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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02)화 (302/317)

“……소공작을, 어서.”

에렌스트 경은 정신을 잃은 이온의 상태를 보고는 당황한 듯했지만 긴말을 하기보다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는 쪽을 택했다.

카밀루스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면서 비틀거리는 제 몸을 부축하는 다른 이의 존재를 느끼고는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페드로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게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카밀루스는 이대로 눈을 감아 차라리 쓰러지고 싶었으나 저를 받치고 있는 페드로의 어깨를 움켜쥐는 것으로, 제 정신을 붙들었다.

“우선 상황 보고를, 페드로.”

페드로는 카밀루스의 몸을 부축해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지금 그가 이대로 쓰러지면 안 된다는 인식은 페드로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카밀루스의 발이 한 발짝씩 예전의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후작과 크레이거 공작이 황성 내 대부분의 기사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임시 황궁은 노아 기사단이 점령했으니 그곳으로 가셔서 처분을 내리시면 됩니다.”

“처분…….”

누구에 대한 처분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카밀루스의 파란 눈이 서늘한 빛을 띠는 것을 보면서 페드로가 덧붙였다.

“그것만 처리하시면 이제 이 황성은…… 대공의 것입니다.”

그리고 황성의 주인이 곧 오브라이언의 주인이다.

그 의미를, 카밀루스도 알았다.

카밀루스도 알고 이 자리에 있는 말단 기사조차 알 터였다.

제 앞으로 트이는 길을 따라 걸으며 카밀루스는 이 길을 누가 만들어 주었는지 되새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온의 공이었다.

탑에서 자신을 꺼내서 새 삶을 준 그.

그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의 대공 카밀루스 클로델조차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이온을 살려야겠다는 의지가 언제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고,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제 구원자는 카밀루스를 위해서 모든 걸 준비해 두었다.

카밀루스는 이 길을 만들기 위해 그가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알기 때문에 영광의 관을 기꺼이 쓰러 가야 했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 * *

카밀루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침내 임시 황궁 앞에 우뚝 섰고, 노아 기사단이 둘러싸고 있는 그 안으로 아무런 저항감 없이 들어갔다.

임시 황궁의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붉은 카펫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에 도달하고 나서야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카밀루스는 그제야 제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그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뚜벅, 뚜벅 천천히 울리는 그의 발소리 하나하나에 근처에 있는 모두가 긴장하여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이러한 시선을 받는 일이 제 일상이 되리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새기며 카밀루스가 기사들의 안내를 따라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 편이 아니라면 썩 위협적으로 느꼈을 법한, 기사들이 양편으로 정렬해 만들어 둔 길 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춘 카밀루스가 이내 알현실 끝에 앉아 있는 버니언을 발견했다.

“…….”

버니언이 앉아 있는 곳은 황좌가 아닌 그 앞의 바닥이었다.

두 무릎을 꿇은 채로 한때 제 뒤를 맡겼던 칼 나르바에스의 칼 끝에 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분을 하면 된다는 그 말 그대로, 카밀루스의 앞에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깊은 한숨 소리가 알현실 안을 갈랐다.

카밀루스에게서 시작된 그 소리는 한순간에 주변 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곧 카밀루스가 아직 저를 부축하고 있는 페드로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만 저를 놓아도 된다는 그 신호에, 페드로는 불안해하는 듯했으나 제 어깨에 얹은 카밀루스의 팔을 풀고 그의 곁에서 떨어졌다.

카밀루스는 잠시 비틀거리긴 했으나 비척거리는 걸음으로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낯선, 아주 낯선 제 형제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

“…….”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버니언의 얼굴은 생각보다는 담담했다.

마지막까지 발악을 할 거라고 여겼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카밀루스는 제가 버니언에 대해 아직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이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일까.

버니언과 불과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좁힌 카밀루스가 멈춰 서서 저를 올려다보는 버니언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죽는 쪽도 아닌데 버니언과의 지난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던 것은 역시나 아버지 앞에 저를 끌고 가 아이오딘으로 가겠다는 맹세를 받아 낸 그의 모습이었다.

카밀루스는 그때의 어깨 부상이 도진 것처럼, 버니언의 칼이 찔린 부위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그에 카밀루스는 역시나 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버니언 클로델은 카밀루스에게 있어서 열등감을 자극하는 기제이기도 했으니까.

제가 탑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황실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온 자였다.

버니언에게는 이 황실이 또 다른 감옥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선황이 만든 이 두 모순 덩어리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카밀루스는 허탈함에 웃음마저 지으며 버니언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죽음을 기다리고 있나?”

버니언이 그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마치 살려 준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네.”

“그럴까 하는데. 때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괴로울 때도 있지 않나.”

“…….”

“네가 차지하고 싶었던 걸 내가 다 가지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괴로움보다 너에게 더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네 욕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카밀루스의 뜻을 알아들은 버니언이 미간을 좁히며 사납게 뇌까렸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죽여.”

카밀루스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리고 버니언에게는 사형 선고보다 더한 처벌을 내렸다.

“아이오딘으로 가라, 버니언.”

“…….”

순간 버니언의 눈빛이 검게 까라졌다.

앞이 막막해진 자의 눈빛이었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가를 슬쩍 비틀었다.

“수년을 산 경험자로서 말하는 건데,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어. 보시다시피 그곳에서 나름대로 내 사람들도 만들었지 않나. 물론, 난 네가 새로운 동료를 만들도록 그렇게 허술히 보내지 않을 테지만 말이야.”

버니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형제가 내리는 형벌도 끔찍했지만,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떠한 사실 하나가 그의 가슴속에 깊은 가시를 박아 넣었다.

이 순간 그의 관심사는 제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중되어 있었다.

“선황은.”

버니언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버지는…… 역시 너를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던 거겠지?”

형제의 이 절망적인 대화 앞에서 알현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선황은 군주로서는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최악의 아버지였다.

“죽은 자의 의중을 내가 어떻게 알까. 너도 나도 단지 추측할 뿐이지.”

“아니, 어차피 너를 사랑하는 거였어.”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카밀루스는 임종 직전까지 저를 보며 제 어미를 떠올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으나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버니언의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끝이 금세 빨개진 것이 보였다.

“단 한 번도 나를 아들로 본 적이 없었어, 그 사람은……. 너는 몰라. 선황이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지.”

“…….”

“결국 너를 선택했던 거야. 이 결말 또한 그 사람이 만든 거라고.”

버니언의 말에 카밀루스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죽은 자의 망령에 사로잡힌 이 모습이 이전의 저와 너무 똑같아서, 차마 비난할 수 없었다.

그저 연민할 뿐이었다.

저 의식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그의 영혼을.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만 냉정히 뒤돌아섰다.

자신은 그의 구원자가 아니었으므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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