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그가 대화의 맥락을 잘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빙긋이 웃었다.
“남자도 임신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후작께서는 믿어 주실 겁니까?”
하지만 아무리 잘 따라온다고 해도 이온이 이 질문에는, 피에트로 후작도 잠시 얼어붙었다.
그는 입을 일자로 다문 채로 이온을 응시했다.
마치 질 나쁜 농담을 들은 사람의 표정이기에, 이온은 자신의 말이 그런 유가 아님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실제로 그런 독특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소문의 근원이 어딘지도 모르고, 진위 여부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는 믿지 않습니다.”
근거 없는 소리는 어차피 믿지 않으니 그만두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대꾸를 들은 것만으로도 이온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이온이 하는 이야기의 방향성을 잘 짚고 있었다.
즉, 임신을 한 사람은 에밀리가 아닌 이온 자신이라고 점을 말이다.
“저주는, 임신을 하게 해 주는 저주입니다. 정확히는 그 임신의 결과물인 ‘아이’를 얻게 하기 위한 저주이지요.”
“소공작?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려서 실로 당혹스럽습니다만.”
피에트로 후작은 이온이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모욕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조금 붉어진 그는 이온이 더 헛소리를 하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러나 이온은 그의 입장에선 헛소리고, 자신의 입장에선 진실인 어떤 이야기를 기어이 꺼냈다.
“제 배 속에 대공의 아이가 있습니다, 피에트로 후작 각하. 그게…… 우리 크레이거 공작가가 대공 전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증표입니다.”
“…….”
“또한 각하와 제가 손을 잡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고요.”
굳어 가는 피에트로 후작의 얼굴을 보면서도 이온이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대공을 구하는 데 각하께서 협조하여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이온의 제안에 피에트로 후작은 난색을 표했다. 아니, 오히려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남자가 임신할 수 있다는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들으면서, 크레이거 가문을 신뢰해야 하는 겁니까?”
“그 말을 믿으셔야 하는 이유가 물론 더 있습니다.”
이온의 말에 피에트로 후작이 그게 뭐냐는 의미의 눈짓을 해 보였다.
“지금 저를 믿지 않으면 피에로 후작께서 손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온이 중간중간 홀짝거리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피에트로 후작의 시선이 이온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좇았다.
이온의 발이 도달한 곳은 피에트로 후작이 앉아 있는 의자 뒤쪽이었다.
응접실 안의 소리가 혹시나 흘러나갈까, 이온은 오로지 피에트로 후작만 들을 수 있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후작께서 칼 나르바에스 단장을 만난 걸 알고 있습니다. 시점도 정확하게 짚을 수 있지요.”
“……감히 날 감시한 건가, 소공작?”
피에트로 후작이 조금 화난 표정마저 지었으나 이온은 눈만 휘었다. 그리고 제 할 말을 꿋꿋이 이어 갔다.
“황도에 들어오기 전 검문 줄을 서다가 마차 안에서 그를 독대하셨지요.”
“…….”
“그리고 제 편지를 받고 이 저택에 오기 전, 그 며칠 사이.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틀 전, 또 한 번 그가 후작을 찾아갔을 겁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후작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걸로 뭘 어쩌려고 그러는지 더 지껄여 보라는 표정이었다.
그의 경계가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온은 일단 그를 달랬다.
“그저 제가 아는 것이 많은 관계로 그중에 우연히 걸려 들어온 것이니 너무 불쾌해하지 마시길.”
“…….”
이온이 그러고는 후작의 귀에 입술을 가져가기 위해서 살며시 기울였던 허리를 폈다. 후, 하고 깊은숨을 내뱉은 이온이 도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피에트로 후작의 날 선 눈빛을 받아 내며 생긋 웃더니 물었다.
“응접실에 손님 한 분을 더 모셔도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각하께서 더 중요한 손님이라 차마 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손님?”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후작의 반문이 승낙의 의미라 생각하고 멋대로 문 쪽을 향해 외쳤다.
“밖에 있나?”
그러자 금세 공작가의 사용인이 문을 두드리면서 답해 왔다. 이온은 문밖의 상대에게 이야기했다.
“나르바에스 단장을 응접실에 들여.”
이온의 말에 피에트로 후작이 미간을 꿈틀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온에게는 카밀루스의 문제는 꾸물거릴 시간 따위 없는, 시급을 다투는 문제였기 때문에 후작의 그런 반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곧 예고했던 대로 칼 단장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크고 시커먼 제복을 입은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응접실 안이 가득 차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 기묘한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황실에 있어야 하는 이가 크레이거 공작가에 있는 얼토당토않은 사실에 피에트로 후작이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그가 이온을 바라보면서 어이없어하는 투로 물었다.
“소공작, 자네 뭔가? 아무래도 이 저택의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만 있는 병약한 도련님은 아닌 거 같은데.”
이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대공의 아이를 가졌다고요.”
피에트로 후작이 그게 지금 자신이 한 말과 무슨 상관이냐는 눈빛을 이온에게 보냈다.
이온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이번에야말로 농담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를 잃을 것 같은 엄마도 강한 존재이지만, 평생의 연인을 잃을 수도 있는 남자도 강해지는 법이니까요.”
“…….”
“대공을 구해야겠다는 제 각오는 충분히 보여 드린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온의 질문에 피에트로 후작의 눈이 조금 서늘한 빛을 띠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까와 같은 경계의 의미가 아님을, 이온은 확실하게 느꼈다.
* * *
황궁이 불길에 무너진 후, 아니 파란 눈동자의 괴물이 황궁을 덮치고 카밀루스가 몬스터가 되어 버린 그 끔찍한 날 이후.
버니언은 가장 기본적인 황궁의 복원만 명해 놓고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서 할 일을 찾아 하는 적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그의 최근 관심사는 국정보다는 다른 데에 쏠려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성 내에서 자꾸만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사람이 아닌 다른 초월적 존재와 관련된 기묘한 일 말이다.
그 때문에 버니언은 마탑의 사람들을 황성 내에 머물게 하며, 계속해서 몰두했다.
그가 몰두하는 대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카밀루스가 영핵을 깨뜨려 버린 파란 눈동자의 괴물.
다른 하나는 카밀루스 그 자체.
오늘, 드디어 그중 하나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전하는 추측에 대해서 들은 버니언은 길게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파란 눈동자를 보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틀림없이 비극적인 무언가가 얽혀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것인지…….
버니언은 마탑 마법사들이 전하는 간단한 사실에 제 기억들을 덧붙여 나가며, 잔혹한 진실 하나가 탄생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했다.
잔혹한 진실.
그랬다. 진실은 언제나, 늘 사람의 편이 아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좌절하는 존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아프고 잔인하게 인간들을 다루는 것이 바로 진실이 가진 속성이었다.
깊은 저녁, 제 침실로 찾아와 푸른 눈의 괴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새로운 마탑주에게 버니언이 그답지 않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틀림없겠지. 나에게 거짓을 고한 게 아니어야 할 거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새로운 마탑주는 사라진 재니스와 마리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꽤 진지해서 농담 따먹기 따위는 통하지 않을 거 같은 그런 사람.
버니언은 이 사람이야말로 좀 마법 연구자에 가까운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마탑주에 임명되자마자 그는 앞으로 마법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그러니까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그 이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하겠다며 공언했다.
그걸 뭐라고 따로 명칭을 붙였었는데, 버니언은 금세 잊어버렸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그보다 현재 버니언에게 중요한 건 바로 눈앞의 진실이었다.
마탑주가 밖으로 나간 뒤, 깊은 어둠에 잠긴 방 안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늘 잠은 다 잤군.’
방금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공유할 사람 없이 혼자서 식혀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버니언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야기를 공유할 사람이 있었다.
카밀루스 클로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도 자신의 핏줄이며, 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