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를 뵙고 올 테니 모두 여기서 기다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리고 이온이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임시 황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임시 황궁은 어디까지나 임시인 터라 당연히 기존 황궁과는 여러모로 천지 차이였다.
붉은 카펫이 깔아 두어 구색은 갖추었으나 알현실의 길이가 몹시도 짧았다.
버니언이 기다리고 있다는 알현실 안으로 들어선 이온은 그가 그 짧은 끝에 위치한 황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뒤 알현실의 문이 닫히고, 이온이 버니언의 앞으로 나아가며 예를 갖추었다.
“오브라이언 제국의 위대한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이온. 사전에 연락도 없이 많이 갑작스럽기는 한데?”
“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전혀 송구하지 않아 하는 얼굴로 이온이 그리 말하자 버니언이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으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버니언은 조금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이온에게 말했다.
“최근 이상한 일만 잔뜩이라 많이 피곤하다, 소공작. 갑자기 들이닥친 이유가 하찮은 것은 아니길 바라.”
“물론 하찮은 이유는 전혀 아닙니다, 폐하.”
버니언도 이온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내황성의 입구를 통과하는 행렬이 평소와 달리 꽤 길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온이 황궁 앞으로 왔을 때 버니언 역시 복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사전에 들은 바와 같았다.
이전에 황궁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의식적으로 꾸민 모양새였다. 화려한 마차와 호위로 데려온 인원만 봐도 그랬다.
버니언은 그가 카밀루스 때문에 많이 화가 나 있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오늘 아침, 비렌시움 대공을 3일 뒤 저녁에 처형하겠다고 공표하고 나서 과연 이온이 언제쯤 반응할까 하는 질문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렸었더랬다.
하지만 이렇게 불과 서너 시간도 되지 않아,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리라고는 버니언도 생각지 못했다.
버니언은 카밀루스 때문에 왔다고,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이온을 위해 친절하게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래, 대공의 일 때문에 많이 당황한 모양이지.”
정곡이었는지 이온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렇지만 잠시 뒤 입술 끝에 사르르 미소가 피어나더니 여유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물론 그 여유는 말하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여유였을 뿐, 버니언은 듣자마자 표정이 딱 굳어 버렸다.
“어쩔 수 없지요. 저에게는 태양 같은 분을 가두어 두신 것으로도 모자라 3일 뒤 처형을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태양?”
이온이 선택한 단어를 바로 버니언이 끄집어내 되물었다.
태양.
황제의 면전에서 그런 표현을 다른 이를 수식하는 데에 쓰다니 이보다 더 발칙한 일이 또 있을까.
버니언이 대놓고 불쾌감에 미간을 구겼으나 이온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아니, 오히려 경계하듯 조금 떨어져 있던 버니언과의 거리를 좁혔다.
뚜벅, 뚜벅.
가벼운 이온의 몸이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발소리를 낸다.
날 때부터 버니언 못지않게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이온이다. 평생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한 절도 있는 움직임과 품위 있는 몸짓, 그리고 고위 귀족 특유의 여유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이온이 선선한 미소를 띠면서 버니언에게로 서서히 가까워졌다.
기묘하게 집중력 있는 목소리가 버니언으로 하여금 그의 말을 경청하게 했다.
“폐하께서 지금껏 저 이온 크레이거와 비렌시움 대공을 어떤 관계로 봐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순 연인으로만 생각하신 것인지.”
“…….”
버니언의 눈이 이온의 몸짓 하나하나를 눈에 담다가 문득 그의 배로 향했다.
이전과 달리 눈에 띄게 조금 볼록해졌다. 저 안에 카밀루스의 아이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지금에야 조금 실감이 났다.
그에 기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온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따지자면 연인이 맞지요. 평범한 이들처럼 할 건 다 했으니까요. 입도 맞추고, 다른 곳도 적당히 맞추면서.”
“……남의 더러운 정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더럽다니 유감입니다, 폐하.”
살며시 웃으며 하는 그 말 뒤에 설마 네 머릿속보다 더럽겠냐는 질문이 숨어 있음을 알고 버니언은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이온의 그 노골적인 말에 버니언은 저절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간 따라다니면서 욕망한 자의 저급한 본능을, 이온이 건드려 버린 탓이었다.
대체 카밀루스는 저 가는 다리를 몇 번이나 벌리게 했을까.
버니언의 손이 황좌의 팔걸이를 꽉 쥐었다. 만일 이곳이 침실이었다면, 이온이 남의 아이를 품고 있든 말든 상관없이 그를 자신의 아래에 쓰러트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만큼 지금 이온의 자태는 하필이면 몹시도 유혹적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흐트러짐도, 틈도 없이 입은 정복 차림인데 오히려 저 금욕적인 모습이 상대를 더욱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버니언의 머릿속은 금세 그를 더럽히는 상상으로 가득 차 버린 가운데, 이온은 그런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씀드리지요. 저와 비렌시움 대공의 사이는 그런 저급한 관계는 아니었다고요.”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 봤자다, 소공작. 어차피 카밀루스 그 새끼도 네 뒷구멍을 헤집고 싶어 한 건 나랑 똑같지 않나? 그 자식과 나의 차이가 대체 뭐야.”
이온은 버니언의 노골적인 표현에 내심 놀라기는 했다. 자극한다고 해서 이렇게 곧장 직격으로 반응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크게 티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버니언의 이 저급함도, 그렇게 오래 보지는 못할 것이므로.
카밀루스와 버니언, 둘 사이의 차이가 대체 뭐냐고 하는 그의 질문에 이온은 한 박자 대답을 쉬었다.
다시 묵직한 걸음 소리가 알현실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온은 황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영역을 넘어 섰다.
그의 발이 황좌가 올려진 단의 계단에 올려진 것이었다.
버니언이 그에 눈을 크게 벌린 사이, 이미 그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이온은 여유롭게 황좌에 앉은 버니언의 옆으로 걸어갔다.
버니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온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온 크레이거.”
“무례를 용서하시길, 황제 폐하. 그렇지만.”
이온의 손끝이 황좌의 팔걸이에 걸쳐진 버니언의 팔을 쓸었다.
“본래 태양이란 너무 뜨거워서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인데, 그 뜨거움을 잃으면 누구나 호기심에 넘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
“그렇다고 제 날개를 녹여 지상으로 떨어뜨릴 힘은 없어 보이시고.”
이온이 웃으며 하는 소리에 버니언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날 능욕하러 온 건가?”
이온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까의 주제로 되돌아갔다.
“대공과 폐하의 차이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게 의미 있는 걸 하나만 꼽자면 그런 거겠네요. 비렌시움 대공께서는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 제 목숨을 구하셨지요. 그것도 두 번이나요.”
“…….”
“폐하, 저는 그런 걸 좋아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대로 돌려준다. 뭐 그런 거?”
이온의 말은 한마디로 감옥에 있는 카밀루스를 구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버니언은 실소했다.
“안타깝게도 지금 그 자식을 구할 방법은 아무리 너라고 해도 찾기 어려울 텐데? 얼마 전 지하 감옥에 다녀왔으니 설마 상태를 못 본 것은 아닐 테고.”
말만 하지 않았지, 카밀루스는 명백히 스스로 죽기를 바라고 있는 상태였다.
편안히 이성의 끈을 놓으면 아마 마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몬스터가 되기까지 몇 분 걸리지도 않을 터였다.
그런 스스로의 삶을 더 이상 지탱하기 버거워하는 것이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버니언은 그런 그를 위해서 저를 찾아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이온을 오히려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의 속을 긁었다.
“난 오늘 새벽쯤인가 대공을 찾아갔었다. 네가 이러는 걸 보면 그때 녀석이 했던 말이 뭔지, 너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게 틀림없네.”
“…….”
“네가 자기를 더는 찾아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하더군.”
답변을 들은 이온의 표정이 조금 식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버니언은 이온이 당황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물론 네가 대공을 찾아가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을 거다, 이온. 난 네가 그 자식이 그 추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걸 보길 바라.”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네 안에서 카밀루스 클로델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덜 아름답길 바라거든. 그래야 빨리 잊을 거 아니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온이 버니언을 선택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사실 이제 와서는 이온의 마음이 그리 중요한가 싶었다.
어차피, 그냥 유린해 버리면 되는 일인데.
그런데 어째 이온의 반응이 버니언이 예상했던 바와는 조금 달랐다.
“망상을 하는 거야 자유이지만 제가 그리는 그림과는 너무 다르긴 하네요, 폐하.”
그러고 이온은 입꼬리를 슬쩍 웃었다. 순한 얼굴 위로 야비해 보이는 웃음이 그려졌다.
“……뭐?”
“제가 대공을 잊긴 왜 잊습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의 태양은, 그분이라고.”
“이온, 그 말…… 당장 반역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라는 건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