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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92)화 (292/317)

생각을 이어 가던 버니언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가 평생 가지리라 예상치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그건 바로 카밀루스에 대한 연민이었다.

누군가가 듣는다면 이제 와서 그런다고 비웃을 이야기라는 건 알았다.

당장 눈앞의 카밀루스조차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면 어이없어할 뿐일 터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절대로, 꺼낼 수 없다.

“마리엘의 시신은 어디에 있지? 그걸 찾아서 난도질이라도 하고 목을 효수해야 우리 황실을 능욕한 데 대한 일벌백계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여 대충 생각난 김에 그런 말을 입에 올렸는데 카밀루스가 의외의 답을 되돌려주었다.

“……없어.”

“없어? 설마 태워 죽인 거냐.”

“아니, 다른 차원에 가져다 버렸다.”

“……다른 차원이라는 게 있어?”

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렸으나 카밀루스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진지하게 대꾸하니, 카밀루스 또한 담백하게 설명해 왔다.

“존재해. 이미 몇몇 마법사들이 다녀왔다고 하지 않나.”

“…….”

“이 세상엔 불가사의한 마법들이 종종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걸 ‘금기’라고 부르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자들만이 볼 수 있는 심연이 있지.”

카밀루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버니언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슬쩍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물었다.

“너도 그 ‘심연’이라는 걸 봤다는 듯이 이야기하는구나.”

버니언의 물음에 카밀루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언이, 충분한 답이 되어 주었다.

카밀루스는 예의 금기를 깬 적이 있는 것이다.

곧 그의 입에서 뜬금없는 시비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8년 전에, 난 네가 지독하게 싫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 넌 그냥 본능처럼 날 혐오한 거겠지. 하지만 난 근거가 있었다.”

미움에 근거가 있다니 황당한 소리다.

대부분의 미움은 근거 없이 피어나지 않던가…….

버니언은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너 혹시 선민의식이라도 있냐. 혹시 그래서 만날 날 그딴 불쾌한 눈빛으로 봐 왔던 거야?”

카밀루스는 간혹 아주 짜증 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규정하여 말하기 어렵지만 그의 눈을 보다 보면 아주 불쾌해지는 게 있었다.

마치 아랫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다.

혹은 선황이 늘 저에게 보내온 눈빛과 같이…… 아주 하찮은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다.

깔아보는 사람이야 모르겠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자는 어쩔 수 없는 불쾌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카밀루스가 하, 하고 짧은 숨을 내뱉더니 버니언의 말을 부정했다.

“근거가 있다고 말하지 않나.”

“뭔데, 그 잘난 근거가.”

“난 네가 이온을 좋아할 걸 알고 있었어.”

“그건 그저 네 감일 뿐이잖아. 그런 걸 근거 있는 소리라고 지껄이는 거야?”

“감 같은 게 아니다. 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나.”

버니언이 잠시 입을 다문 사이 카밀루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게, 우리 셋의 운명이었던 거야.”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는 카밀루스에게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 ‘운명’이라는 걸 마리엘에게 지배당해서 혹시 무언가 변명거리라도 찾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상황일지도 모른다.

버니언은 그를 애써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카밀루스에게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처음으로 형제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와중이지 않나.

인생 최초로 인내심이라는 걸 발휘해 봐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버니언은 반쯤 포기한 어투로 대충 답했다.

“네 말에 의하면 마리엘에게 휘둘리는 것조차 우리의 운명이었나 보군.”

“그랬겠지. 그건 바꿀 수 없었으니.”

“…….”

카밀루스가 가만히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버니언은 그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카밀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보면 화가 나는 이유를 드디어 찾은 것이었다.

수려한 이목구비 때문에 혹시 제가 저 잘생긴 얼굴을 질투하나 싶었고, 은근히 마음속에 들어차는 열등감 때문에 짜증이 났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보니 선황을 꽤 많이 닮았다.

눈을 감으니 그런 모습이 더 눈에 확 들어온다.

눈은 제 어미를 닮은 모양이다.

‘재수 없는 새끼…….’

형제애를 잠깐 발휘해 보려고 해도 역시나 그의 존재 자체가 거슬려서 버니언은 안 될 것 같았다.

버니언이 철창 안을 한번 눈으로 휘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

불렀지만 카밀루스는 답하지 않는다. 버니언은 상관하지 않았다.

“네 몸, 어차피 사람보다 몬스터에 더 가까운 상태이지?”

말끝에 물음표를 단 이후에야 카밀루스가 적당히 대꾸해 왔다.

“그래.”

그럴 것 같았다.

카밀루스가 감옥에 이리 흉한 꼴로 갇힌 이후, 버니언의 명대로라면 그에겐 물도 식사도 제공되지 않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죽을 테지만 카밀루스는 지금 보다시피 멀쩡히 살아 있다.

“어차피 넌 사람으로 되돌아오기 어려운 것처럼 보여. 내 말이 맞지?”

“……그래, 그것도 맞다.”

철창 안의 카밀루스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버니언은 그의 눈빛 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카밀루스는 지금 버니언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도 않은지 표정은 그저 덤덤했다.

덕분에 버니언도 딱히 주저함 없이 제 의견을 말했다.

아니, 의견이 아니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언도하는 것이다.

“너도 희망 고문은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명분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으니 누군가 반발하지도 않겠지. 무엇보다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내 결정을 다들 이해할 것 같군.”

딱 한 사람,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면 딱 한 사람뿐일 터였다.

이온 크레이거.

그러나 어차피 그에게 미움받는 데 익숙한 버니언이다.

평소에도 이온에게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아 왔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못 견디게 초라해 보이고, 심장에 구멍이 난 듯이 허해졌다.

이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버니언은 진짜로 그를 좋아한다.

이온 크레이거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버니언의 입장에선 아무리 봐도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이온과 자신은 어떻게 해도 안 될 거라는 사실을, 버니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미운 짓을 더 해도 딱히 상관없을 것이다.

다음에 이온이 저를 찾아왔을 때는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아파지겠지만, 그것 때문에 결정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큼 카밀루스를 싫어하는 마음도 진심이었다.

물론 이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친 건 단지 그를 싫어하는 마음만이 아니었다.

일평생을 마리엘에게 휘둘려 살아온 불쌍한 인생을 향한 연민도 틀림없이 이 결정에 한몫했다.

“더는 보이지도 않는 희망 따위에 목매달지 마라. ……사흘 뒤에 널 공개 처형 하겠어.”

“…….”

“무리할 것 없어. 지금과 같이 추한 모습으로 계속 있는다면 어차피 그날 모두가 너에게 돌을 던질 거다.”

“그런가.”

카밀루스는 이미 버니언이 내린 사형 선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듯 무던한 어투로 그리 대꾸했다.

버니언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잡했던 제 마음도 어느 정도 달랬으니 이제 버니언에게 카밀루스의 효용은 다한 셈이었다.

“그동안 혹시 이온이 찾아오면 막지는 않을게. 그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나름의 배려다.”

“…...고맙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마지막에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남아 줘야, 이온도 널 조금이라도 빨리 잊을 거 아니야.”

이야기하면서 버니언의 입가를 비틀었다.

어차피 이온 크레이거의 마음을 제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도 그의 마음에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버니언의 말이 카밀루스의 마음을 베어 버렸는지 다시 감긴 그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버니언.”

“할 말 있나?”

“이온이, 처형장에 못 오게 해 줬으면 좋겠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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