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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03)화 (303/317)

솨아아아…….

주위를 가득 채운 빗소리가 시끄러워서 깨어났을 때는 역시나 이미 며칠이 지난 뒤였다.

아직 몽롱함에 잠긴 채인 이온의 초록빛 눈이 살며시 열리자마자, 다행히도 예상했던 풍경이 시야에 밀려들었다.

아니, 어쩌면 예상을 뛰어넘었을지도.

“이온!”

“소공작!”

“오빠아!”

기껏해야 카밀루스와 크레이거 공작 정도가 곁에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낮 시간이라 우연히 시간이 겹친 건지 예상했던 두 사람은 물론이고 에렌스트 경부터 시작해서 페드로·에밀리까지 몰려 있었다.

이온은 막 깨어난 와중에도 눈앞의 광경에 당황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어, 아…….”

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옹알거리다가 카밀루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온의 그 눈길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와락 안아 온다.

“무사해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카밀……루스?”

이온은 목을 겨우 가다듬어 그의 이름을 토해 냈다. 그러는 동안 그가 한 생각은 하나였다.

‘이 녀석이 왜 여기 있지?’

하는.

이온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카밀루스에게 안겨 있는 동안에도 크레이거 공작이나 페드로에게 시선을 주었으나 그들은 이온의 눈빛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직감한 이온이 카밀루스를 살며시 밀어 냈다.

탈진한 상태인 탓에 바들바들 떨리는 데다 힘이 없는 손길이었는데도 카밀루스가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평소보다도 더 흠칫하는 모습.

카밀루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에, 오히려 이온이 과민 반응 했나 싶어진 순간 그의 입에서 예상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배가 아프거나 한 거야?”

“어?”

그야말로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라 이온도 순간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손은 이미 볼록한 배 위에 얹어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아이를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배가 허전하다거나 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 아이는 스스로를 지켜 낸 게 분명했다.

이온은 약간 안도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이제 슬슬 정신없던 것이 가시고,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곧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이온이 카밀루스에게 대꾸했다.

“내 몸은 괜찮아. 그보다 카밀루스? 나,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말이야.”

“이해가 안 된다니, 뭐가?”

카밀루스의 반문에 이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사람들, 낯익은 분위기, 낯익은 공간.

여기까지는 좋았다.

이온 크레이거가 크레이거 공작 저택에서 눈을 뜨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제 계획에 의하면 카밀루스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온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카밀루스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이전의 그와 큰 차이가 없었다.

대충 드레스 셔츠나 걸치고 아무렇게나 입었다는 소리였다.

대공의 정복도 아닌 가벼운 옷차림을 보고서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한 이온이 카밀루스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좀 무정해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이의 안위도 확인했겠다, 자신도 잘 살아났겠다, 이제 남은 건 설마 제 계획이 도루묵이 된 것인가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내가 쓰러지고 난 다음에 혹시 일이 어떻게 된 거야?”

제법 날 선 기색을 품은 물음에 카밀루스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이온이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일을 벌였던 크레이거 공작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설마…… 아니죠?”

진짜로 제 계획이 무산됐냐고.

아무리 이온이라도 그런 직접적인 물음은 하기가 꺼려졌다.

진짜로 그렇다는 답이 돌아오면 솔직히 제가 어떤 반응을 할지 스스로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순간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진 것을 가정하자 그다지 좋지 않은 미래의 장면이 수십 개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온의 질문을 받은 크레이거 공작도 어쩐 일인지 조금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저, 이온, 그게 말이다…….”

추임새가 이상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멀쩡하게 있는 걸 보면 버니언한테 역으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그야 당연하긴 하지.’

미리 황실 기사단인 그레나 기사단과 노아 기사단 둘을 전부 포섭해 놨으니 실패했을 리는 없다.

다만 카밀루스가 지금 황궁에 없다는 건 역시 한 가지 가능성밖에는 생각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이온은 금세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을 입 밖으로 내었다.

“너 설마 버니언이 불쌍하다고 봐줬어?”

그에 카밀루스가 눈을 크게 뜨며 바로 반문해 왔다.

“뭐?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면 네가 왜 황성이 아니라 여기 있는 건데?”

“……그야, 내가 있고 싶으니까?”

어설픈 대답은 이온이 원했던 유가 전혀 아니었다.

이온은 표정 유지를 하지 못한 채로 이제는 에렌스트 경을 돌아보았다.

네가 설명하라는 눈빛에 에렌스트 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온을 보좌해 온 자의 눈치를 발휘해, 그나마 이온이 원하는 답을 근접하게 찾아서 입에 올렸다.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은 아이오딘으로 향했습니다.”

“아이오딘으로?”

카밀루스가 8년 동안 갇혀 지냈던 곳의 이름이 나오자 이온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행히 다음에 에렌스트 경이 전한 건 후자에 가까운 소식이었다.

“황도에서의 추방령이 내려져 아이오딘으로 간 겁니다.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하……의 명령으로요.”

‘전하’라는 호칭을 말할 때 에렌스트 경의 눈이 잠시 카밀루스를 힐끗했다.

역시나 문제가 이쪽에 있었던 모양인 터라, 이온이 좀 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카밀루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은 전부 잘 해결이 되었어, 이온.”

“그런데 뭐가 문제가 된 거야. 지금 황위가 공석인 거지? 설마 귀족들이 네 정통성을 의심해?”

그런 것들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투에 카밀루스는 깜짝 놀랐다.

이온이야 자각 없이 하는 말들이겠지만, 모두의 앞에서 너무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는 중이었다.

어머니 앞에 선 아들과 같은 느낌이 되어 버린 카밀루스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주저하다가 이온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천천히 해결하면 되는 문제고. 지금은 네 몸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만 이미 수없는 날을 아파 본 이온에게 자신의 건강은 어차피 단시간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개의치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답답하게 굴지 말고 뭐가 문젠지 말해 봐, 카밀루스.”

그러고 주변 이들을 돌아보면서 모두를 다그쳤다.

“나한테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행히 이 중에서 제일 이해관계에 안 얽혀 있고, 제일 당당한 에밀리가 나섰다.

“오빠 말대로, 지금 황위는 공석이 맞아.”

말소리를 따라서 이온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에밀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다들 제각각이었다.

그녀에게서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집중하는 이온.

어째선지 민망함이 담긴 얼굴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페드로.

금세라도 한숨을 내쉴 것 같은 표정의 크레이거 공작.

썩은 표정이 돼 있는 에렌스트 경.

마지막으로 에밀리와 이온 사이에서 치열하게 눈치를 살피는 카밀루스까지.

이것저것 엉성하게 모여 나름 완벽해진 분위기를 확인하고 에밀리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황위가 공석인 건 결국 오빠 때문이거든.”

“나 때문이라고……?”

왜 황위가 공석인 게 자신의 탓이냐며 황당해하는 이온의 표정을 확인하고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 사태가 아주 만족스러운 1인으로서, 제 오라버니가 누군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는 로맨틱한 상황에 꽤 행복해하고 있었다.

“모두들 전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하께서 오빠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지 뭐야?”

이온의 눈과 눈썹, 그리고 입까지 전부 일자로 굳는 것을 보면서 에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때문에 지금 황실은 업무 마비가 와서 난리야. 매일같이 우리 저택 앞에 와서 다들 읍소 중이니까 나가서 확인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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