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시 묻지요. 이 말의 무게를 모르는 그런 멍청한 귀족이 있을까요, 폐하?”
물론 예의 ‘멍청한 귀족’이 이온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온이 단 위로 올라왔을 때조차 별생각이 없었던 버니언은 순간적으로 등 뒤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말은 가벼운 데 반해 이온의 표정이 너무 서늘했기 때문이었다.
기분 나쁜 예감을 느낀 버니언이 제 팔에 닿은 그의 손을 거두어 내고 그만 단에서 내려가라고 말할까 하던 참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온이 알아서 먼저 발을 옮겼다.
“황제 폐하!”
안에 손님이 있는데도 시종장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버니언을 불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밖에 무슨 일이냐?”
그사이 이온은 짧게 진 층계를 도로 밟고 내려가 붉은 카펫을 따라 여유롭게 걸었다.
알현실 내에서는 황제에게 등을 보이면 안 되거늘, 이온은 그런 원칙 따위 깡그리 무시했다.
하지만 버니언에게 그것을 지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온의 초록빛 눈이 문을 응시하는 순간이었다.
안에 있는 황제의 허락도 없이 시종장이 알현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사색이 된 시종장은 버니언보다 이온과 먼저 눈이 마주쳤다는 데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상함을 지적하기에 앞서 제가 들고 온 급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버니언의 앞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거의 구를 것만같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가 서둘러 머리를 조아리며 이야기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내황성 안으로 기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온이 시종장의 뒤에서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반면 황좌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버니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종장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기사들이…… 무슨 기사들이 말이냐?”
지적을 받은 시종장은 그제야 제가 중요한 사실을 빼먹었다는 점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말했다.
“부, 북부의 기사들입니다. 피에트로 후작이 앞장서서 내황성의 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하 감옥에 가둔 비렌시움 대공을 해방하라며…….”
“뭐라고? 그게 무슨……. 그리고 대체 북부의 기사 놈들이 어떻게 내황성의 통과했다는 거야!”
버니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시종장이 하는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멀쩡하게 내황성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황실 기사들이 있을 텐데, 갑자기 징후도 없이 들이닥친다고?
일단 제아무리 잘 봐줘도 사병에 해당하는 북부의 기사들이 허가도 없이 내황성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나, 어떻게 통과하려 한다 해도 황실 기사단이 그 앞을 가로막았어야 정상이었다.
내황성을 지키는 그레나 기사단과 노아 기사단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의문까지 떠올린 순간, 최악의 가정이 현실이 되어 시종장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노아 기사단의 칼 나르바에스 단장이 북부의 기사들에게 내황성의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합니다.”
“뭐야?”
칼을 신뢰할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선황제가 절절히 아끼던 자이니 그래도 배신은 안 할 거라고 여겼었다.
지금은 사라진 태후도 선황이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마땅히 황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노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북부의 사병들에게 황성의 문을 열어 줬다는 현실 같지 않은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멍하니 있던 버니언이 뒤늦게야 황좌에서 일어나며 버럭 소리쳤다.
“반역, 반역이 일어났다는 거 아니야! 노아 기사단이 배신을 했으면 당장 그레나 기사단을 불러서 그놈들을 틀어막아!”
이런 당연한 명령까지 제가 해야 하나 싶어 짜증이 확 올라오는데, 시종장이 무릎 꿇고 있으면서도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버니언을 올려다보았다.
“폐, 폐하.”
그러고 아직 전하지 못했던, 진짜 심각한 상황에 대해 짚었다.
“그, 그레나 기사단도 배신을 했습니다. 몸을, 몸을 피하시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
이번엔 흔한 뭐야, 뭐라고 하는 대꾸조차 나오지 않았다. 버니언이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자 시종장이 금세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벌게진 눈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알현실에 심각하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버니언의 시선이 아까부터 뒤돌아선 채 문 앞에 멈춰 서 있는 이온에게로 향했다.
황좌에서 벗어나 단 아래로 내려선 버니언이 이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온, 크레이거.”
아직은 분노를 억누른 채였다.
이성이 남아 있는 모습이라 이온이 옷을 툭툭 털고는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버니언을 마주 보는 이온의 태도는 몹시도 여유로웠다.
“예, 황제 폐하.”
“너…… 너야? 네가, 네가 지금 이 계획의 주동자야?”
버니언의 입에서 빠져나온 질문에는 힘이 없었다.
아직도 설마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온이 그에 눈을 휘어 웃었다.
“주동자라는 표현이 걸맞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목적이 맞는 사람들끼리 규합하도록 해 준 것뿐인데요.”
그 발언에 버니언의 앞에 무릎 꿇은 시종장도, 가까이 다가오던 버니언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온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다른 소식이 오지 않나 싶어 알현실의 문을 한번 힐끗한 뒤, 도로 버니언과 눈을 마주쳤다.
“다행히 비렌시움 대공을 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저 하나는 아니었지 뭡니까.”
“그 새끼는!”
이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니언이 소리쳤다.
“그 새끼는, 어차피 이제 인간의 모습으론 못 되돌아와. 아무리 크레이거 공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는다 해도 몬스터가 된 녀석을 이 황좌에 올리려고 하는 건 아무도 용납하지 않을걸?”
버니언의 말에 이온은 눈썹만 한 번 꿈틀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버니언이 비틀거리며 이온에게 다가섰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그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너는 그래도 꽤 냉철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지금 카밀루스 그 새끼를 구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성을 잃었구나, 이온 크레이거?”
“유감이지만 제 이성은 아주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폐하.”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해……? 넌 지금 수백 년간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크레이거 공작가를 망하게 할 판단을 한 거다!”
“…….”
저주 같은 이야기를 하는 버니언을 이온은 그저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버니언의 말 전부가, 이온에게는 그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이온의 계획은 대부분이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리고 그 예상대로, 바깥에서 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제 폐하!”
또다시 들려온 그 소리에 이번엔 버니언도 흠칫했다.
알현실의 입구 앞에 서 있던 이온은 걸음을 살며시 옆으로 옮겨 황궁 시종이 달려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그러자마자 사색이 된 시종이 뛰어들어 왔다.
넘어질 것처럼 버니언의 앞에 무릎 꿇은 시종을 보고 버니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또 무슨 일이냐?”
“폐, 폐하. 당장 피신을 하셔야 합니다. 크레이거 공작이 가문의 기사들을 이끌고 내황성의 서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레나 기사단이…… 배신을 한 것 같습니다!”
“……!”
시종을 내려다보는 버니언의 눈에 혼란함이 가득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레나 기사단이 배신을 해? 그리고 서문을…… 누구의 기사가…...?”
“크, 크레이거 공작…… 각하입니다, 황제 폐하.”
크레이거 공작.
그 말을 들은 순간 버니언의 눈이 이온에게로 향했다. 그가 당장 이온에게 달려들려고 눈을 시퍼렇게 치떴을 때는 이미 이온이 알현실의 문턱을 넘은 뒤였다.
버니언이 이온이 돌아서서 유유히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것을 노려보며 급하게 소리쳤다.
“이온, 이온 크레이거를 잡아! 저 반역자 새끼를 잡아!”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노성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소식들 때문에 황궁 내에서 우왕좌왕하던 시종들이 이온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복도를 걸으려는 이온을 몸으로 붙잡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에렌스트 경이 이온과 황궁 시종들 사이를 갈랐다.
에렌스트 경의 잘 벼려진 칼끝이 황궁 시종들을 겨누었다.
어차피 이곳으로 오면서 자신이 위험해질 거라는 상상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이온이지만, 에렌스트 경이 확실하게 제 안전 거리를 확보해 주자 좀 더 여유가 생겼다.
이온은 주위를 둘러싼 시종들 너머로 분노한 버니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작은 목소리가 조용해진 임시 황궁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버니언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온에게는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어느새 실핏줄이 잔뜩 돋은 버니언의 눈을 마주하며 제 할 말을 꿋꿋이 해 나갔다.
“폐하께서 그간 저를 어떻게 봐 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늘 이런 순간을 계획해 왔습니다.”
“뭐라고……?”
“본래 자격 없는 자들의 탐욕이 더 대단한 법이라, 그런 자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으려면 결국 힘의 논리를 들이대는 수밖에 없거든요.”
이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은 버니언이 미간을 확 구겼다.
“너, 그러니까…… 애초부터 이 모든 걸 계획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이온은 카밀루스의 것을 되찾아 주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욕심이 없는 쪽은 카밀루스였다.
선황에게, 버니언에게, 그리고 황실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끝내 분노만큼은 억제하는 그를 보면서 이온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밀루스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의 모든 것에 동의하는 건 분명 아니었다. 이온은 그의 평화주의적 사고가 현재의 그에겐 도움이 안 된다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카밀루스의 대공으로서의 존재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황제인 버니언은 그를 가만히 둘 수 없어질 것이다.
미래에 어떤 형태로든 둘은 반드시 정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온은 등을 떠밀어서라도, 절벽 끝에서 밀어뜨려서라도 카밀루스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