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그를, 다시 저 안에서 꺼내 줄 것이다.
* * *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4%입니다.]
“큰일 나실 뻔했습니다.”
페드로와 황성에 들렀다가 저택으로 돌아온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이 대기시켜 둔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다.
진찰받는 중에 손을 떠는 등 기력이 쇄한 이온을 보면서 의원이 한 말은 그랬다.
지난 닷새 동안 쓰러져 있었던 이온의 몸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저주가 풀린 덕인지 뭔지는 몰라도 눈앞의 사망 확률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
물론 마나 소실은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기는 했다.
‘아이 때문일까.’
마나 소실이 풀리지 않은 것도, 사망 확률이 높지 않은 것도 모두 아이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쓰러진 동안 혹시 잘못되지 않았을까 우려되기도 했으나, 이온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잘못되지 않고 제 배 속에서 잘 자라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의원의 진단을 받고 약을 건네받은 크레이거 공작은 의원을 물린 뒤에도 이온의 곁에 머물렀다. 착잡해하는 얼굴이었다.
방 안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그래, 대공은 잘 보고 온 게냐. 폐하께서 순순히 길을 열어 주시더냐.”
굳이 그를 보기 위해서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꺼낼 필요는 없는 터라,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만 이야기했다.
“네, 보고 왔어요.”
솔직히 말하면 혼자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공작과도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온은 그를 내보내지 않고 순순히 말문을 텄다.
공작도 그 사실을 눈치로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온이 다음 말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아버지께 부탁이 있습니다.”
평소보다 딱딱한 이온의 말투에 공작은 조금 표정을 굳혔다.
이 ‘부탁’이라는 게 쉬운 부탁이 아니라는 점, 그럼에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챈 듯했다.
그러나 공작은 외면하지 않았다.
“말하거라.”
심지어 아들을 향한 지지 의사 역시 드러냈다.
“무엇이든.”
크레이거 공작에게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자세한 뒷이야기는 모를 크레이거 공작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온에게는 어찌 되었든 좋은 징조이기는 했다.
“미아블레 후작과 피에트로 후작을 만나고 싶어요. 저택에 각각 초대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거라.”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으시고요?”
“네가 생각이 있겠지. 가문을 이끌 후계자는 너다, 이온.”
크레이거 공작의 대답에 이온이 천장으로 멍하니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그를 확인했다.
[상태 이상: 호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가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던 메시지가 눈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에 어떤 장면 하나가 지나갔다.
제가 이 세계에서 ‘눈뜬’ 장소인 체벌방.
그러고 보니 뺨을 맞았던 그 당시 공작의 상태 이상은 분명 ‘적의’였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반항하던 자신.
그리고.
〈네놈이 아직 반성을 덜한 모양이구나.〉
지금과 전혀 달리 자신을 외면해 버렸던 크레이거 공작.
그 세계 속의 공작은 이온 크레이거를 포기하고 새로운 후계자를 낳았었을까. 그리고 ‘탑’에 갇힌 건 그의 묵인도 있었을까.
굳이 떠올려 봤자 상처만 될 질문이라는 걸 알기는 하지만, 되찾은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그런지 아버지를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이온은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래, 지금은 아니야.’
크레이거 공작은 적어도 현재의 자신에겐 충분히 좋은 아버지다. 많이 의지했고, 신뢰하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되었다.
다만 이렇게 제 기억과 많은 것들이 바뀐 이유.
그 근원을 따지고 가 보면…….
‘시스템.’
처음에 상태 이상 ‘실어(失語)’를 걸어 놨었다. 어차피 금방 풀려서 별 소용도 없는 것을 말이다.
처음에는 이 세계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렇게 했던 것이라 느꼈다. 뜬금없는 말을 했으면 이상했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것도 같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공작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소간 화를 누그러뜨렸고, 이온을 체벌방 밖으로 꺼내 주었다.
시스템은 그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럼 이 시스템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건가.’
[시스템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에 이온은 제 생각이 맞았음을 알아챘다.
생각해 보면 시스템이 띄우는 메시지는 제 ‘생존’과 관련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보니 죽을 뻔한 고비들을 잘 넘기라고 경고하는 시스템처럼 느껴진다.
설마 제 착각 따위는 아닐 것이다.
이미 이 시스템과 함께한 지 8년이 넘었다.
이 녀석의 패턴에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시간이었다.
여하튼, 시스템의 도움으로 크레이거 공작과도 결국 여기까지 관계를 개선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싱숭생숭한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레이거 공작이 다시 침묵에 빠진 이온에게 말을 붙여 왔다.
“이온, 이 아비에게…… 네가 그리는 미래가 뭔지 알려 줄 수 있겠니?”
이온은 그에 겨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금 놀라움이 밴 눈으로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그리는 미래요?”
“그래.”
“…….”
커다랗고, 주름진 두 손이 다가와 힘없이 떨어져 있는 이온의 손을 감쌌다.
크레이거 공작은 살짝 상기된 이온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눈을 깊이 마주쳐 왔다.
“네가 보고 있는 미래가 어떤 건지 나에게 알려 다오.”
지금껏 크레이거 공작에게 중요한 것은 가문과 제 아들의 안위였다.
수백 년간 단단히 유지해 온, 유서 깊은 크레이거 공작 가문의 유지.
그리고 제 아들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
하지만 이온이 하는 모든 일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이온을 다그친 적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지금 이 발언은, 마치 네가 그려 놓고 있는 청사진은 자신이 따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버지가 아들을 따른다.
쉽지 않은 결단임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온은 한동안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크레이거 공작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믿기지 않아 제 해석이 맞는지 이온은 굳이 한 차례 확인했다.
“제가 말씀드리면…… 그 미래를 그리는 데 동참해 주실 건가요?”
이 물음에 크레이거 공작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듯이 잠시 침묵했다.
그다음에 나온 이야기는 조금 길었다.
에두른 설명들이 이어졌다.
그가 이온의 밀빛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이온, 네가 어렸을 적에 쓰러져서 며칠이나 깨어나지 않을 때 이 아비가 결심한 바가 있다.”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