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칼에 거절의 말을 흘리자 카밀루스가 크게 심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성에 약간의 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이야. 그런 모습을 보면 평생 악몽에 시달릴지도 몰라.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견디기 어려워할 거다. 너도 이온을 좋아하는 건 진심이라면서.”
“…….”
“3일간 이온이 못 찾아오게 해도 괜찮아. 어차피 난 더 욕심 없어.”
버니언은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눈물 한 방울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끝까지 재수 없는 녀석.
버니언은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뒤돌아섰다. 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무거운 철문을 쾅 닫는데, 왜 카밀루스가 이렇게 진저리치게 싫은지 알 것 같아졌다.
이온이 그를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들려온 소식에 이온은 그야말로 벼락이라도 맞은 느낌이었다.
에렌스트 경이 전해 온 그 말을 듣고, 이온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그에게 되물었다.
“지금, 뭘 한다고?”
못 알아들어서 물은 건 물론 아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에렌스트 경이 안색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 이야기했다.
“대공의 처형식입니다. 황성 앞에서 공개 처형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온이 이를 악물었다.
“……그게 언제인데.”
이렇게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터이다. 예상대로였다.
“3일 뒤 저녁입니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맞추어서 처형식을 거행한다고 하더군요.”
카밀루스의 말에 의하면 버니언은 그가 완전히 몬스터화가 되면 영핵을 깨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카밀루의 몬스터화가 거진 다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오는 것인가.
이온은 미간을 구기가다가 이내 집무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전혀 아니었다.
서류 한 자 더 들여다보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카밀루스를 만나러 가야 했다.
“황궁으로 가겠어.”
“……대공은 또 보러 가시려는 겁니까?”
“그러지 않으면? 날 말리지 마. 당장 입구에 마차를 준비해 두라고 일러라, 알렉.”
“알겠습니다.”
이온의 사나운 기세에 아마도 그를 말릴 계횝이었던 듯한 에렌스트 경은 더는 토 달지 않고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제가 혼자가 되자마자 이온은 제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흰 종이로 가득 차 있는 그곳.
방금까지 서류 작업을 하던 이온은 불쑥 짜증이 올라와 그것들을 양손으로 전부 쓸어버렸다.
촤아아아악!
투둑, 투둑.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가 전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고 가만히 에렌스트 경이 나간 방문을 노려보던 이온이 마침내 책상 밖으로 빠져나갔다.
자박자박.
종이를 밟고 이온이 방을 나섰다.
복도에 발을 내디뎠을 때는 어느새 흥분으로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카밀루스의 처형이라니.
듣고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오히려 더.
‘3일 안에…… 빼내야 해.’
도와줄 ‘사람’은 충분히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카밀루스를 그 끔찍한 감옥에서, 그의 온몸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느냐였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결심의 문제일 뿐.
굳은 얼굴을 한 이온의 발이 향한 곳은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했던 저택의 정문 쪽이 아니었다.
기이익…….
오래된 저택의 복도에 낡은 문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전까지 카밀루스가 머물렀던 방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전에는 문을 열면 그가 있었다. 혹은 이 문을 열고 그가 나왔었다.
문고리를 잡자마자 저를 보면 무조건 다정한 표정을 짓던 카밀루스가 떠올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벌써 몇 개월째 보던 풍경이었으니까. 익숙해질 만도 했다.
이온은 텅 빈 채여야 할 방 안에 생명체의 기척이 있음을 느끼고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달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도 무거운 몸 때문에 잠시 문에 기대어서 있었다.
묵직하게 하반신을 짓누르는, 이제는 좀 익숙하게 받아들일 법한 제 몸의 무게를 가만히 느꼈다.
이온이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사과의 말을.
그렇지만 지난번에 닷새나 쓰러졌다 일어났을 때도 잘 버텨 주었으니 이번에도 이 아이는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야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이니까 말이다.
카밀루스보다 더한 축복을 받은 아이다. 태어난다면 제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나고 위대한 마법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이온은 이 아이의 운명이 그리 쉽게 꺼지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잃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터였다.
이온이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자마자 푸드덕 하고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카밀루스의 독수리가 보였다. 녀석이 이온의 주변을 낮고 조심스럽게 날다가, 이온이 팔을 뻗자 그곳에 착지했다.
아귀힘이 꽤 강할 텐데, 독수리는 이온이 아프지 않게 팔에 앉았다.
이온이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너도 네 주인이 걱정되는 거지?”
카밀루스와 이 독수리가 대화를 나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서 그러는 거 같았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온은 깜짝 놀랐다.
「카밀루스는 걱정할 필요도 없어.」
머릿속으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녀석을 보자, 독수리가 한쪽 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뭘 하나 했더니 부리로 털을 정리하는 거였다. 긴 깃털 하나를 물었던 녀석이 곧 그것을 바닥에 퉤 뱉더니 한마디 더했다.
「녀석은 내가 본 마법사 중에서 제일 강해. 난 지금껏 녀석을 상상 속에서도 이겨 본 적이 없다고!」
아무래도 카밀루스에게 당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면서 카밀루스가 괜찮다고만 할 때가 아니었다.
이온은 왜인지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된 듯한 녀석에게 말해 주었다.
“……카밀루스도 이번엔 이겨 내기 어려울 거야.”
「……에이.」
독수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런 감탄사를 살짝 내뱉었지만, 이온의 얼굴이 꽤 진지한 걸 보고는 불안한 듯 동그랗게 뜬 황금빛 눈을 흔들었다.
「진짜야?」
아무래도 이 독수리는 카밀루스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카밀루스가 부리는 놈이라고 해도 그의 전부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독수리가 방 안쪽을 바라보며 쫑알거렸다.
「설마 그래서 저 녀석도 빽빽거리는 거야?」
이온은 독수리의 시선을 따라서 방 안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시원한 책상 위에 배를 깔고 누워서 쿠키를 오독거리고 있었어야 할 작은 욤뇽이의 모습 대신, 성체가 되어서 잔뜩 거대해진 화이트 드래곤이 방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온이 팔을 살짝 털어 내는 시늉을 하자 독수리가 날아오른다.
주인이 없는 방을 휘돌던 녀석이 책상 위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온이 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작게 끼잉, 끼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앓는 소리. 독수리의 말대로 뒷모습만 봐도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온이 그 안쓰러운 모습을 곁에서 기웃거리며 살피다가 바닥에 살짝 앉았다.
“욤뇽아?”
지난번 미아블레 후작과 탑에 갔을 때, 욤뇽이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근본적으로는 이온이 원했기 때문이지만, 욤뇽이도 이온의 품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내내 안겨 있었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미와 떨어지기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8년간 함께한 정도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 제 주인인 카밀루스가 걱정되기 때문이기도 했을 터였다.
카밀루스가 평소에 구박하면서 키운 것 같기는 하지만, 욤뇽이는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에 막상 왔을 때 카밀루스가 없어서 당황한 듯 보였고, 어디 갔는지 알려 주고 난 뒤에는 내내 이 상태였다.
이온은 훌쩍거리며 코 먹는 소리를 내는 드래곤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며 다시 녀석을 불렀다.
“욤뇽아.”
“끼이…….”
두 번째 불렀을 때에야 욤뇽이가 물빛 눈에 눈물을 가득 채운 채로 이온을 돌아보았다. 성체 드래곤이 되어서도 여전히 눈물 흘리는 모습은 귀여운 걸 보면 아무래도 평생 어리광쟁이로 남을 모양이었다.
이온은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욤뇽이가 얼굴을 이온의 가슴에 비비면서 그에게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