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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63)화 (263/317)

마리엘이 묘하게 이곳에 익숙해 보이는 카밀루스에게 질문했다.

“그럼 이곳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는 방법은?”

“글쎄, 간절히 소원해야 할까?”

카밀루스의 대답이 모호하게 나오자 마리엘은 마음에 안 드는 듯했으나 사실 카밀루스도 그에 대한 정답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이곳에서도 두 사람이 싸울 이유는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카밀루스가 없애 버렸던 얼음 창을 다시 생성해 손에 쥐었다. 한기가 흐르는 푸른 창의 끝을 그녀의 쪽으로 향하며 카밀루스가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한가? 어차피 나가기도 전에 나한테 죽을 것을.”

“…….”

“내가 지금껏 너희들을 살려 두고 있었던 건 내 넘치는 자비심 때문이 아니다. 내 곁에 이온이 있었기 때문이지.”

자신이 함부로 날뛰면 그들이 이온을 어떻게 흔들어 놓을지 알 수 없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게 약한 이온을 그런 위험에 노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엔 이온이 없었고, 선공권은 카밀루스가 가져왔다.

그리고 마리엘을 죽이면 적어도 제 연인만큼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카밀루스는 어젯밤 페드로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유사시엔 크레이거 공작을 황위에 올려. 북부의 귀족들도 도울 거다.〉

〈대체, 대체 그 유사시라는 게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밀루스의 말을, 당연하지만 페드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황도에 올 때 황위 찬탈을 하러 오는 줄 알았다는 언젠가의 소회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카밀루스가 아예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 제삼자를 황위에 올리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처음에는 화를 내던 그였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애원했다.

〈대공, 제발 그러지 마세요. 대공께서 잘못되시면 저는 어떡하라고 그러십니까…….〉

무슨 일을 할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무는 카밀루스의 앞에서 그는 눈물까지 비쳤다.

카밀루스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보다 더 진짜 아버지 같은 사람, 카밀루스에게 그런 존재가 바로 페드로였다. 카밀루스는 그에게서 제 것을 아낌없이 내줄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이온에게 제 인생 전부를 걸 수 있는 카밀루스이지만, 딱 하나 눈에 밟히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면 페드로였다.

자신이 없으면 외로워할 그를 알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여 페드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와중, 카밀루스 역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어차피 내가 적통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전하…….〉

〈일이 잘 풀리면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지금은 크레이거 공작을 황위에 올리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지. 그리고 클로델 황가는 이대로 막을 내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클로델 황가는 오브라이언 역사에 그렇게 좋은 족적을 남긴 편이 아니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사실 그렇게 긍정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밀루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페드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모양이었지만, 결국 다 포기하고 딱 하나만 남겼다.

〈말씀대로 도련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대신, 대공께서도 약속하세요.〉

카밀루스의 두 팔을 붙잡고 그는 간절히 매달렸다.

〈제발 무모한 짓 하지 말고, 어떻게든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거 하나도 설마 못 지키시는 건 아니겠지요.〉

〈……지킬게.〉

사실 무사히 돌아오는 건 카밀루스의 욕망이기도 했다.

이온과 배 속의 아이를 두고 가는 건 그도 싫었다. 그러나 마리엘이 자신보다 얼마나 더한 괴물일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를 마음대로 날뛰도록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 이길지조차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틈’으로 향하면 설령 이긴다 해도 빠져나올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처음엔 저도 모를 방법으로 어떻게 됐지만, 두 번째는 확신하지 못했다.

시원찮은 대답을 듣고 페드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틈으로 다시 눈물을 떨어뜨렸다. 카밀루스는 무어라 달래 줘야 할지 몰라 차라리 놀렸다.

〈울보네, 아저씨.〉

〈…….〉

〈걱정하지 마. 나 엄청 세잖아.〉

허세도 부려 봤으나 페드로의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오랜 기간 함께해 왔고, 페드로 자체도 바보가 아니니 눈치채 버렸을지도 모른다. 카밀루스가 정말로 죽음까지 각오해 버렸다는 걸.

카밀루스는 어쩌면 거의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페드로에게 고백했다.

〈늘 고마웠어. 북부에서 아저씨가 없었으면 많이 힘들었을지도 몰라. 날 여기까지 이끌어 준 사람은 페드로였어.〉

그 말에 페드로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대공.〉

〈이름 한번 불러 주지?〉

〈카밀루스, 넌 내 아들이었어.〉

〈…….〉

끝내는 카밀루스도 울컥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페드로의 떨리는 어깨를 잡았다. 그러다 꽉 안았다.

막 북부에 갔을 때는 크고 무섭게만 보이던 그였는데, 8년 새 제가 페드로보다 훨씬 더 커졌다. 안고 보니 그가 이렇게 작았었나 싶어 당혹감마저 일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카밀루스는 그를 무서워서 따르는 게 아니었으므로.

페드로를 존경했고, 사랑했다.

〈당신한테서 많은 걸 배웠던 것 같아. 인내와 미워하지 않는 법, 사랑. 뭐 그런 거.〉

〈난 가르친 적 없다.〉

〈당신을 보면서 내가 알아서 배웠다고.〉

〈그 결과가 이런 거였으면 배우지 말았어야지.〉

카밀루스는 무어라 대꾸해 줘야 할지 망설여져 입술을 달싹거리다 대꾸했다.

〈하지만 이온은.〉

이야기하면서 탑에 갇혀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첫눈에 반하고 두 번, 세 번 만난 뒤 그 아이는 카밀루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느 순간 탑에서의 고통을 참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제가 그 아이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죽지 못해 살았지만, 이온을 보기 위해 살고 싶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단 하나의 빛줄기였고, 카밀루스는 그것을 정신없이 쫓았다.

혹시 그 빛이 다시 비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다가도 이온이 찾아오면 제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대로 탑 안에 영원히 갇혀 있었어도, 그가 찾아오는 작은 위로만 지속되었다면 카밀루스는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온은 카밀루스를 새하얀 빛 속으로 이끌어 주었다.

〈이온은, 나한테 세상을 준 사람이야.〉

카밀루스의 말을 들은 페드로는 힘없이 웃었다. 더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아마 인정의 의미였을 것이다. 네가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이온 크레이거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괜찮다는.

이후에 이온이 찾아왔을 때 조금 냉정하게 돌아서기는 했지만 결국은 오늘 제 곁이 아닌 이온의 곁에 머묾으로써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비쳐 주었다.

[‘틈’의 소멸 시간까지 앞으로 0시간 58분 18초…….]

이 공간에서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방도를 알 수 없었지만.

카밀루스가 적의를 드러내자 마리엘이 그만 케이프를 벗어 던졌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곳은 묘한 공간이네요. 빛이 없는데 서로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이고.”

곧 반쪽이 검은 얼굴과 미묘하게 균형이 틀어진 몸이 카밀루스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간 케이프를 완전히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마기에 잠식된 몸 일부가 변형되었다더니 확실히 티가 났다.

마기는 오른쪽 왼쪽을 가리지 않고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듯했으나 일부 잠식되지 않은 부분과는 육안으로 구분될 정도였다.

마리엘은 어느새 카밀루스에게서 꿰뚫린 상처가 회복된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제 몸, 무척 끔찍하지 않습니까?”

“…….”

“이 괴물 같은 몸 때문에 저는 원치도 않은 긴 삶을 살게 생겼어요.”

전대 마탑주를 사랑한다고 했던가.

배신당한 그녀가 이후 해 온 짓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마리엘이 왜 그런 짓들을 했는지 동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카밀루스가 그 점을 짚었다.

“돌아가고 싶었던 거군, 너는.”

“평범한 몸으로.”

예상했던 대꾸가 돌아오자 카밀루스의 입이 비틀려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손짓 한 번에 거대한 얼음 송곳 여러 개가 마리엘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그대로 그녀의 몸을 꿰뚫을 듯이 내리쳐졌다.

쐐액,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스치는 순간이었다. 예고 없는 공격이었음에도 마리엘은 인간보다 다섯 배 이상 빠르다는 몬스터의 감각으로 그것을 막아 냈다.

그녀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채찍처럼 휘둘러져, 얼음 송곳을 손쉽게 동강 냈다. 그냥 중간의 일부를 삭제하듯이.

이어 그 기운은 카밀루스의 앞까지도 휘둘러졌다.

절대 그것에 닿지 말아야겠다는 본능의 경고에 의해 카밀루스가 서둘러 몸을 틀어 피하며 그녀의 뒤로 순간 이동 했다.

차아앙!

마리엘이 있던 자리에 얼음들이 서로 부딪치는 청명한 소리가 났다. 어느새 마리엘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

곧 카밀루스의 뒤에서 나직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께서 쓰시는 마법은 이미 저도 다 쓸 줄 아는 것들이에요.”

말하는 중간에 카밀루스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마리엘에게 찔러 넣었다. 그러자 딱 그만큼 뒤로 깔끔하게 물러난 그녀가 몸에서 수십 개의 칼날 같은 검은 기운을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 했다.

“……!”

그것에 닿자마자 카밀루스가 들고 있는 무기는 소용없게 되었다. 몸 또한 간신히 그 칼날을 피해 냈다.

그러나 순간 옷깃이 스쳤다. 단순히 베인 게 아니라 옷감 일부가 사라진 것을 보며 카밀루스는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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