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 이온!”
카밀루스는 몸을 뒤틀었다.
이런 식의 해결 방법이 있는 줄 알았으면 버니언에게 순순히 잡혀서 스스로 속박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 앞에 기다리는 건 절망적인 미래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한 자포자기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또 다르게 그려지는 절망 앞에서는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아닌 이온이 다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미래는, 결코 다가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그러나 이온은 그런 카밀루스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안전 거리를 확보하듯이.
그리고 어렸을 적, 멋모르고 시도했던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조차 없는 일을 하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긴 시간이 지났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감각은 잊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화한 것 같기도 했다.
기억 일부가 되돌아오면서 오히려 제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크레이거 공작 역시 이온을 더욱 애정 있는 눈으로 봐 줬던 것 같기도 했다. 아들이 아프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단적으로 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온은 불안하지 않았다. 이번의 일 또한 그런 전기적인 변화를 불러와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래도 두려운 것은 사실이라 품 안의 말랑한 드래곤을 더 꽉 안았다.
동그란 물빛 눈의 생명체는 아직 이온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듯 보였으나 카밀루스의 반응을 보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인지 이온의 품에 파고들었다.
끙끙거리는 작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온은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몸 안을 휘도는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아래로 내리누르는 감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예상했던, 제가 언젠가 봤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경고! 경고!]
다급하게 떠오르는 시스템 창. 그렇지만 이온은 예전에 그것을 봤을 때와는 달리 당황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는 ‘마나 소실’ 상태입니다.]
[무리한 마나의 운용으로 리바운드가 일어납니다.]
뒤집어진 속에서 피가 울컥 역류해 숨이 컥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온!”
아직은 거리가 떨어져 있는 카밀루스가 몸을 격하게 비틀면서 미친 듯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온은 제 몸이 저절로 쓰러지려 할 때까지도 고집스럽게 품 안의 것을 놓지 않았다.
지극한 어지러움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의식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이온이 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코와 입에서 새빨간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플레이어의 몸에 치명적인 이상 징후가 발생합니다.]
[몸의 면역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 계산 중…….]
이온은 제 몸이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나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카밀루스의 목소리가 제게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이어 강한 힘이 제 몸을 끌어안는 그 안정된 기분을 느끼며 이온은 눈을 감았다.
굳이 소리를 쥐어짜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 * *
카밀루스에게 있어서 ‘틈’에서 가져온 이 시스템이 때로는 구원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빠져나가지 못할 수렁처럼 느껴졌다.
그 이중적인 마음이 이토록 극명하게 느껴진 것도 오랜만이었다.
[상태 이상: 마법 계약]
[‘이온 크레이거’가 상태 이상 ‘실신’에 빠졌습니다.]
[시전자가 플레이어의 1미터 거리 이내로 강제 소환되었습니다.]
‘틈’에서 저를 구해 주었던 그 메시지가 다시금 저를 소환했을 때 카밀루스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온, 이온!”
[현재 ‘이온 크레이거’가 사망할 확률은 82%입니다.]
지금껏 이온이 실신 상태에 빠진 모습을 많이 봐 왔지만, 피를 토하면서 기절한 것은 처음이었고 심지어 사망 확률이 이 정도로까지 치솟은 경험도 처음이었다.
카밀루스는 아주 잠깐의 마나 운용으로 정신을 잃은 이온을 앞에 두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일단 치유 마법으로 급하게 이온의 몸을 회복시키고, 제힘으로 이온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중지시켰다.
날뛰는 마나의 흐름을 멈추는 동안, 카밀루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온의 입이며 코에서 나오는 피를 급한 대로 제 옷으로 닦아 주고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이온…….”
지금 해 놓은 조치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서둘러 공작가든 어디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카밀루스는 알고 있었지만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꾸우.”
그러는 사이 욤뇽이가 카밀루스의 어깨 위로 올라와 작은 손을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강하지 않지만 찰싹, 하고 때리는 손길에 카밀루스는 녀석을 돌아보았다가 시야가 흐릿한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이온을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이제 막 몸에서 마기를 몰아낸 터라 몸속이 전쟁이라도 치른 듯 엉망진창이었다.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비틀거렸으나 제 연인을 안은 채로 어두운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발을 놀렸다.
자신이 여기서 무너지면, 이온이 준비해 놓은 이 모든 게 전부 무위로 돌아갈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쓰러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이렇게 등 떠밀리듯이 모든 것이 처리될 줄은 카밀루스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야만 했다.
그런 주인의 의지를 느낀 것인지 아기 드래곤이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카밀루스를 안내하듯이 앞장섰다.
허억, 헉…….
이온을 안고서는 녀석을 따라가는 데도 벅차 카밀루스는 몸을 비틀거렸다.
사실은 금세라도 몸이 가루가 되어 부스러져 내릴 것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을 만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카밀루스의 손은 더욱 악착같이 이온의 몸을 붙들었다.
그렇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모르게 지하 감옥의 긴 어둠을, 카밀루스가 마침내 헤치고 나왔을 때.
낮의 햇볕과 소란스러움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눈부심에 카밀루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누군가 발견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공, 대공!”
수일 만에 마주하는 바깥의 세상.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맞이한 건 페드로였다.
카밀루스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온 페드로가 서둘러 그의 몸을 붙들었다.
제게 닿은 그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카밀루스는 제 의식이 깨어남을 느꼈다. 그렇지만 바로 앞에 있는 페드로의 목소리마저 다소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밀루스의 몸은 단지 안쪽만 엉망인 게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지는 피가 단지 이온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우선 주변부터 살폈다.
제 곁으로 몰려든 수많은 이들 중에서 에렌스트 경을 발견한 카밀루스가 그에게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먼저 다가왔다.
에렌스트 경이라면 그래도 안심할 수 있기에, 카밀루스는 그에게로 이온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