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62)화 (262/317)

새장 안에서도 꿋꿋하게 희망을 마음에 품고.

〈마탑 아저씨들이 그러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래. 어딘가에 이 세상을 닮은 또 다른 세상이 있대.〉

〈그게 무슨 뜻이야?〉

〈어…… 그러니까 다른 차원……?〉

〈다른 차원이라는 게 뭐야?〉

황성 탑에서 황성의 너른 정원만 내려다보는 아이는 마탑 사람들이 전해 주는 허무맹랑한 얘기들을 진심으로 믿었다.

〈사람들이 엄청 빠른 자동 마차 같은 걸 타고 다니고, 하늘엔 고철로 된 새가 날아다닌대. 이상한 네모 안엔 사람들이 거울처럼 비치고…… 그거랑 대화도 한다는데…….〉

〈그게 뭐야?〉

헛소리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물었을 때 카밀루스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사실 나도 잘 몰라…….〉

괴짜 마법사들의 상상력에 속았구나.

〈그렇지만, 거길 갈 수 있는 마법이 있다고…… 하던데.〉

〈가고 싶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차라리 웃어 버리며 하는 이온의 질문에 카밀루스는 황성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입을 달싹였다. 잠시 이온을 바라보던 카밀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른 데 가기 싫어.〉

흔들리는 파란 눈이 이온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온이 그 눈을 마주치자 흠칫한 카밀루스가 이내 눈을 피했다.

눈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분명 있는 것 같은데, 뒷말을 더 꺼내지 못하고 저를 피하는 그 모습에 이온은 의아함을 느꼈다.

카밀루스가 곧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온, 네가 여기 있으니까…….〉

작은 아이의 그 자신 없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이온은 콧등이 찡해짐을 느꼈다.

갇힌 새가 기약도 없는 언젠가의 날갯짓을 계속해서 꿈꿔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온은 겨우 가끔 한 번 찾아왔던 자신에게 매달린 카밀루스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일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름 없는 탑에 때로는 외롭게 방치되고, 누군가가 찾아오면 학대를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저에게 호의를 가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카밀루스에게는 큰 사건이었던 것일 터다.

그만큼 그는 목말라 있었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 목마름이 지금이라고 해서 제대로 가셨을 리 없다.

‘끔찍해.’

이런 곳에 태어나자마자 아들을 가두고서 남의 학대를 눈감고 용인한 선황제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용서받을 수 없는 거 아닐까.

죽어 버렸으니, 복수도 못 하게 되었다.

수년간 상처는 오롯이 카밀루스의 몫이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그 세월을 극복해 낸 건지 알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카밀루스의 마음이 얼마나 깎여 나갔을지.

이온은 지금 그가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거기에 본인 스스로 쌓아 올린 것들이 존재하는 데다, 이온의 마음까지 품으려고 하고 있으니 카밀루스에 대한 존경심마저 일 지경이었다.

한데 말이 끊긴 사이 뒤로 다가온 페드로가 이온을 넌지시 불러 왔다.

“소공작……?”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이온이 뒤돌아섰다. 페드로는 굳은 이온의 표정을 보고서 약간 긴장한 듯했다.

그에 이온이 의식적으로 입매와 미간에서 힘을 풀었다.

“어서 카밀루스를 찾으러 가요.”

그러고 조용히 에렌스트 경을 돌아보자 그가 이온에게 다가왔다. 이온이 딱히 무어라 명령하지 않았으나, 알아서 들어 올려 안고 계단을 올랐다.

탑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며 이온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되찾은 기억은 일부일 뿐,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상태 이상: 기억 상실. 이전의 기억이 없음.]

[플레이어는 현재 과거의 기억을 찾기 위한 조건 중 두 가지를 충족하였습니다. (2/3)]

[충족하기 전의 조건은 잠금 처리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확인이 불가합니다.]

상태 이상 ‘기억 상실’ 페널티를 풀기 위한 조건 하나가 뭔지 아직 풀지 못했다.

‘이 탑에서 해제할 수 있을까.’

그러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보다 카밀루스를 찾는 게 먼저이긴 했다.

대체 탑 상층부를 가린 검은 동공이나, 이 탑에 가득 차 있는 마나의 기운이 무엇 때문인지도 위층으로 향하면 알 수 있으리라.

이온은 불안감에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가슴을 억눌렀다.

카밀루스가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주를 풀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그렇지만 곧 탑 위에서 길게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잉…….

하고.

이온은 그게 성체가 된 욤뇽이의 울음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야말로 불길함의 전초였다.

* * *

손끝에 무언가를 꿰뚫는 감각이 스치는 순간, 일시에 모든 것과의 연결이 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소음도, 피부에 닿던 감각도.

아마 제힘으로 유지하고 있던 것들마저 다 거두어졌으리라.

이곳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플레이어님, 다시 한번 ‘틈’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실’과 ‘틈’의 규칙은 동일하지 않으나 시간과 죽음에 관련한 규칙은 유지됩니다.]

카밀루스는 언젠가 봤던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나머지는 다 사라지고 덜렁 하나 남은 상태 이상 목록이 눈앞에 떴다.

[상태 이상: 마법 계약]

‘죽음과 관련한 내용이라 이건가.’

그가 존재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던 모든 마법들이 소멸됐지만, 언젠가 이온의 몸에 걸어 둔 마법 계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온통 카밀루스의 죽음에 대한 조건이 덕지덕지 붙어 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이곳은 시간과 죽음이 공유되는 곳이니까.

카밀루스는 제 눈앞에 뜨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잔뜩 표정을 굳혔다.

[‘틈’의 소멸 시간까지 앞으로 0시간 59분 52초…….]

[플레이어가 마리엘을 본 ‘틈’에서 소멸시킬 확률은 99%입니다.]

[플레이어가 본 ‘틈’에서 소멸할 확률은 99%입니다.]

그리고 곧 서로 99% 확률로 사라질 운명이 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함께 마법에 휘말려 ‘틈’으로 들어오게 된 마리엘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짙은 어둠 속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흥미로운 곳은 뭡니까?”

‘틈’에는 마기가 가득 차 있었다.

생명체만 제외하고 탑 안의 것들을 일시에 거두어 내며 ‘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카밀루스는 자꾸만 제 몸에 스며들려고 시도하는 마기를 밀어 내며 마리엘의 피가 묻은 얼음 창을 녹였다.

붉은 피는 곧 ‘틈’ 어딘가로 떨어져 사라졌다.

“1시간 안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이대로 너와 난 죽게 될 거야.”

카밀루스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함께 죽을 운명이 되었는데, 이 정도 설명쯤, 못 해 줄 것 없었다.

그의 말에 마리엘이 허공처럼 느껴지는 바닥을 밟으며 카밀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웃음기를 담았다.

“제 눈앞에 이상한 글자가 떠 있네요. 0시간 59분 21초.”

그 말에 카밀루스는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역시 ‘틈’에 오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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