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밀루스.”
이온은 화를 억누르기 위해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켜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온이 하나씩 진실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절대로, 아무에게도 전할 수 없는 둘만의 비밀을.
“내가 전에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던 말 잊어버린 건 아니지? 그럼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게 된 건지 틀림없이 궁금했을 텐데, 아니야?”
질문에, 지금까지 축 늘어져 있기만 했던 카밀루스가 문득 움칠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바닥을 긁는 모습에 이온은 그가 제 말에 주목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덕분에 그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 네가 썼다는 그 마법이 뭔지 알게 됐어.”
카밀루스가 깊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향한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이온은 어째서인지 저절로 눈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이온의 발언이 확실히 충격적이긴 했던지, 내내 감옥에 갇혀 있던 탓에 메마른 카밀루스의 입술이 떨리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이, 이온…… 설마.”
진짜냐고, 마땅히 이어졌어야 할 뒤의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는 카밀루스였으나 이온은 충분히 다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페드로가 나에게 그랬어. 네가 미래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
“그래서 내가 물었었지. 너한테 예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하지만 페드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고 했었어. 당연했겠지, 네가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을 테니.”
이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기억이 돌아온 순간에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라 그 역시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시스템이 이것이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고 하는데도, 정말로 그것을 ‘기억’과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온도 안다.
이건 분명 ‘자신의 기억’이었다.
곱씹고 또 곱씹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졌다.
진짜 자신은 누구이며, 제 머릿속에 흘러들어 온 이 말도 안 되는 기억들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인지 말이다.
“북부에 간 네가 8년을 조용히 있었던 이유도 그 사실에 기대면 설명이 되지.”
이온은 이제 알았다.
천재라는 세간의 평과 다르게 ‘현재’의 카밀루스는 철저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넌 네가 누군가를 지킬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선황이 죽을 때쯤 너에게 대공위를 내리러 가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니.”
8년의 기다림 동안 그는 누구보다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닦았을 것이다. 이온 크레이거를 지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동안 첫 번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모든 걸 바꾸기 위해 노력했겠지.”
이온은 이따금씩 꾸었던 꿈속의 카밀루스에게서 지금의 카밀루스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위화감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이제는 알았다.
그는 똑같이 8년 후의 카밀루스였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첫 번째 생을 살았던 카밀루스다.
이온 크레이거를 결국 지켜 내지 못했던 카밀루스.
“강해지고 냉정해져야 한다는 걸 첫 번째 때 배웠을 테니까.”
이온이 말하는 내내 눈 한 번 제대로 깜빡이지 않고 듣고 있는 카밀루스의 얼굴이 점점 슬프게 일그러져 갔다.
“……정말 기억이 모두 돌아온 거구나.”
“그래. 넌, 아마 내가 첫 번째 생에 대해선 평생 모르길 바랐을 것 같지만.”
“미안해, 이온.”
사과의 말을 건넨 카밀루스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온은 그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그때의 일은 카밀루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네가 날 만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
“가끔 생각해.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순수하고 철없어 보이던 도련님이 그대로 컸으면 어땠을까. ……내가 아니었으면 저주도 걸리지 않았을 테니, 많은 게 바뀌었을 거야.”
저주가 걸리지 않은 이온 크레이거.
아마 몸이 작지도 않았을 거고, 내로라하는 크레이거 공작가의 아들이니 이미 한참 전에 다른 유력 귀족가의 영애와 결혼해서 이미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과는 다른,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을 터였다.
“아예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었지만 내 힘으론 거기까진 되지 않았어.”
독백하는 듯한 그의 말에 이온은 입술을 지분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카밀루스가 설마 저와 아예 만나지 않는 경우까지 상정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탑에서 나오지 못한 평행세계를 꿈꿨던 거야?”
“그런 네가 제일 행복했을 거 같았으니까.”
이온은 ‘너 바보야?’라고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이온 크레이거가 탑에 갇힌 최악의 상황을 마주했던 그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법했기에.
하지만 이온의 짧은 추측으로도 카밀루스를 만나지 않은 이온 크레이거가 지금의 자신보다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세상에 자신을 카밀루스보다 더 사랑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래, 그럼 그 부분에 한해선 신에게 감사해야겠네.”
“…….”
“난 널 만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 널 탑에서 꺼내 온 것도…… 그건, 그래, 지난 생엔 조금 후회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온은 어쩐지 힘이 빠져 철창에 이마를 가만히 기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가가 조금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중얼거렸다.
“네가 목숨 걸고 되돌려 준 이 시간을 나는 감사히 살아갈 거야.”
카밀루스는 단지 시간만 되돌린 게 아니라, 모든 걸 바꾸기 위해 애썼다.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가 어떤 헌신을 했는지 이온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건 보통의 정신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카밀루스는 저를 탑에서 데리고 나와 준 이온을 자신의 구원자라고 말했다. 그러니 제 목숨마저 받을 권리가 이온에게 있다고.
하지만 이온의 생각은 달랐다.
카밀루스야말로, 이온 크레이거의 구원자였다.
삶의 구원자.
따라서 이온은 그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카밀루스, 너와 함께.”
제 설득이 먹혔다고 봐도 되는 걸까.
카밀루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이온은 옆의 욤뇽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신호를 받은 욤뇽이가 얼른 카밀루스에게 다가가 끙끙댔다.
“꾸우…….”
동그란 구슬을 먹으라며 입 앞으로 내미는 아기 드래곤을 카밀루스가 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시는 성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를 녀석으로서는 자신에게 전부를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카밀루스도 알았다.
그 때문에 어서 먹으라고 하면서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는 녀석의 요청을 더는 거부하지 못했다.
대체 제 몸을 둘러싼 금제를 어떻게 풀고 나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루스는 이온의 말대로 구슬을 입 안으로 들였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잘했어, 카밀루스…….”
그 한마디에 카밀루스가 응축된 드래곤의 마나 구슬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부드럽게 몸에 녹아드는 것을 느끼며 카밀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 원망하지 않아, 이온?”
“내가 왜 널 원망해?”
“…….”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네 덕분인데, 카밀루스.”
이온은 말하면서 카밀루스의 몸을 살폈다. 당장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기에 덮여 검어졌던 얼굴이 조금씩 되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온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양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네가 날…… 아니, 너와 내 아이를 포기했으면 원망했을 거야.”
말하면서 이온이 자신의 볼록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약한 제 몸에 정착해서 잘 자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이는 배 속에서 제 존재감을 무럭무럭 키워 가는 중이었다.
저주가 풀렸음에도 이온의 몸은 아직도 이 아이에게 온몸의 마나를 끌어다가 바치고 있었다.
이온이 그 위에 손을 가져다 대자 메시지 하나가 지나갔다.
[상태 이상(Hidden): 마나 소실]
이온은 그걸 보면서 다시 한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메시지가 아이는 안전할 것이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 의미가 맞을 것이다.
현재 이온의 몸은 이 아이를 살리고 키우는 데에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무사한 거라는 사실을, 이온은 본능처럼 느꼈다.
“아이는 기적처럼 잘 자라고 있어. 그러니 네가 나올 일만 남았어.”
“꾸우!”
다행히 구슬을 삼킨 것이 효과가 퍼지기 시작하는지, 변형되었던 카밀루스의 신체가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에 욤뇽이가 카밀루스의 주변을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살폈다.
이온은 녀석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카밀루스에게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