나도!”
“…….”
변명을 하면 할수록 넘어야 할 산이 더 많아지는 듯했다.
이온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난처해하다가 에밀리를 손짓해 더 가까이 오도록 했다.
그러자 이불 속에서 에밀리가 얼른 엉덩이를 옮겨 오빠와 몸을 더 바짝 붙였다. 이온은 에밀리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거는 에밀리랑 오빠만의 비밀이야.”
그러면서 약속하자는 의미로 새끼손가락을 펴서 내밀었다. 비밀을 공유하기 좋아하는 에밀리가 서둘러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그곳에 걸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에밀리 비밀 잘 지켜.”
어린아이들의 이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지만, 에밀리는 실제로 그랬다.
이온이 살짝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어른들에게 결코 하지 못해 답답했던 비밀 이야기를.
* * *
〈다른 마법사 언니들은 못 풀어?〉
에밀리는 다 듣더니 그런 말을 했다.
카밀루스가 얼핏 흘리는 말에 의하면 마탑주 말고도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이 드나드는 것 같기는 했지만, 다 한통속이라고 생각했던 이온이었다.
그렇지만 에밀리의 순진한 말에 이온은 약간 의문을 품기는 했다.
생각해 보면 탑에 갇힌 아이인데 카밀루스는 자기 이름도 알고, 제 상황이 어떤지도 적당히 인지하고 있는 데다, 말도 잘했다.
마법을 쓰는 건 천재라 그런 걸 수도 있긴 하지만 그 많은 종류를 탑에 있는 아이가 혼자서 깨우치기는 어렵지 않을까?
‘마탑 마법사들이 가르쳐 줬나…….’
어쩌면 카밀루스의 말동무가 돼 주는 사람이 자신 말고 또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어렴풋한 추측을 하는 가운데, 이온은 다시 한번 카밀루스를 찾아가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이제 순간 이동 마법에 익숙해진 덕에 꽤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돼 혹시나 싶어서 실험도 여러 번 해 봤다.
제 방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시전을 해 보니 공작가 저택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다만 황성 안쪽으로는 당연히 어려웠다. 외부 침입이 안 되게 마탑주가 형성해 놨다는 황성 결계가 지키고 있으니, 이온의 허접한 마법 실력으로는 마음대로 드나들 곳이 아니었다.
‘초대를 받을 때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찾아갈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이온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황성에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엄연히 제국법으로 막아 둔 일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범죄에 가까운 생각이었으나 이온은 그런 무서운 자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황성에 자주 드나드는 편이지만 이온을 늘 대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큰 행사가 있고, 허락이 있을 때만 이온도 데리고 갔다.
나중에 내황성에 드나드는 건 후계자인 이온이 될 거라며, 다행히 크레이거 공작은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온과 함께하게 했지만 매일같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번 만남 이후 거의 몇 달간 가지 못해 이온은 우울해져 가고 있었다.
‘얼굴도 까 먹겠어…….’
혹시 날 잊어버리는 거 아닐까.
다음에는 5층까지 내려와 주기로 했는데, 어쩌면 너무 안 나타나서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가르쳐 주었던 얼음 장미 만드는 법을 열심히 떠올렸다.
그러면 카밀루스와 마주쳤던 세 번의 경험을 머릿속으로 상기했다. 그러자 괜스레 이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음으로 찾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공격하긴 했지만, 그것은 사실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면 카밀루스는 무척 친절한 아이인 거 같았다.
발목이 삐었을 때도 치료해 주었고, 제가 아파서 정신없을 텐데도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자 탑에서 탈출하게 해 주었다.
그런 부분을 떠올리고,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그렇게 마음속에 여러 번 새기자 이온의 안에서 무언가 피어나는 듯했다.
그렇게 여러 번 만난 게 아님에도 왠지 점점 더 친숙해지는 느낌이었다.
파란 눈도, 살며시 빨개지는 귀 끝이나 살짝 웃는 모습도 무척 예뻤던 것 같다.
〈다음에 또 올래? ……다른 것도 가르쳐 줄 테니까.〉
탑 밖에서 자신도 이렇게 계속 그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그 아이도 탑 안에서 그러고 있지 않을까.
역시 지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어느 날엔가부터는 초조해져 가는데, 다행히 황후가 주최하는 행사가 겨우 몇 달 만에 열렸다.
이날만을 기다려 왔던 이온은 자신에게서 모두의 시선이 멀어질 때만을 기다렸다가 이내 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5층에 도착했을 때.
“……아.”
이온은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카밀루스가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난 만남 때 계단 밑의 그늘에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그때의 자세 그대로 제 무릎을 껴안고 잠들어 있었다.
이온은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왠지 모를 가슴 아픔을 느꼈다.
‘진짜로 날 기다리고 있었나 봐.’
몇 달 만에 찾아왔으니 이곳에 없어도 다른 층에는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찾아왔다.
그렇지만 실제로 여기 있는 걸 보면 카밀루스가 정말로 자신을 간절히 기다렸나 보다.
몇 달 만에 찾아와서 우연히 오늘만 이곳에 있다가 마주쳤을 확률은 별로 없어 보이니 아마 매일 5층까지 내려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층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온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카밀루스에게 다가가 아이를 흔들었다.
“저, 카밀루스?”
그러자 몸이 튕기듯이 움칠하는 게 느껴졌다. 놀라 손을 떼자마자 카밀루스가 고개를 들어 이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이온은 깜짝 놀랐다.
“카밀루스? 울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