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 끼…….”
이온은 계속 힘없이 우는 녀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말로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만 울어, 뚝. 이러면 카밀루스를 같이 보러 가지 않을 거야.”
“……끼?”
카밀루스를 보러 간다는 소리에 녀석이 귀를 쫑긋하는 게 보였다. 이온은 그에 녀석이 카밀루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금 알아차리고는 작게 웃었다.
“그래, 지금 카밀루스를 보러 갈 거야.”
“끼이, 끼.”
정말? 정말로?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반응을 확인하고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이온의 얼굴에는 웃음기 없이 진지함만 가득했다.
그런 표정을 확인하고 욤뇽이도 무언가 느꼈는지 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온이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에 이온은 속눈썹이 긴 눈을 내리깔며 이야기했다.
“가서 우리가…… 아니, 네가 카밀루스를 도와줘야 해.”
이온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염치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으로 드래곤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제 카밀루스를 도울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끼이?”
아직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욤뇽이의 모습에 이온은 일단 입술에 짧은 키스만 해 주었다.
그러자 애정 표현은 좋다고 생각하는지 녀석이 사랑스럽게 엉겨 왔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며 독수리가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이온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도련님, 카밀루스 녀석 상태가 진짜 심각한 거야?」
욤뇽이보다는 오히려 독수리 녀석이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어쩐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하는 말에, 이온이 고개를 살며시 옆으로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했잖아.”
「그럼 나도 데려가 줘.」
“……마음대로 해.”
애초에 이온이 주머니에 넣고 갈 사이즈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하늘을 나는 동물이 황성 안으로 들어가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온의 허락을 받자 독수리 녀석이 부리로 드래곤의 뿔을 콕콕 찍으며 말했다.
「야, 주름살도 많이 생긴 게. 이제 그만 울어.」
“끼이!”
저절로 매를 부르는 독수리의 화나게 하는 화법에 욤뇽이가 눈을 부릅떴다.
이온은 동물들끼리 잠깐 투덕거리는 틈을 타서 그만 복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에 이온이 없어 당황했던지 헤매고 있던 에렌스트 경이 곧장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저택 앞에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말한 뒤 에렌스트 경이 어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이온을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눈만 굴려 살폈다.
무섭도록 냉철해 보이는 표정인 터라, 에렌스트 경조차도 저절로 몸을 사리게 되는 분위기였다.
작고 연약해만 보이던 이온이 이런 식으로 느껴진 것은 오랜 기간 봐 왔던 에렌스트 경조차 처음인 터라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여 그저 다음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데, 이온이 먼저 발을 돌려 옆방으로 향했다.
그곳 앞에 서서 고갯짓을 하는 것에 에렌스트 경이 서둘러 방문을 두드리며 방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페드로 경, 계십니까?”
똑똑, 똑똑똑.
이온의 분위기에 따라 다소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안쪽에서는 무얼 하는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페드로 경……?”
에렌스트 경이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문고리를 돌릴까 고민하던 순간, 안쪽에서 페드로가 대답하는 대신 직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뭘 하느라 이렇게 늦었나 하는 순간, 에렌스트 경은 평소와 다른 페드로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지난번 연회 때를 제외하고 만날 셔츠 한 조각만 덜렁 걸치고 대충 검은 바지를 꿰입었던 페드로가 오랜만에 ‘기사’다운 모습으로 나와 있었다.
드레스셔츠와 넥타이를 안에 받쳐 입고서 주름 하나 없이 정리해 입은 검은색 제복에 허리춤에 검을 찬 그의 모습을 보고, 에렌스트 경은 다시 한번 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온이 오늘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음을.
* * *
이후 과정 또한 모든 것이 달랐다. 이온은 준비된 마차로 직행하지 않고 크레이거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에렌스트 경은 그동안 내내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이온과 크레이거 공작이 정확하게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부자간의 잘 다녀오라느니, 잘 다녀오겠다느니 하는 그런 단순 안부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이후 평소와 달리 이온이 타고 갈 마차 주변을 따를 인원들이 더 붙었다.
지금껏 에렌스트 경이 보았던 크레이거 가문 소공작의 황성 입성 행렬 중에서도 가장 화려했다.
그것을 보면서 누군가는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껏 크레이거 가문은 숨죽여 살아온 이유는 그들이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단지, 마음을 먹는 것 하나만으로 말이다.
황실의 충성스러운 개, 짖는 법을 모르는 2인자.
크레이거 공작가를 꾸미던 그 수식들은 모두 그들이 자처한 것일 뿐이다.
단 한 번도 그러한 수식을 부끄러워하거나 떼어 내어야겠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데도 안 하는 것과 능력이 없어 못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크레이거 공작가는 명백히 전자였다. 제국의 황실과도 버금가는 강자인 그들은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몇백 년간의 침묵은 그들에게 송곳니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에렌스트 경은 크레이거 공작과 대화를 나눈 뒤 나온 이온을 마차까지 부축해 옮기면서, 내내 이온의 얼굴을 살폈다.
새하얗고 실핏줄이 다 보일 만큼 투명한 살결. 긴 속눈썹 아래 부드러운 빛의 녹안. 색소가 빠진 것처럼 보이는 밀빛에 가까운 금발. 항상 어딘가 아픈 듯 조금 흰 입술까지.
모든 구석구석이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누군가의 부축이 없으면 긴 시간 걷지도 못하는 크레이거 가문의 공자는, 누군가에게 얕보이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렌스트 경은 그가 각오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지난 몇 년간 충분히 봐 왔고, 그 때문에 이 작은 남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의 문이 닫히고, 이온이 안쪽의 마부석과 연결되는 종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크레이거 공작가가 사는 루미에르홀에서부터 내황성의 입구까지는 고작해야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황도를 가로지르는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자 몇몇 이들은 그 짧은 행렬을 구경 나올 정도로 오늘 소공작의 행차는 몹시도 요란했다.
에렌스트 경은 말을 타고 선두에서 따라가며 혹시 내황성을 통과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잠시 불안도 했으나 그것은 금세 불식되었다.
애초에 내황성 진입을 허락받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었다.
내황성에 들어가려 신분 증명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긴 줄은 무시하고, 공작가의 마차는 다른 입구로 향했다.
복잡한 절차 따위 필요 없이 성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는 이온의 얼굴을 한 번 살피고 나서는 그대로 크레이거 공작가의 마차를 통과시켜 주었다.
그 과정에서 이온이 한 일은 창문 밖으로 작은 손을 내밀어 금화 몇 닢을 떨어뜨린 것밖에는 없었다.
에렌스트 경은 그게 아무래도 어떤 신호인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넘겼다.
내황성에 들어서자마자 공사 중인 황궁의 모습이 보였다. 지반을 다시 다지는 작업은 완료하고 뼈대를 세우는 중인 황량한 광경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한편, 소문으로는 얼마 전 나타나 황성 결계를 친 화이트 드래곤의 존재 때문에 버니언이 급하게 성전의 복구도 지시했다고 하는데, 성전은 워낙 구석에 있는 터라 중정을 지나는 동안은 보이지 않았다.
불탔던 중정은 다행히 금세 새 꽃나무와 잔디를 심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온은 마차 가운데에 앉아 작은 창문에 비치는 그러한 풍경을 보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바로 했다.
“소공작, 임시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임시 황궁, 즉 버니언이 현재 머무는 황태자궁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이온은 그저 대답 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오늘의 방문은 아주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황궁 시종들의 마중이 늦었다.
잠시 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황궁 시종장이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온은 상대를 확인한 후 조용히 웃었다.
그는 얼마 전, 이온과 황실 사이에 오간 편지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잠시 휴가를 다녀온 바로 그 시종장이었다.
“사전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소공작. 폐하께서도 당황하고 계신 터입니다.”
경계하는 의도가 다분했으나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천천히 발을 뺐다. 그러고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서고, 시종장 앞에 서고 난 뒤에야 상대의 질문에 답했다.
“사전 연락이 없었던 것은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또한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혜량하여 주시기를.”
그러면서 이온이 생긋 웃자 시종장은 반대로 표정이 굳었다.
이온이 끌고 온 행렬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미 내황성에 발을 들인 이상,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겠지요?”
“……황성 입구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뒤로 다행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현실로 드시지요.”
본래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면 문전박대를 당하기 십상이지만 예상대로 버니언은 그러지 않았다.
이온은 실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에렌스트 경을 한 번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