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피히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나?’
마리엘이 쓰는 저 마법은 방어막을 펼쳐 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면 카밀루스만 손해였다. 마리엘도 그걸 아는지 여유를 부렸다.
“대공, 저를 죽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차피 넌 1시간 안에 이 틈에서 소멸될 거다.”
“글쎄. 대공을 죽이면 이곳을 나갈 답이 보일 거라고, 제 본능이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공도 피차 1시간 안에 소멸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을 어떻게 열었는지는 궁금하네요. 좀 익숙해 보이는 게, 대공께서는 이미 와 본 적이 있으신 모양인데.”
그녀의 말대로 카밀루스는 아주 예전에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8년 전에.
카밀루스는 마리엘을 예의 주시하며 걸음을 서서히 좁혀 나갔다. 마리엘도 어쨌든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모양인지 카밀루스의 행동에 따라 살짝씩 걸음을 옮겼다.
“답을 안 내 주실 생각이신가 보죠, 대공?”
“여긴.”
카밀루스는 시스템에 의해 제 입이 막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곳이 ‘틈’이라 그런지 막히지 않았다.
“금기를 범한 자들이 올 수 있는 곳이지.”
“금기?”
“과거의 위대한 마법사들이 절대 써선 안 된다고 정해 둔 몇몇 개의 마법이 있지 않던가.”
카밀루스의 말에 마리엘은 조금 미간을 좁혔다.
지금 카밀루스가 이야기하는 건 제국법으로 사용을 금지하는 흑마법 같은 유가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스스로 쓰지 말아야 하는 암묵적인 몇 가지의 마법들이 있었다.
목숨을 빼앗거나 시전자의 모든 마법적 능력을 소멸시키는 마법들.
겨우 살아남은 자들이 기록하여 둔 경고에 의해서 몇 가지 마법들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절대 쓰지 말자며 암묵적인 합의되어 있었다.
대부분 인간계의 당연한 섭리를 방해하는 마법들이 그런 유였다.
죽은 이를 되살린다든가, 계절을 바꾼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마리엘은 흥미 어린 눈으로 카밀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마법을 썼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그것을 알면 이온 크레이거의 비밀 또한 알게 되리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어 구미가 당겼다.
마리엘도 결국은 한때 연구에 미쳐 있던 마법사로서 순수한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금기 마법을 쓴 겁니까?”
“그건 날 이기면 알려 주도록 할까.”
카밀루스는 답을 보류하며 마리엘의 주변을 눈폭풍으로 감쌌다. 마리엘의 발밑에서 시작된 그것이 이내 그녀를 가두었고, 카밀루스는 그사이 결계를 펼쳐 눈폭풍과 함께 마리엘을 가두어 버렸다.
카밀루스는 그사이 기다란 얼음의 낫을 손에서 뽑아 내며 뛰어올랐다. 그러고 제가 쳐 놓은 결계를 내리쳤다.
콰과광!
제힘끼리 부딪치며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에 결계 안쪽의 마리엘이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게 선명히 보였다.
몬스터의 감각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신체가 변형된 마리엘도 마찬가지인지 청각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것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제가 깔아 둔 결계를 부서지기 직전까지 스스로 공격해 계속해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결계 안의 폭풍 속에서 잔뜩 화가 난 마리엘이 제 기운을 해방하며 결계를 깨뜨려 버렸다.
순식간에 해체된 결계 속에서 마리엘이 튀어나왔다. 그에 폭풍 위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밀루스가 그대로 마리엘의 허리를 썰어 버릴 기세로 낫을 휘둘렀다.
쿠웅, 하며 묵직한 소리를 내며 카밀루스와 마리엘의 기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순간 그 파동이 두 사람 모두를 밀어 냈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린 건 카밀루스가 먼저였다. 굉음에 노출되어 있던 마리엘은 균형 감각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비틀거리다가, 제 바로 옆에 나타난 카밀루스가 다시금 낫을 휘두르는 모습에 흠칫했다.
눈을 크게 뜬 모습을 똑똑히 본 카밀루스가 그녀의 목을 참할 생각으로 낫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목을 베어 내기 직전, 그녀가 몸을 트는 바람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사악!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가르자 마리엘의 긴 머리가 몇 가닥 베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살을 베는 느낌을 확실히 받은 카밀루스였다.
그가 베어 낸 건 마리엘의 오른손이었다. 사람의 손이었다면 회복 불능이었을 상처였을 테지만, 커다랗게 몬스터화가 된 검은 손은 그저 피만 흘리고 있었다.
동상을 입을 정도로 차가운 얼음 낫의 기운에 베어진 곳이 하얗게 얼어붙은 것이 보였으나 이내 피에 녹고, 빠르게 봉합되어 나갔다.
과정이 눈에 생생히 보일 정도로 엄청난 회복력에 카밀루스는 잠시 당황했다.
실제 몬스터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리엘이 그런 그를 보면서 차게 웃었다.
“왜요. 절 죽이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드셨습니까, 대공?”
카밀루스는 미약하게나마 헛웃음을 쳤다.
“몸에 이상한 짓을 한 모양이지.”
마리엘이 눈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녀의 손 부위에서부터 손등이 조금씩 울퉁불퉁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회복의 대가는 너무 끔찍한 것이지만 말이지요.”
“…….”
전대 마탑주가 마리엘에게 건 저주가 그녀의 몸을 조금씩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열심히 밀어 내려고 노력하는지 변화는 그녀의 아래팔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손끝을 본 순간, 카밀루스는 저를 덮치는 커다란 어둠을 자각했다.
어둠에서 솟아난 검은 바늘들이 카밀루스의 머리 바로 위에서 쇄도했다.
곧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스쳐 갔다. 제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카밀루스는 마리엘과 멀찍이 떨어진 뒤였다.
그렇지만 서로의 존재를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두 사람은 금세 힘을 맞부딪쳤다. 쿠웅, 쿵, 하는 거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마리엘이 제 몸에 두르기 시작한 방어막에 카밀루스의 공격이 번번이 가로막혀 나가는 와중에도 마리엘에게서 촉수처럼 뻗어 나온 마기들은 카밀루스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안 그래도 탑의 마기들을 일시에 한데 모아 이곳에 끌어들인 탓에 ‘틈’ 안엔 마기가 한가득이었다.
단순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마나 운용을 방해하는 그것들 때문에 카밀루스는 시간을 끌수록 본인이 불리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마리엘은 주변의 마기까지 활용해 카밀루스에게 공격을 가했다.
게다가 마리엘은 설령 인간으로서의 신체가 부서지더라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카밀루스 때문에 변형된 손처럼 몬스터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될 테니까.
‘본인은 원치 않는 모양이지만.’
카밀루스는 생각하며 다시금 마리엘과 거리를 좁히며 오른손으로 잡은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횡으로 그어진 날카로운 공격에 마리엘이 방어막을 펼치는 것에 카밀루스도 마나를 집중해 순간적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힘이 도로 부딪쳤으나, 방어막을 뚫은 카밀루스의 날이 마리엘의 배를 갈라 버릴 기세로 날아들었다.
“……!”
그리고 마리엘이 피하는 방향에 카밀루스의 얼음 송곳이 떨어져 내렸다.
화살처럼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마리엘의 몸을 관통할 기세로 쏟아졌다. 그중 하나가 마리엘의 어깨를 스쳤고,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카밀루스가 휘두르는 낫의 진로에 따라 마나가 발산했다.
또다시 파공음이 두 사람 사이에 울렸고, 이번에 밀린 사람은 마리엘이었다.
거의 튕기듯이 뒤로 물러난 마리엘은 조금 당혹한 표정이었다. 명확하게 제가 우위에 있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놀란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녀는 손과 함께 잘렸던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제야 그게 우연이 아님을 깨달은 듯싶었다.
질문에 답을 하듯이 카밀루스는 제 뒤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꿈틀거렸다.
한기와 난기를 동시에 품은 그것이 카밀루스의 낫에 덧입혀지며 눈을 멀어 버리게 할 정도의 강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카밀루스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왜 이해를 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군. 날 이런 괴물로 만든 건 네가 아니었나? 나의 어머니에게 저주를 걸면서까지 말이야.”
“…….”
마리엘은 낫을 뒤덮은 불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을 눈앞에 두고 무슨 마법인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나 네가 만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너에게 호의적이길 바라거나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과한 욕심 아니었던가, 돌아보도록 해.”
어린 제게 금제를 걸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온에게 저주를 걸었을 때는 설마 카밀루스의 칼날이 자신에게 들이밀어질 지금과 같은 상황은 꿈도 꾸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카밀루스 역시 그녀의 계획표를 미리 들여다보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못했을 터.
그러나 이제 승기는 제게 있다.
“그러게요. 이상한 상황이네요…….”
카밀루스의 말에 마리엘은 작게 웃더니 검은 괴물의 손에서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기나긴 촉수가 뻗어 나와 검은 기운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카밀루스는 제 몸을 향해 오는 그것을 낫에 덧입혀진 푸른 불꽃으로 갈라 버렸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불타고 얼어붙었다.
강력한 마나의 기운으로 공기처럼 꽉 채워져 있던 마기가 태워졌다. 그건 마리엘의 검은 채찍 또한 마찬가지였다.
닿자마자 모든 걸 사그라뜨리는 카밀루스의 기운을 느끼고 마리엘은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생각해 보면 선황제 레이어먼 클로델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죠.”
“…….”
선황제의 말이 나오자 카밀루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마리엘이 가볍게 뛰어올랐다.
카밀루스를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마리엘은 그만 제 실수를 인정했다.
마리엘은 천재적인 마법사였고, 어쩌면 카밀루스보다 더 강대한 힘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기로 뒤덮여 있는 이 몸을 가지고는 한계가 있었다.
카밀루스는 마리엘의 뒤에서 꿈틀대기 시작하는 무언가를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한쪽 눈을 오가던 마기가 조금씩 물러났고, 곧 마기에 잡아먹히기 전인 새하얀 얼굴로 돌아왔다.
마기를 어딘가로 밀어 내는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긴장한 채로 마리엘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오는 기묘한 모양의 검은 것들을 보다가 곧 깨달았다.
머리에서부터 등을 따라 돋아나는 촉수들과 양쪽으로 뻗치는 날개.
누군가 마리엘이 몬스터로 변화한다면 ‘리치’가 아닐까 추측했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추측은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카밀루스는 제 앞에 인간도 아니고, 몬스터도 아닌 모호한 생명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그게 어떤 것의 변형인지.
“……바실리스크.”
어둠을 호령하는 뱀들의 왕.
그녀에게로 주변의 마기들이 일시에 몰렸다가 이내 강한 힘과 함께 발산되며 카밀루스에게로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방어막을 발동했으나 부딪침조차 없이 손쉽게 뚫고 들어오는 것에 카밀루스는 놀라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