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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83)화 (283/317)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그게 설령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선황 폐하께 반기를 드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이온은 묵묵히 듣기만 헀다.

먼 과거를 떠올리는 듯, 크레이거 공작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 마음속에 늘 레이어먼에 대한 빚이 있었다.”

레이어먼, 선황제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를 이온은 적당히 짐작했다.

신하가 아닌 친우로서 느꼈던 마음의 빚이라는 의미이다.

“레이어먼에게 로제니아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선선황의 지시 때문이었지만 그런 로제니아를 내 손으로 망친 게 아닐까 하는 괴로움이,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지.”

무척 인간적인 고뇌였다.

크레이거 공작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이온은 충분히 이해했다.

“레이어먼은 이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어. 그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지. 단 한 번도 그 이후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내 탓인 것만 같았고, 그래서 그가 어떤 부당한 요구를 해도 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만년 이인자에 황실의 개 취급을 받는 크레이거 공작가이지만, 이번 대에 들어서 특히나 더 그러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온의 아버지는 선황에, 황실에 단 한 번도 반항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제 아들을 잃을 뻔한 상황에도.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내 안에서 합리화를 했던 거 같구나.”

“카밀루스…… 대공에 대해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이온의 직접적인 물음에 공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손을 떼어 내어 이온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이는, 죄가 없었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이온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사실 그에게는 제 아버지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온은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저를 저버리지 않으리란 확신을 얻고 싶었다.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저 그때 태어났을 뿐이지. 그리고 원래라면 대공은…… 황실에서 돌보아져야 했을 거다.”

이온은 아버지에게 잡히지 않은 이불 안의 손을 꼭 쥐었다. 시트가 손안에서 살며시 구겨졌다.

기억이 밀려들어 와 카밀루스의 어린 시절을 모두 알게 되어 버렸다.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선했다. 카밀루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학대를 받아야 했던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것을 떠올리니 이온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죄를, 구하실 건가요?”

크레이거 공작은 그 일의 방관자다.

어쩌면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았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상황을 뒤집을 능력이 있었다.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그리고 제일가는 귀족가의 수장으로서 맞설 힘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전부 알면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학대를 방관함으로써 동조했다.

크레이거 공작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꺼이 그리하마.”

“네, 무릎 꿇고 참회하셔야 할 거예요. 카밀루스가 용서할 때까지요.”

이온의 지적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조금 원망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옮겨 천장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리는 미래가 뭐냐고 하셨죠.”

감옥에 구류되어 있던 카밀루스의 모습을 상기해 낸 이온이 미간을 구겼다.

“카밀루스가 원래 가질 수 있었던, 가져야 마땅했던 모든 걸 돌려줄 겁니다.”

심지어 황위까지도.

이온은 제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았으나 주저하지 않고 제 생각을 뱉었다.

“안타깝지만, 버니언은 황제의 재목은 아니에요.”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오랜 비밀을 꺼내는 듯이 잠시 한숨을 들이켜며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곧 진실을 입에 올렸다.

“그래, 선황께서도 분명 그리 생각하셨다.”

“……무슨 말씀이세요?”

선황은 죽을 때까지 선위나 섭정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버니언을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버니언이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니.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를 북부로 밀어 내기 위해서 버니언이 황태자궁에서 벌였던 소란 전후의 일을 상기했다.

선황은 크레이거 공작을 더는 친우로서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다른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크레이거 공작과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적으로는 충분히 함께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죄책감으로 인해 끌려다니는 그의 마음을 이용할 작정이었을지도.

정확한 의중은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제 판단을 가장 깊게 공유하는 사람은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소란이 일기 며칠 전, 선황은 크레이거 공작을 알현실에 불렀다.

몇 걸음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그의 앞에서 뒷집을 지고 돌아서 있던 선황이 주변의 모두를 물린 채 오랜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제멜.〉

〈말씀하십시오, 폐하.〉

〈자네는 버니언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나? 이 오브라이언을 훌륭하게 이끌 가능성 말이네.〉

〈…….〉

너무나 직접적인 물음이라 솔직히 말하면 크레이거 공작은 무척 놀랐다.

그러나 차마 황태자에게 훌륭한 군주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어 침묵만 지켰다.

선황도 생각이 깊어진 듯 한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잇지 않았다. 그러다 꺼낸 한마디는 크레이거 공작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탑에서 꺼내 놓고 보니 전혀 비루먹은 자식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은 거 같더군.〉

비루먹은 자식.

카밀루스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한데.

‘나쁘지 않다고?’

솔직히 크레이거 공작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탑에 가둔 아들이다. 마탑주에게 마음껏 가지고 놀라며 던져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선황은 모두 알고 있었고, 전부 용인했다.

그 정도로 카밀루스에 대한 그의 증오는 깊었다.

제가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을 잡아먹고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 아들 때문에 로제니아는 건강을 완전히 잃었고, 마침내 황성의 높은 탑에서 뛰어내렸다.

갈 길을 잃은 분노는 카밀루스에게 쏟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내심 당혹스러웠으나 일단 의중을 물었다. 빨리 물어봐 줘야 할 거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아이가 깨어나서 한 첫마디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나, 제멜?〉

〈탑에 왜 가두었는지 물었겠지요.〉

보통이라면.

너무 당연해서 뒤의 말은 삼켰다.

선황은 지금 예외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얌전히 살겠다더군. 죽은 듯이, 없는 사람처럼.〉

〈…….〉

〈원망이나 분노의 말 따위 한마디도 하지 않더군. 그렇다고 겁을 먹은 것은 결코 아니었네. 눈이 흔들리지 않았어.〉

선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해명이 되지 않는 터라, 좀 더 지켜보긴 해야겠더군.〉

물론 선황이 ‘사람’에 대해 판단할 때 개인감정을 섞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진심으로 증오하는 아들에게도 해당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말인데, 제멜. 내 그대에게 부탁이 있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돌이켜 보았을 때 크레이거 공작은 이 시점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그때 ‘무엇이든’이라고는 하지 말걸, 하고.

〈아이들 사이에 소란이 일 거네. 하지만 일절 개입하지 말게. 그리고.〉

선황이 뒤돌아서서 크레이거 공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황실과 크레이거 공작가와의 관계가 틀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 나 또한 그럴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본래 어리석음이란 통제 불능이지 않던가?〉

크레이거 공작은 선황이 어떤 앞날을 그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썩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짐작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답하면서도 그게 설마 제 하나뿐인 아들의 안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일일 줄은 차마 몰랐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터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선황은 더는 들을 말도, 할 말도 없다는 양 고개를 까딱여 축객령을 내렸다.

크레이거 공작이 말해 주는 과거의 일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온이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해석은, 그게 선황 폐하의 테스트였을 거란 말인가요.”

“그래. 그게 아니면 서거 직전에 대공에게 작위를 내린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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