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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05)화 (305/317)

가장 먼저 카밀루스를 찾아온 건 미아블레 후작이었다.

〈황성을 손에 넣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축하를 받아야 하는 건가.〉

카밀루스는 그때 이온의 방에 있었다.

정신을 잃은 이온을 제힘으로 어떻게든 치료하려 애쓰는 와중에 찾아온 손님이 솔직히 말하면 귀찮기도 했었다.

황성의 점령은 어차피 제가 한 일이 아니었다.

남들이 해 놓은 것을 제가 받아먹은 것에 불과했다.

카밀루스 자신이 생각해도 이렇게 얼렁뚱땅 황위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헷갈렸다.

제게 정말로 황위에 오를 자격이 있는 건지…….

단지 선황과 로제니아 클로델 황후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라는 이유로.

게다가 미아블레 후작이 이곳 공작가에 온 이유는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그런 그의 정통성을 증명해 줄 인물인 것이다.

물론 현재 황실의 정통한 핏줄로 남아 있는 카밀루스 외엔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클로델 황가도 벌써 오브라이언의 세 번째 왕조의 주인이니, 네 번째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왕조를 연다면 가장 유력한 가문이 바로 크레이거 공작 가문이었다.

물론 크레이거 공작도, 이온도 딱히 황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를 본 순간 반갑다기보다는 불편하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후작을 만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후작은 조카의 그런 말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전하께서도 아직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우시겠지요.〉

〈모두들 그 자리가 나의 제자리였다고 말하는데, 정작 난…….〉

그에 후작은 조용히 웃었다.

카밀루스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크레이거 공작이 그를 제게 보낸 의도를 눈치챘다.

후작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온 사자였다.

그는 카밀루스에게 실례하겠다고 하면서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앉혔다.

그리고 그림으로만 봐 왔던 어머니를 닮은 그 얼굴로 카밀루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밀루스는 왜인지 모르게 울컥할 뻔도 했으나 겉으로 드러내기 전에 겨우 가라앉혔다.

〈대공, 선황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의 의도는 내게도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내 누이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인데, 그 마음을 내가 굳이 알고 싶겠습니까?〉

〈…….〉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로제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선황이기에 미아블레 후작의 이 말을 들으면 진짜로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카밀루스는 마리엘에게 들은 진실을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살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런 비극은 그냥 자신의 가슴에 묻어 두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대공께서도 그리 욕심이 많은 분은 아닌 것 같으니 지금의 이 상황이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겠지요.〉

〈당황스럽다기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에 대한 판단이 잘 안 선다고 해야 할까요. 합리적인 것인지도, 도덕적인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 후작이 눈웃음을 지었다.

황위를 앞에 두고 당장 달려가 앉지 않는 카밀루스도 특이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때로는 본인의 판단보다는 남의 판단을 믿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대공.〉

〈……이렇게 떠밀리는 방식으로?〉

〈현재 그 판단 안에 이성과 합리보다는 열망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보기에 지금 대공을 도운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함께한 자들이 아니에요. 정말로 순수하게 대공이 그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이 일을 주도했지요.〉

이온과의 두 차례 만남을 가지면서 후작은 그 전에 크레이거 공작과도 대화를 나누었었다.

황실파의 수장인 크레이거 공작이기에 미아블레 후작은 사실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그에게도 어느 정도 야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예상과 달리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 아들의 계획을 완성해 줄 사람이 후작이오.〉

그 한마디만 들어도 공작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전대 미아블레 후작이 황도를 떠나 영지에 틀어박힌 데는 누이의 죽음이 준 충격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긴 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귀족 사회의 권모술수에 질려 있던 참에 그것이 마침 좋은 핑계가 되어 준 측면도 분명 있었다.

그 생각은 미아블레 후작도 마찬가지로 하고 있었다.

하여 다시는 황도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고, 카밀루스가 혹시나 누이의 아들이 아닐까 싶어 보러 온 순간에도 그저 조카의 얼굴을 보겠다는 계획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어떤 일에 깊게 관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데 크레이거 공작과 이야기를 나눈 뒤로 후작의 마음이 바뀌었다.

〈물론 삶은 본인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때로는 주변인들의 열망을 살펴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법입니다.〉

〈…….〉

〈그들이 대공을 원하는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그곳에 오르고 난 뒤에 그 자격을 갖출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황위라는 자리가 그럴 수 있는 자리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카밀루스는 후작이 말한 열망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열망.

카밀루스는 제 앞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이온을 바라보다가 눈빛을 가라앉혔다.

누구보다 가장 강한 열망을 지닌 이가 바로 이온이었다.

카밀루스는 문득 몰려오는 지극한 피곤함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손끝으로 미간을 문지르던 그가 이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말씀은 알아들었습니다.〉

그에 후작이 미소를 지으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께서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공. 마음을 정리하고 어서 내려오십시오.〉

그러고 물러나 방 밖으로 나서려는 미아블레 후작을 카밀루스가 넌지시 불렀다.

이전과는 썩 다른 방식으로.

〈숙부.〉

〈…….〉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미아블레 후작이 멈칫했다.

지금껏 마음속으로만 숙부와 조카 사이라고 생각했지, 실제로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카밀루스의 그 부름에 미아블레 후작은 제 속에 기묘한 감정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감정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울컥하고 만 후작이 말없이 카밀루스의 뒷말을 기다렸다.

〈일이 마무리됐을 때 숙부께서 제 곁에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실 수 있습니까?〉

〈제가, 필요하신 겁니까?〉

카밀루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엔 조금 허탈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게.〉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카밀루스는 제가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이온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 제게 생길 가족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라고 하면 후작은 이해해 줄까.

〈후작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온의 배 속에 내 아이가 있습니다.〉

〈예……?〉

제 상식을 파괴하는 한마디에 미아블레 후작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걸까 하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카밀루스는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할 게 틀림없는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사정 설명은 나중에, 나중에 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그래서요?〉

〈가족이 나에게 생긴다는 게 너무, 어떤 의미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고. 사실은 힘이 겨워요.〉

〈……대공.〉

〈제 옆에 페드로라고, 저를 아들처럼 대해 준 부관이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걸 배웠지만 그래도 내가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정말로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 선황처럼 내가 내 아이를 괴물로 만들면 어쩌지요? 혹시 아이를 미워하게 되면.〉

선황이 자신을 증오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로제니아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혹시 그런 위험한 형태로 변질될까 봐 두려웠다.

그게 현재 카밀루스가 하는 가장 인간적인 고민이었다.

〈후작이 옆에서 나를 지켜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

〈역시 좀 무리한 요구겠습니까? 그런 거라면 그냥 무시해도 좋습니다.〉

미아블레 후작은 한참 만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라 잠시 당황했을 뿐이에요. 대공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카밀루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미아블레 후작으로 하여금 누이를 떠올리게 하는 그 얼굴이, 어쩐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웃었다.

조금 안심했다는 듯이.

카밀루스가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는 홀로 내려가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크레이거 공작도, 미아블레 후작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주려는 듯한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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