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도 안 되게 카밀루스를 잃을까 봐.
그런데 이온의 말을 듣고 한 박자 늦게 나온 카밀루스의 대꾸는 의외로 시큰둥했다.
“……그래?”
이온은 왜인지 제게서 억지로라도 정을 떼려는 듯 보이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진짜로 전부 포기해 버린 걸까.
왜…….
자신의 저주를 풀어 준 것으로 그래도 제가 최소한으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태도일 수가 없었다.
시큰거리는 코끝을 느끼며 이온이 다시 매달렸다.
“내가 몇 달 만에 찾아갔는데 나한테 울면서 안겼잖아. 너도 기억하지?”
“…….”
물음엔 여전히 대답이 없다.
게다가 이젠 이온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이온은 초조해져 말이 빨라졌다.
“나한테 얼음 장미도 만들어 주고. 사실 고백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처음 만난 날 나 보고서 얼굴 엄청 빨개졌었잖아. 그때 반했던 거지?”
즐겁게 얘기하면서 놀려 주려는 의도였는데 어째선지 중간에 목소리에 떨림이 섞여 버렸다. 눈앞을 가리던 투명한 눈물이 툭 떨어지면서 뺨을 붉히고 턱에 맺혔다.
콧숨을 들이켜며, 이온이 반응이 없는 카밀루스를 불렀다.
“카밀루스?”
“그만해…….”
겨우 한마디 뱉은 카밀루스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섞여 있었다. 이상한 목 끓는 소리도.
“여긴 위험해. 그러니, 크, 크으윽, 더 이상 찾아오지 마.”
“…….”
그렇지만 뒷말을 듣는 순간 이온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러나 표정을 보지 못한 카밀루스는 오히려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그의 머릿속엔 에렌스트 경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감사하게도 냉정한 이성이 돌아왔다.
몸을 점령하려고 하는 마기를 억누르기 어려워 자꾸만 크륵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카밀루스는 한참을 집중해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쯤에야 말했다.
“여기에서 회복되긴 어려울 거야. 진짜로 완전히 몬스터화가 될 것 같으면 버니언에게…… 내 영핵을 깨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두 사람 말을 그저 듣기만 하며 뒤에 서 있던 페드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앞으로 나서며 이야기했다.
“대공……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만 끝을 맺기 전에 이온이 쾅, 하고 천창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사납게 소릴 질렀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카밀루스 클로델!”
순간 페드로도 깜짝 놀랄 만큼 격한 반응이었다. 이온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왜, 왜 항상 스스로 먼저 포기하는 거야? 내가 널 기다리겠다고 말하잖아. 네가 필요하다고! 그럼 죽을 만큼 버텨야 하는 거 아니야? 죽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것 아니냐고!”
“…….”
“네가 지껄였던 사랑은 겨우 이 정도야? 전부 다 바칠 수 있다면서, 전부 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 의지밖에 안 됐었어?”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이온이 숨을 헉, 헉, 밭게 들이켰다. 그러다 폐가 꽉 조여와 기침을 시작했다.
급하게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쏟아 낸 이온은 배가 땅겨 몸을 수그렸다.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윽, 쿨럭…… 흡…….”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페드로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소공작?”
그가 다가와 살펴 주려는 걸 이온은 손을 들어 거부했다. 그리고 몇 번 더 기침을 흘린 뒤 배를 부여잡았다.
저와 카밀루스의 아이가 있는 곳을.
아직 배가 완전히 부르지는 않았지만 살짝 볼록해진 상태인 그곳을 두 팔로 감싼 이온이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 사이로 숨소리 가득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실망이야, 카밀루스.”
“…….”
“그렇지만 난 너 포기하지 않아. 다음에 다시 올게.”
어쩌면 다음에 만나려면 버니언에게 또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온은 몇 번이고, 얼마든지 그렇게 할 거였다.
카밀루스가 자신의 저주를 풀어 주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상황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온도 카밀루스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해답을 찾을 것이다.
그를 멀쩡하게 되찾을 해답을.
이온이 다부진 눈빛으로 바닥에 형편없이 묶여 있는 카밀루스를 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다시 널 이곳에서 구하고 말 거야.”
“이온…….”
그제야 카밀루스가 이온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으나 이온은 일어났다.
방금 전의 선언과 달리 퍽 냉정히 뒤돌아선 이온이 뒤의 철문을 열었다. 카밀루스에게 할 말이 많았으나 원하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못 한 페드로는, 일단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쿵, 닫혔다.
카밀루스는 그에 옅은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꺾어 이온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바라보던 카밀루스가 어느 순간 눈물을 흘렸다.
이온의 말대로 죽을 만큼 버티고 싶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망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대로 서서히 인간성을 잃고, 이온에 대해서도 전부 망각하는 것이 아닐까 내내 두려웠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이온이 기억을 되찾았다니…….
신이 저를 농락하는 것 같았다.
신의 영역을 탐한 자를 벌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기억하는 걸까…….’
카밀루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속으로 빌었다.
제발, 제발.
어린 시절만, 그때의 기억만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차라리 자신을 연민하던 시절만.
카밀루스는 이온의 앞길을 막았던 절망의 문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카밀루스의 눈이 눈꺼풀 아래로 잠겼다.
다시금 눈물이 주룩 흘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하게 된 자의 회한의 눈물이었다.
꿈틀거리는 날개가 파르르 떨리자 그를 관통한 사슬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 * *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 이온은 버니언에게 돌아가는 대신 중정을 가로질렀다. 갑자기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몰라 페드로가 그의 뒤를 급하게 따랐다.
“소공작, 소공작!”
평소보다 발걸음이 훨씬 빨랐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온은 이미 목적지를 정해 둔 듯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낯익다.
황성 탑 쪽을 향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페드로가 우는 아이를 열심히 둥기둥기 하면서도 이온을 급하게 따라갔다.
온 세상이 신기한 밖으로 나왔고, 속도가 빨라서 그런지 방금까지 울던 아이가 뚝 그치고 방싯방싯 웃기 시작한다.
페드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쪽 팔로 아이를 단단히 꽉 안고 비어 있는 손으로 이온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소공작!”
그러자 이온이 걸음을 멈칫했다.
그러고 들여다보니 그의 눈가가 새빨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감옥에서도 눈물을 흘리더니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카밀루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건 사실 페드로도 매한가지였다.
그렇지만 좀 더 인생을 많이 산 어른으로서 제 걱정과 슬픔을 참고 그를 달랬다.
“소공작…… 말은 저렇게 하시지만 대공께서도 포기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
“게다가 아이를 두고 가긴 어딜 가겠습니까. 틀림없이 이겨 내실 거라고…….”
제가 생각해도 좀 어설픈 위로의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온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대신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일이 벌어진 지 이미 닷새나 지났어요, 페드로. 의지로 이겨 낼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
카밀루스에게 포기하지 말고 죽을 만큼 버티라고 했으면서, 이온의 입술 사이로는 정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카밀루스가 며칠 동안이나 저 상태를 해결하지 못한 거라면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겠죠. 그렇지 않은가요?”
묻는 말에 페드로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꽤 절망적인 전망이었으나 그의 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공작…….”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고, 그렇게 말하려 했을 때였다.
이온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제 생각을 읊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