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질문에 아스타틴의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희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타인을 위해서 실패 위험이 있는 일에 목숨을 건 너의 행위를 말이야.”
“…….”
“기이한 일이네. 난 당연히 내가 너보단 감정적인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반대였다는 게.”
칼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아스타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칼은 그만 뒤돌아섰다.
아스타틴에게 등을 보인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제 할 말을 전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네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그건 내 결정이니까.”
종종 칼이 얼마나 무모해지는지 알고 있는 아스타틴은 입술을 움찔했다. 그가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창을 붙잡았다.
“단장님, 단장님?”
“다음엔 밖에서 만나자, 아스타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위험한 짓 하지 마세요. 절대 안 됩니다!”
“내 명령을 어기고 위험한 짓을 먼저 한 게 누군지 굳이 지적을 해 줘야 하나?”
“단장님!”
칼은 외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지하 감옥의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카밀루스가 갇혀 있다는 철문을 한번 확인했다.
아스타틴의 간절한 목소리와 안쪽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마물의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어질 정도로 시끄러웠으나 칼은 가만히 멈춰 서서 철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안쪽에 있는 남자는 기분 나쁘니까 자길 돕지 말라고 했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호의는 호의가 아니라고 하던가.”
그렇지만 지극히도 이기적인 칼은, 그런 건 몰랐다.
그리고 그는 저만큼이나 이기적인 누군가를 알고 있었다.
이온 크레이거.
그 자존심 센 크레이거 공작가의 도련님.
그라면 저에게 쓸모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손을 잡을 것이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상벌은 확실한 타입 같았다.
그리고 현재 칼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그런 자였다.
현 황제를 견제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정에 얽매지 않고 저를 써 줄 사람.
평생을 기사로 살아왔고 검과 마법으로 싸우는 법밖에는 알지 못하는 칼은 제 주제를 알았다.
그는 앞장서며 무언가를 계획하는 것보다는 그 계획을 실행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 * *
미아블레 후작과 황성 안의 탑 앞에 기어이 도착했다.
이미 여러 번 이곳에 와 본 이온이 문을 열고 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닥이 뻥 뚫려 있고,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나로 가득 차 사방에 푸른빛이 반짝거리는 1층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아블레 후작은 돌벽으로 안의 모습이 이럴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그가 조금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래 구멍은 뭡니까?”
“모르겠어요. 이전에 왔을 때부터 있었던 구멍인데.”
그사이 탑에 아무도 안 왔던 것이 틀림없다.
만약 그랬다면 황실이 지금껏 조용할 리는 없으니.
막상 탑으로 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위층으로 올라가야 할까, 고민하던 이온이 후작을 향해 입을 열려 한 찰나였다.
어디선가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이…….”
“……!”
이전에 들었던, 성체가 된 드래곤의 울음소리였다.
이온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것을 멈추었다. 미아블레 후작의 시선 역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갔다.
이온이 1층 바닥에 난, 마나의 푸른빛이 끝없이 새어 나오는 커다란 동공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욤뇽아, 너야?”
그러자 또 작게 우는 소리가 들린다.
“끼이.”
대충 맞는다는 소리 같았다.
얼른 밑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곳이 꽤 깊어서 이온이 망설이는 사이, 미아블레 후작이 이상한 이름을 듣곤 슬쩍 의문을 드러냈다.
“소공작, 욤뇽이는 뭡니까?”
“아기 드래곤이에요. 이 밑에 있는 것 같아요.”
드래곤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다고?
게다가 드래곤의 존재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미아블레 후작은 조금 당황한 듯도 보였으나 이온이 구멍에 숫제 빠져들 것처럼 보이자 그의 옆으로 왔다.
“이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것이지요?”
“네, 저 애들한테 가보가 있을 거예요.”
후작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애‘들’이라고?
이온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는 일단 이온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굵고 긴 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온은 아직 두 마리의 드래곤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언젠가 카밀루스에게 들었던 성전 터로 이어지는 통로가 이곳인 모양이다.
‘역시 블랑셰라는 전설의 동물은…… 화이트 드래곤이었나.’
그렇다면 욤뇽이의 존재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이온과 미아블레 후작의 굽 소리가 통로 안쪽으로 빠르게 향해 갔다.
그러다 마침내 통로 끝, 천장에 구멍이 뚫인 어느 곳에서 드래곤 두 마리가 엉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짝거리는 흰 비늘에, 솟아 오른 파란 뿔을 알아보자마자 이온이 그곳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욤뇽아!”
“끼이!”
이온이 뛰어가는 만큼 욤뇽이 또한 이온에게 포르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이제는 좀 커다래지긴 했지만 이온이 팔을 뻗자 녀석이 머리를 들이밀며 품에 안겼다.
“끼이, 끼…….”
물빛 눈만큼은 정체가 되기 전만큼이나 울망울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온이 그에 어렸을 적의 귀여운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래, 내가 왔어…….”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미아블레 후작은 정말로 드래곤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잠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을 슬쩍 돌려 안쪽을 바라본 그가 또 다른 드래곤 한 마리를 더 발견하고는 이온에게 물었다.
“소공작, 이게 다 무엇이지요?”
그러자 이온이 어린 드래곤을 안은 채로 아직도 믿기지 않느냐는 의미를 담아 후작을 돌아보았다.
“말씀드렸던 드래곤입니다.”
그건 이제 두 눈으로 봤으니 알고 있다. 후작이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
뒤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조금 늙은 듯한 드래곤의 손에 이온의 말대로 미아블레 후작가의 왕관이 들려 있었다.
얌전히 가지고 있는데, 혹시나 다가가서 빼앗으려고 하면 돌변할까 싶어 후작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슈트 안쪽의 품에 넣어 두었던 가문의 또 다른 가보인 레갈리아가 웅웅 우는 게 느껴졌다.
그에 당황한 후작이 그것을 꺼내 손에 쥐자 이온의 품에 안겨 있던 어린 화이트 드래곤이 시선을 이쪽으로 옮겼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미아블레 후작은 녀석이 제 손에 있는 이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뒤로 살며시 물러났다.
“…….”
“끼이.”
경계 어린 것을 눈치챘는지 욤뇽이가 작게 울었다.
마치 자긴 나쁜 애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한 울음소리였다.
이온은 그런 욤뇽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후작께서는 네가 낯설어서 그런 거야.”
“끼이?”
진짜로?
그렇게 묻는 듯이 욤뇽이가 이온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이온은 그에 미아블레 후작을 돌아보았다.
“후작님, 이 아이들은 그렇게 나쁜 녀석들이 아니에요.”
“……그보다 저희 가보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물건이 어떤 경위로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작님께서도 걸어오시면서 짐작하셨을 겁니다. 이곳 바로 옆에 성전 터가 있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