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이온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피에트로 후작은 그 딱딱한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게 약간의 미소를 비쳤다.
“소공작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아이오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북부의 경우에는 워낙 지형도 날씨도 험난해 편지조차 제대로 오가기가 어렵지요. 그런데 언젠가 대공 전하께서, 본인의 기사 하나를 보내 저희 피에트로 후작가에 짧은 편지 하나를 전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온은 왜인지 그가 없는 사이 카밀루스가 그간 감추어 왔던 비밀을 파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카밀루스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결국 그에게 의문스러운 영역이 남아 있다는 걸, 이온은 알고 있었다.
“저희 후작령의 서북부에 있는 커다란 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아주 큰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침 저희 장남이 며칠 뒤에 그곳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하러 갈 예정이었지요. 녀석들이 종종 산에서 내려와 주변의 민가에 피해를 끼치고 있었으니까요.”
“대공이 머물렀던 아이오딘은 피에트로 후작령과는 거리가 꽤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이온의 지적에 피에트로 후작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저도 그 부분이 늘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한 각하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피에트로 후작은 이전의 일을 회상하는 듯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꽤 부드럽게 풀려 있는 것이,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시, 그 짧은 편지를 받고 이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믿지 않아서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일정을 닷새 정도 미루기로 했지요.”
“한데 그 닷새 사이에 눈사태가 일어났던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소공작. 덕분에 제 아들은 목숨을 구했지요.”
피에트로 후작의 대답을 들은 이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온이 넌지시 물었다. 미신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지만 안 물어볼 수 없었다.
“후작은 대공께서 예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에 후작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딱 한 번 일어난 일 가지고 그런 식의 결론을 내리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럼 결론을 내리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대체 대공께서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는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 아닙니까? 하여 그쯤에서 관심을 끊었습니다.”
“…….”
역시나 피에트로 후작도 범인은 아니다. 무척 특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 같았다.
보통은 이런 현상을 목도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궁금해하는 게 보통 아니던가.
그런데 피에트로 후작은 그보단 다른 부분을 더 신경 쓰는 듯했다. 예컨대…….
“대신 중요한 건, 그런 것이지요. 그 편지 덕분에 제 아들은 죽음의 위기를 피했고, 우리 가문이 그 덕을 보았다는 것 말입니다.”
본인의 은원과 관련된 것.
어쩐지 피에트로 후작의 꼬장꼬장해 보이는 성미와 꽤 어울려 보였다.
요는, 은혜는 더 큰 은혜로 갚겠다는 그런 소리 아니겠는가.
이온은 카밀루스가 피에트로 후작의 이런 성격까지 간파하고 있었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으나 당사자가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묻지 못해 아쉬웠다.
그러나 그가 피에트로 후작을 비롯한 북부의 귀족들을 하필 이 시점에 황도로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그 답은 눈앞의 사내에게서 얻어 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이온이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후작께선, 이번 기회에 비렌시움 대공을 돕기 위해 오신 것이었군요. 저희 가문의 초대에 응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고요.”
“……처음 계획과 상당히 틀어진 듯합니다만.”
피에트로 후작의 대답에 이온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세운 그 ‘계획’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카밀루스가 감옥에 갇혀 있는 현재, 무엇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온은 그에게 당연한 동맹 제안을 했다.
“각하, 저와 함께 그 틀어진 계획표를 바로잡아 주심이 어떠하십니까?”
이온의 제안이 영 의외였던가.
둘 사이에 잠시간 정적이 일었다.
피에트로 후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저 단정한 얼굴을 한 채로 이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치 이온의 의중이 무엇인지 살피는 기색처럼 느껴졌다.
이온은 그에 피에트로 후작이 자신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피에트로 후작이 선뜻 이온의 손을 잡겠다 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보다 대공 전하께서 현재 황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 계신다 들었습니다.”
“현재 황도의 귀족들이 그 때문에 다들 동요하고 있기는 하지요.”
“크레이거 공작가에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이온은 피에트로 후작이 기묘하게 돌려 말하고 있긴 하나, 결국 방금 질문이 ‘너희는 대공 편이 아니라 황실의 편 아니냐.’라는 의미임을 바로 알아들었다.
물론 이 정도에 당황할 이온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성실히 답해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당장 대공 전하를 어찌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이번 연말 연회를 앞두고 북부의 귀족들이 대거 황도에 들어왔지요. 전례 없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특히 제 앞에 계신 후작께서도 무거운 걸음을 해 주셨고요. 그게 누구의 영향력인지야,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황실 역시 인지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북부의 귀족들이 황도에 머무는 동안엔 카밀루스가 무사할 것이란 의미였다. 피에트로 후작은 이온의 설명을 듣고는 슬쩍 눈썹을 들썩였다.
“하지만 저희 북부의 힘이 기존 황도의 귀족들보다 더 강하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지요.”
이온의 대꾸에 피에트로 후작은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도 했으나 일단 묵묵히 듣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저희 크레이거 가문 역시 대공과 깊은 연관이 있으니끼요.”
“크레이거 가문은 대대로 황가에 절대 충성해 온 공신 가문이 아닙니까. 특히나 현 공작 각하와 선황제 사이가 각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버지와 선황의 사이가 각별했다라.
거의 모든 진실을 손에 넣은 지금, 이온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으나 이 부분을 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피에트로 후작에게 보여 줄 심산이었다. 앞으로 이것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이온도 두려웠으나 피에트로 후작을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이보다 더 적절한 패는 없었다.
이온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무리 각별하다 해도, 핏줄을 대하는 것보다 더하겠습니까?”
물음에 예상대로 피에트로 후작의 미간이 단숨에 구겨졌다. 그의 눈빛에 혼란이 새겨졌다.
“무슨 의미입니까, 소공작? 설마…….”
“대공이 우리 크레이거가에 몸을 의탁한 지도 벌써 꽤 오래되었다는 건, 제가 굳이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의탁하는 이유가…… 예의 ‘핏줄’이라는 것 때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소공작. 제 해석이 맞습니까?”
피에트로 후작의 질문에 이온이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아마 일반적인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피에트로 후작은, 그런 해석을 내어놓을 것이다.
크레이거 공작가의 영애가 비렌시움 대공의 아이를 가졌을 것이라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사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일이었다.
귀족가 아가씨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했다는 의미인 것이니 보통 일은 아님이 틀림없다. 특히나 다른 가문도 아니고 크레이거 가문의 영애다.
공작 가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크레이거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임신을 한 사람은 에밀리가 아니니, 사실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이온은 천천히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했다.
일단 피에트로 후작이 한 질문에 대한 답부터 내 주었다.
“맞습니다. 각하의 추측대로 대공과 저희 크레이거 공작가가 혈연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까요.”
“…….”
크레이거 공작가가 카밀루스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증을 줄 수 있는 것 중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피에트로 후작도 그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으니까.
다만 그는 과연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다.
“……송구하나, 제가 소문을 하나 들은 것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피에트로 후작은 본인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민망하다는 투였다.
그러나 직격을 날리는 것을 굳이 회피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온 이상 무엇이든 확인하고 넘어갈 작정인 것이 분명했다.
“대공 전하께서 황도에 머무는 이유가…… 소공작의 몸을 약하게 만든 저주를 풀게 하기 위함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물론 그건 단지 소문이 아니었다.
진실이었으니까.
“사실입니다.”
“전하를 황성의 탑에서 빼낸 것 역시 소공작이시지 않았습니까. 하여 전하의 특별한 감정은 귀댁의 영애가 아닌 소공작에게 있는 것으로 감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온과 카밀루스는 여태껏 대외적으로는 무언가 함께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태후가 죽기 직전, 카밀루스와 그녀 사이에 스캔들이 날 뻔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완전히 무마가 되어 버린 소문이지만, 애초에 이온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알려졌다면 그런 소문이 날개 달린 듯 퍼져 나가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렇지만 이온은 앞으로 카밀루스와의 관계를 그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제 눈앞의 피에트로 후작은 황도에서의 영향력이 적은 만큼, 당장 하루 이틀 사이에 온 황도가 떠들썩해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스캔들을 접하는 이들 중에 입이 가벼운 자가 있다면 분명 여기저기 다 퍼다 날라 줄 것이 틀림없다.
이온이 바라는 바는 그것이었다.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대공 전하와 가까운 사이인 것은, 제 동생이 아닌 저이니까요.”
관계를 인정하는 이온의 발언에 피에트로 후작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당황한 것도 같았다. 틀림없이 부정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온은 목 부근으로 손을 가져가 옷 안쪽에 넣어 두었던 마나석 목걸이를 끌어냈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마나석을 후작의 앞에 내보이면서 이온이 말했다.
“제 저주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저주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온몸의 마나를 없애 버리는 저주라고 생각했었고, 그 때문에 대공께서 이렇게 마나석을 만들어 제 생명 유지에 도움이 되도록 내주셨지요.”
“단순히 마나를 없애는 저주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피에트로 후작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