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카밀루스를 일단 자리에 올려 두고 보면 되는 일이었다.
단, 길을 깨끗하게 닦아 놓고.
그 과정에서 더러운 짓을 해야 한다면 그 역할을 하는 데는 당연히 카밀루스보다는 제가 더 적합했다.
이온은 남들의 눈에 제가 얼마나 유약해 보이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겉모습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사람들이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계를 걱정할 정도였다.
저렇게 약해서 쓸모가 있을까 하는 시각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이온 크레이거는 겉모습처럼 약하지 않다.
저를 무시하면서 다가오는 적에게 마지막 순간 숨겨 온 송곳니를 드러내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이 바로 이온의 본성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언제나.
이온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 제가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세상살이 혼자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온 크레이거, 네가 감히……! 네가 이딴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저를 무사하지 못하게 하려면 일단 폐하께서 먼저 제가 짜 놓은 판에서 무사히 빠져나오셔야 하겠습니다.”
“……!”
버니언이 또 무어라 소리치려 했을 때였다. 마침 누군가가 임시 황궁의 정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콰앙, 하는 소리가 나는 순간 버니언과 이온의 시선이 모두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 위로 희비가 엇갈렸다.
이온은 임시 황궁에 들어서는 기사들의 선두에 선 페드로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어 들어온 대공의 기사들이 이온이 있는 2층까지 순식간에 길을 만들었고, 더 나아가 에렌스트 경이 갈라 둔 시종들과의 경계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는 사이 페드로가 이온에게 다가와 1층으로 내려가라 손짓했다.
“앞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소공작. 천천히 나가시지요.”
“그렇군요. 수고했어요, 페드로.”
두 개의 황실 기사단 모두가 배신한 상황이라 황궁의 점거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루어져 버렸다.
이온은 난도가 쉬워도 너무 쉬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이 모두가 버니언의 업보와 같은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한결같이 함부로 다루었으니 모두의 충성이 떠날 수밖에.
이온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인 버니언에게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그럼, 무사하시길. 오브라이언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
“…….”
버니언의 악물린 턱이 떨리는 것이 보였으나 이온은 외면했다. 에렌스트 경과 함께 페드로와 그 기사들이 만들어 둔 길을 따라 임시 황궁을 빠져나왔다.
이온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잠시간, 바깥은 상당히 소란스러워졌다.
제아무리 각 기사단의 단장들이 배반을 했다고 해도 모두가 그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황제의 기사로 남길 바라는 이들이 나름대로 저항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피에트로 후작을 비롯한 북부의 기사들과 크레이거 공작가의 기사들이 황성을 점령하려고 하는 와중에,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온은 대치 중인 곳을 한 번 살폈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카밀루스가 있는 황성 내 감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밀루스의 기사들은 그런 이온의 주변을 호위하며 따랐다. 그중 페드로가 가장 가까이로 붙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는 황성 곳곳에서 난 난리통을 돌아보면서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소공작, 일단 여기까진 계획대로 됐습니다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앞으로도 계획대로 될 겁니다. 대공이 지하 감옥에서 나올 거예요.”
“…….”
이온이 단호하게 대답했으나 페드로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지난번 함께 지하 감옥에 왔을 때, 카밀루스의 상태가 어떠한지 이미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몬스터가 되기 직전의 상태였던 카밀루스가 지금이라고 해서 자연적으로 괜찮아졌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온이 오늘이 적기라고 하였고, 페드로 역시 카밀루스의 처형일을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어 그를 따랐으나 사실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담담한 이온을 보고 있자니 진짜 뭔가 있긴 한 건가 헷갈리기 시작한 페드로가 묵묵히 이온의 뒤를 쫓았다.
황성 내 감옥의 감시는 그레나 기사단의 소관이다. 어차피 그들 역시 버니언을 배신했기 때문에, 이온이 감옥에 들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간수가 이온을 기꺼이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온은 지하로 내려가면서 우선 칼 나르바에스가 같은 편이 되는 대신 제일 먼저 조건으로 걸었던 일을 제일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여기 아스타틴 딜런 부단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즉, 감옥 안에 있는 아스타틴을 빼내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넌지시 운을 띄우자 간수가 얼른 답했다.
“예, 대공께서 계신 곳보다 좀 더 안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번에 못 봤던 거군.’
지난번에 왔을 때는 아스타틴을 못 봤었는데, 칼이 이곳에 아스타틴이 있다고 하기에 조금 놀랐었다.
간수의 말대로 카밀루스가 갇혀 있는 방의 철문은 지나쳐 감옥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과연 아스타틴이 갇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번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를 발견한 이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스타틴 딜런.”
그러자 벽에 멍하니 기대어 있던 아스타틴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공작?”
네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이 된 그를 보면서 이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 이온도 꽤 치가 떨려서 별로 구해 주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칼의 협조를 받기 위한 조건이 이것이었으니 약속은 지켜야 했다.
이온이 감옥을 지키고 있던 간수에게 눈짓하며 이야기했다.
“칼이 널 구해 달라고 하기에 찾아왔어. 얼른 나와.”
“……단장님이?”
아직 바깥의 상황을 전혀 모를 아스타틴은 그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혹시 함정일까 의심하는 듯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강제로라도 끌어내기 위해 이온이 옆에 있는 에렌스트 경을 돌아보았다.
“알렉, 아스타틴을 꺼내. 어서.”
그에 에렌스트 경도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일단 철창 안으로 들어가 아스타틴의 손에 엮인 족쇄를 풀어 주었다.
바닥에 연결된 사슬에 묶여서 내내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던 아스타틴은 조금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조금 지친 표정인 아스타틴을 올려다보며 이온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의 아스타틴에게,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가에 제 발로 찾아온 칼이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당신을 위해서 그가 태양을 떨어뜨리기로 했어.”
“…….”
“밖으로 나가서 그 눈물겨운 장면을 봐야지, 아스타틴.”
아스타틴은 다행히 금세 이온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칼이 그랬던 것처럼, 아스타틴 역시 그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가타부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이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소공작.”
아스타틴에겐 본래 장황함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이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감옥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이온은 그가 저를 지나치기 전에 뒤에 에렌스트 경에게 얼른 말했다.
“알렉, 아스타틴에게 호신용 무기라도 챙겨 줘야 하지 않겠어?”
이제 막 풀려난 탓에 맨손인 그를 위한 배려였다. 나가자마자 죽으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까 봐 하는 배려.
아스타틴도 그제야 움찔하고 멈춰 서더니 에렌스트 경이 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던져 주었다.
“이거라도 괜찮다면.”
성의 없는 손짓으로 건네는 그것을 받아 든 아스타틴이 쓰게 웃었다.
“충분하네. ……다음이 있으면 사례하지.”
“글쎄, 사례는 필요 없으니 조용한 데 가서 도련님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에렌스트 경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그런 이야기를 하자 이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알렉.”
솔직히 말하면 에렌스트 경의 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으나, 이온은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들은 지금 잠깐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을 뿐이다. 앞으로 이온과 아스타틴이 한마음으로 일하는 경우는 두 번 다시 없을 터였다.
단지 8년 전의 일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 일로 용서를 구하고 말고 할 관계조차 아니었다.
어차피 사는 세계 자체가 다른 타인이므로.
이온은 긴말 필요 없이 그런 그들의 관계를 일축했다.
“빨리 가서 상관을 도와요, 아스타틴. 곤란에 처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아스타틴은 이온에게 조용히 고개만 한 번 꾸벅하고는 작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지하 감옥의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급하게 멀어지는 것을 들은 이온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며 그만 발을 옮겼다.
이제 드디어, 카밀루스를 마주 볼 때였다.
이온이 깊이 심호흡을 하며 카밀루스가 있을 철문 앞에 섰다. 이전과 달리 기묘하게 고요한 그 앞에서, 이온이 간수를 돌아보았다.
“대공이 벌써 어딘가에 끌려간 건 아니겠지.”
“예, 옮겼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