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86)화 (286/317)

* * *

뚜벅뚜벅, 묵직한 구두 굽의 소리가 어두운 지하 감옥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문득 한곳에서 멈춘 발이, 습관에 따라서 절도 있게 방향을 틀었다.

그 발의 주인이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녹슨 창살 안쪽에 있는 자는 아스타틴 딜런이었다. 그가 방금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고는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

“……네가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

아스타틴을 보러 온 자는 노아 기사단의 단장인 칼이었다.

그는 가장 아끼는 후배 기사가 창살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은근히 건들거리고, 여유롭게 굴던 칼은 이 순간 그런 기색을 싹 지우고 있었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었나. 적당히 하라고.”

“…….”

“카밀루스 클로델 대공이 그렇게 안타까웠어? 아니면 이온 크레이거에 대한 미안함이 그렇게까지 컸나?”

“죄송합니다, 단장님.”

물음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그저 미안함만 읊는 아스타틴을 보며 칼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처럼 고지식하게 정도만 지킬 것이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이렇게 대형 사고를 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 건은 아무리 감싸 주려고 해도 불가한 사안이었다.

버니언이 역모죄라고 확실히 못을 박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에 그를 구하려는 행동으로도 참작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황실 기사가 황제를 배신했다.

이건 바로 목이 날아가도 아무런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사안이다.

“그나마 이온 크레이거가 엮여 있어서 지금 이 상태인 거다. 그러지 않았으면 닷새 전에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어.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안쪽에서 약간 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의 소리라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칼이 문득 꺾여 있는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간단한 설명이 넘어온다.

“저 안쪽에 대공이 갇혀 있습니다.”

“……나도 대략적인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상황이 어떻지?”

“…….”

한데 먼저 입을 열었으면서 물음에 답하지는 않았다. 칼은 그의 주저함을 꾸짖었다.

“아스타틴, 나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나?”

“없습니다……. 대공은 지금, 절반 정도 몬스터화가 진행된 거 같습니다. 저도 이곳에 내내 갇혀 있던 탓에 정확한 상황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군.”

짧게 대답하는 칼의 말에 아스타틴이 감옥 안에서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야기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단장님.”

“…….”

“저를 포기하십시오.”

혹여나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서 칼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지 않을까 우려되었던 아스타틴이 그리 말했다.

칼은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 앞에 무릎 꿇은 아스타틴을 지그시 내려다볼 뿐이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칼의 손이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그게, 네가 나한테 할 말의 전부인가?”

“……예.”

버니언은 단지 언제 아스타틴의 목을 떨어뜨려야 제 권위가 가장 크게 드러날까 시간을 재고 있을 따름이다.

아마 저 너머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카밀루스도 그러한 때를 기다려 처리할 계획일 터였다.

그런데 버니언을 옆에서 오래 지켜봐 와서 그의 습성이 어떠할지 전부 다 파악하고 있을 칼이, 마치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한 가라앉은 얼굴로 아스타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슬쩍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의미인지 모를 웃음에, 아스타틴이 긴장한 사이 칼이 예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스타틴, 넌 그날을 기억하나?”

“어떤…….”

아스타틴은 칼이 말하는 ‘그날’이 어떤 날을 지칭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챘으나 모르는 척했다.

그렇지만 칼은 굳이 그 불편한 주제를 꺼내 입에 올렸다.

“그때 네가 나에게 했던 첫마디가 아직도 기억나는군. 진심으로 존경하고 경애한다고 했던가?”

“…….”

둘 사이에 애써 묻어 두었던, 어느 충동적인 하루를 이야기하는 거였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조금은, 치기 어렸던 시절의 이야기.

어느 날 임무 수행을 하고 돌아온 칼이 큰 부상을 입어서 쉬고 있는 와중, 아스타틴이 그의 방으로 들어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칼은 늘 비슷한 걱정이겠거니 했지만 그날 아스타틴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런 말을 했다.

칼은 그가 종종 저를 욕망 어린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알면서도 방치했다.

어쩌면 그의 속에 아스타틴의 마음을 용인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스며 있었을지도 모른다.

칼은 곰같이 커다래서는 융통성도 없는 아스타틴이 재미있었다. 그 와중에 기사로서의 긍지는 제 나름대로 있는 편이라 꽤 자존감 있는 타입이라는 게 웃겼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아무것도 숨기질 못한다는 점이었다.

너무 투명하게 속이 다 드러나 보인다.

거짓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설령 하더라도 티가 나서 금세 다 들켜 버린다. 얼굴이 새빨개져 버리니까.

그런데 칼이 누워 있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아스타틴의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거짓말을 할 때처럼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때와는 달랐다.

조금 상기되어 있는 뺨, 간절한 눈빛.

칼은 그 순간 아스타틴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내뱉었던 말을 반복했다.

〈……경애합니다, 단장님.〉

마치 제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이.

칼은 붕대를 꽉 묶은 어깨를 겨우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스타틴이 긴장한 표정으로 조금 몸을 일으키며 침대 가장자리를 짚고 있는 칼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그의 손안에서 칼의 옷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구겨졌다.

그들을 감싼 공기가 열기를 띠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칼의 곁엔 아스타틴이 없었다.

그가 도망쳐 버렸다.

허리의 깊은 둔통을 느끼며 칼은 그야말로 이 하루가 아주 충동적이었으며,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어떤 날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스타틴은 앞으로 절대 이와 같은 일탈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본래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칼도 굳이 그 밤을 더 언급하지 않았다. 아스타틴 역시 마치 그날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둘 다 모르는 척한다 해도 그날의 열정이 진짜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예외성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형태로 그들 사이를 배회했고, 때때로 묘한 분위기가 둘을 휘감았다.

그렇게 10여 년을 묻었다.

다시는 꺼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서 겉으로는 꽤나 담백한 그들이었다. 아스타틴은 칼을 묵묵히 따랐고,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아마 칼의 명령 중에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속죄였나.’

그날 제 충동으로 칼의 몸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한.

종종 어쩔 수 없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칼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가 파고든 순간의 아픔, 그에 동반되는 기묘한 희열.

이상하게도 그 감각은 돌이킬 때마다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아스타틴을 더 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 경험을 그들 사이에 축적해 버리면, 표면적으로 유지해 왔던 존경하는 상관과 충성스러운 부하의 관계가 깨질까 봐 드러낸 적도 없다.

다만 이제 보니 10년이나 지난 해묵은 감정에 흔들리는 건 자신뿐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칼은 그게 못내 어이없었다.

먼저 흔들어 버린 쪽이 누군데, 감히 제 곁을 이리도 쉽게 떠나려 하나.

그들의 감정의 근원이 사랑이든 존경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지금 아스타틴이 하는 말은 말도 안 되는 배신이었다.

둘 사이에 결코 허용되지 않는.

“넌 경애하는 이에게 그런 말을 쉽게도 하는구나.”

“……단장님.”

“그리고 이제 보니 나보다도 더한 우선순위들이 널려 있군. 그렇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