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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84)화 (284/317)

이는 이온의 해석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이온도 완전히 확신을 하지는 못하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끝내 사생아라는 오해는 풀어 주지 않고 가셨는데요.”

“그 정도는 알아서 풀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 선황께선 그런 분이었으니.”

“그래서 아버지의 결론은요?”

이온이 넌지시 물으며 크레이거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선황의 의중이 무엇이든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온은 선황이 아직도 카밀루스에게 괴로움으로 남아 있다는 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그 가시를 카밀루스의 가슴속에서 완전히 빼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당장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려웠다.

현 시점에서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카밀루스를 반드시 그 빌어먹을 감옥에서 빼내겠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공을 오브라이언의 태양으로 만드시는 데 협조하실 거예요?”

버니언을 끌어내고 그를 오브라이언의 위대한 황제로 만들겠다는 것.

이젠 카밀루스조차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을 테니, 더는 틀어지지 않을 터였다.

“이 아비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리하마, 소공작.”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배신]

[조건을 충족하여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최종 생존 확률과 ◇◇의 목표 달성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크레이거 공작까지 힘을 보탠다면 더더욱.

이온의 눈빛이 냉하게 가라앉았다.

* * *

“도련님, 미아블레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연말 연회가 엉망이 되면서 지방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귀족들은 원래 예정했던 무엇도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연회만 엉망이 되었으면 모를까, 황궁이 전소해 버렸으니 나라의 큰 비보에 연초에 이어질 다른 귀족가 주최의 연회들도 줄줄이 취소되었다.

그 때문에 차라리 서둘러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귀족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미아블레 후작은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크레이거 공작가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카밀루스와 관련된 일을 상의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듯했다.

현재 카밀루스가 황성 내 감옥에 구류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큰일이었고, 미아블레 후작이 아무리 사교계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 소문까지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응, 준비하고 곧 응접실로 내려갈게.”

침대에 앉아 살짝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책을 보고 있던 이온이 책과 안경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옷시중을 들까요?”

“아니, 에렌스트 경만 불러와.”

“예, 도련님.”

아직 겨울이지만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해 문을 살짝 열어 놓았던 이온은, 버틀러가 도로 문을 닫고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늘어지는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던 그가 허물을 벗듯이 침대 위에 내려놓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뿐더러 몸이 무거워져서 그런지 몇 걸음 떼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에 부적이라도 되는 양 목깃 사이의 목걸이를 움켜쥐며 이온은 간신히 집무실로 걸어갔다.

‘최악인데…….’

근래 들어서 이렇게 몸이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더듬어 보아도 좀 드물었던 것 같았다.

요인이 뭔지는 정확하게 짚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감옥에 있을 카밀루스를 생각하다가 밤잠도 설치고 있는 판이라, 사실 멀쩡하면 더 이상한 것이기는 했다.

하루빨리 구해 내야 한다.

그가 진짜로 몬스터가 되어 버리기 전에…….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러한 초조함이 하루하루 더해 가는 데 비례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 또한 심화하고 있었다.

살짝 떨리는 손끝을 뻗어 한편에 위치한 옷걸이에서 겉옷을 빼 걸쳤다. 힘이 없어서 단추조차 꿰기 힘들어하고 있는데, 에렌스트 경이 들어와서 그를 도왔다.

이온은 묵묵히 제 옷매무시를 다듬어 주는 에렌스트 경에게 툭 물었다.

“미아블레 후작은?”

“공작 각하께서 일단 응접실에서 후작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천천히 걸어서 방 밖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카밀루스의 방 쪽을 눈으로만 한번 살폈다.

카밀루스와 함께 온 페드로와 그의 기사들은 저택 안에서는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마치 없는 존재처럼.

그렇지만 종종 분주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내려가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북부의 귀족들은…… 아직 수도에 많이 남아 있던가?”

“예, 아무래도 피에트로 후작이 남아 있어서 그런 듯 보입니다.”

이엘라엠을 다스리는 피에트로 후작은 북부의 실력자였다.

황실이 은근히 북부를 방치해 두고 있어서 그런지, 중앙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북부의 귀족들이었다.

당연히 황실파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들끼리 똘똘 뭉쳐 있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구심점이 피에트로 후작 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에트로 후작가는 제국 초기인 첫 번째 왕조 때부터 있었던 꽤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 위세만 본다면 여느 공작가 못지않았다.

그런데 이온이 보낸 초대장에는 반나절도 안 돼서 답변이 왔다. 기꺼이 찾아오겠다고.

‘카밀루스와 유대가 어느 정도인 거지.’

오브라이언의 북부는 상당히 폐쇄적인 지역이다. 이온도 그들에 대해서는 쥐고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온은 그들이 카밀루스를 돕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손을 잡을 예정이었다.

……일단 미아블레 후작을 한편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아블레 후작님.”

노크 소리를 울린 뒤 응접실의 문을 열자 미아블레 후작과 크레이거 공작 사이의 대화 소리가 멈추었다.

인사말을 건네니 미아블레 후작이 일어나 웃음으로 맞이했다.

“나야말로 영광입니다, 소공작.”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나겠네.”

크레이거 공작이 적절하게 빠지는 틈에 이온은 미아블레 후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종들이 테이블 위의 찻잔을 치웠다가 다시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동안 둘 사이에는 가벼운 담소가 오갔다.

“황실에서의 연말 연회 때문에 올라오셨던 것인데 그렇게 되어서 어떡하지요.”

“괜찮습니다. 사실 연회만을 목적으로 황도에 온 것은 아니니까요.”

적당히 염려를 섞은 인사말에 미아블레 후작은 단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제 곧 돌아갈 예정이신가요?”

이온이 질문한 뒤, 마침맞게 다기 세팅을 마친 시종들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순간 마주 보고 있는 둘의 표정에서 미소가 거두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이온은 느낄 수 있었다.

미아블레 후작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며 자신의 초대에 응했음을.

예상대로 그의 입에서 이온이 원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대공의 안위를 확인하고 가야겠습니다. 소공작은 정확한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저번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오늘은 달랐다. 죽은 누이의 아들이라도 어쨌든 조카이기는 하니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하긴, 애초부터 그가 수도에 빨리 온 이유도 카밀루스를 만나기 위함이지 않았던가.

이온은 작게 숨을 들이켜고는 대답했다.

“상황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후작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느 정도로 말이지요?”

“황성의 감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가두어져 있어요. 황실에서 대공을 가둔 이유로 황성 내에서 허락되지 않은 마법을 썼다는 점이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 정도는 저도 소문을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온이 제가 아는 것들을 전부 꺼냈다. 후작에게는 굳이 진실을 감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온이 판단하기에 현재 미아블레 후작의 도움은 필수적이었고, 그런 걸 원한다면 이쪽도 솔직해지는 게 맞았다.

“황실에서도 쉬쉬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 비렌시움 대공은…… 마기에 잠식되어 있습니다.”

“마기라니요? 대공께서 설마 몬스터가 됐다는, 그런 의미인 겁니까?”

이온의 말에 미아블레 후작이 경악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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