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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06)화 (306/317)

카밀루스는 그 뜻을 알아듣고 내심 고마워하며 옷을 갈아입은 뒤 페드로와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루미에르 홀로 향했다.

훌륭한 댄스홀을 갖춘 크레이거 공작가의 홀이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2층의 계단 앞에 섰을 때는 아주 엄숙한 분위기였다.

홀에 정갈히 배치해 둔 테이블과 의자들, 그것들을 채운 여러 귀족들.

황도 귀족들의 수를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인원은 아니었으나 크레이거 공작이 신경 써서 초대한 만큼, 주요 인사들만 알차게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카밀루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홀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의 등장을 기다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고요한 크레이거 공작 저택의 홀.

정갈한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고 긴 파란색 천을 늘어뜨린 채로 나타난 그를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카밀루스는 탄탄한 몸을 천천히 움직여 계단을 내려가며 그곳을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아까 미아블레 후작을 대할 때의 불안감과 고뇌의 빛은 보이지 않는 채였다.

〈다들 많이 놀랐겠군.〉

카밀루스가 귀족들이 많이 모인 공식석상에 나선 것은 이번이 딱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이온이 그를 탑에서 구해 주었을 때.

두 번째는 선황의 장례식 때.

세 번째는 오늘.

그 때문에 귀족들도 카밀루스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그의 입을 주목했다.

이제 카밀루스는 더 이상 북부 아이오딘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 막 나온 애송이가 아니었다.

오늘의 일로 황실파의 수장인 크레이거 공작과 북부의 실력자인 피에트로 후작이 그를 지지하는 것이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황실의 1, 2기사단인 그레나 기사단과 노아 기사단까지 배신을 했다.

아무리 실정을 한 버니언이라고 해도 단 하루 만에 황궁을 손에 넣은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카밀루스 클로델은 가진 거라곤 마법 능력밖에 없는 하찮은 북부의 대공이 아니라, 힘과 권력을 한데 가지고 있는 강력한 권력자였다.

설령 아직은 선황의 사생아라고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또각또각.

묵직한 몸의 무게에 걸맞게 그의 구두 굽 소리 역시 홀에 깊게 울려 퍼졌다.

카밀루스는 이 연회를 주최해 준 크레이거 공작을 지나 순식간에 귀족들 사이에 섰다.

그는 자리에 모인 귀족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카밀루스의 파란 눈은 기본적으로 선해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날카로움도 품고 있었다.

〈오늘 내가 그대들을 많이 놀라게 했지. 하지만 여기 있는 크레이거 공작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말을 들은 누군가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약간 긴장한 어투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단지 전하께서 무사히 황위를 계승받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답이 들려온 쪽으로 카밀루스의 시선이 향했다.

귀족파의 누군가였다. 카밀루스는 그의 눈에 비치는 두려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혹시 카밀루스가 내친김에 황실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일거에 몰아내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실력을 보인 참이니 그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이 모두는 이온의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그 조그마한 머리에서 나오는 탁월한 정치력과 과감한 결단이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판단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치의 세계에서는 그런 자를 옆에 둔 것만으로도 권력이 된다.

거기에 크레이거 공작가의 아들이니, 카밀루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지지자와 함께하게 된 셈이었다.

카밀루스는 언젠가 이온에게 했던 제 말을 떠올렸다.

네가 길바닥의 걸인이 되라고 하면 걸인이 될 거고, 네가 왕이 되라고 하면 왕이 될 거라고 했던.

카밀루스는 그것을 철저히 지킬 참이었다.

그가 자신을 황위에 올리려고 하고 있으니, 자신은 최선을 다해 그것에 어울리는 자가 될 터였다.

〈계승식이야 천천히 준비하면 되는 일이지. 황실의 어른이 없으니 그 형식에 대해서도 정해야 할 터라, 결정하는 데까지 며칠 걸리지 않겠나?〉

〈…….〉

카밀루스의 발언에 주위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미 황위를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전제한 발언에 다들 놀란 눈치였다.

심지어 이 자리를 만든 크레이거 공작마저도.

카밀루스는 그런 크레이거 공작과 눈길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내가 황위에 오를 자격이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 터.〉

그가 뒤돌아서며 그동안 시선을 맞추지 못했던 다른 귀족들도 돌아보았다.

대부분 낯선 자들,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이 이끌어야 하는 자들이다.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난 로제니아 클로델 황후의 아들이오.〉

카밀루스의 선언에 귀족들이 저마다 동요했다.

가만히 있는 자는 크레이거 공작과 미아블레 후작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간 뒤 누군가가 외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황께서 그럼 그 사실을 숨겼다는 의미이신 겁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하면서 누군가는 로제니아의 동생인 미아블레 후작을 살피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는 사이 크레이거 공작이 발언을 하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으나, 카밀루스가 먼저 눈치채고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선황은 나의 출생과 신분, 모든 것을 숨겼소. 하지만 그 임종 직전 날 찾아와 나에게 이 사실을 밝혔지.〉

카밀루스는 약간의 거짓말을 덧붙였다.

〈사죄와 함께.〉

안 그래도 선황의 마지막 북부행에 대해서는 귀족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도무지가 그곳에 간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 안에서는 여전히 그 부분은 해명되지 않았으나,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카밀루스의 말은 그 해답으로서 충분하고도 넘쳤다.

〈대공위를 내린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고 보아도 되겠지?〉

카밀루스가 여유롭게 내뱉은 그 한마디에 누군가가 일어서서 발언했다.

〈……이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공 전하. 황실에 정통한 첫 번째 후계자가 있었다는 의미인데, 문제는 그것을 증명할 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할 수 있네.〉

크레이거 공작이 주저하지 않고 일어났다. 순간 카밀루스에게 몰렸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카밀루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면 모를까, 크레이거 공작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 신뢰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선황의 오랜 친우로 알려진 그다.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이, 이 내가 오늘 낮의 일을 벌였다고 믿는 자는 없기를 바라네.〉

크레이거 공작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카밀루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블랑셰의 축복으로 오브라이언 황실을 차지한 자들의 핏줄은 파란 눈을 지니고 있으니 우선 선황의 후계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믿네. 그렇다면 로제니아 클로델 황후의 핏줄이 맞는지가 관건이겠지?〉

〈로제니아 클로델 황후께서는 공식적으로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작.〉

〈벌써 25년이나 지난 일이니 기억하는 자들이 많지는 않겠으나……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아는 자가 있을 것이오. 당시 황후께서는 몸이 좋지 않아 남부로 요양을 간 적이 있었지.〉

젊은 귀족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으나 크레이거 공작과 연배가 비슷하거나 높은 이들은 기억을 더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중 누군가가 입을 중얼거렸다.

〈설마 그 요양 기간에…….〉

크레이거 공작은 호응해 준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네, 백작. 대공께서는 알려진 나이보다 1살이 더 많다네. 이 또한 선황이 모두를 속인 결과인 것이지.〉

〈…….〉

선황이 속였다.

너무 가감 없는 표현이라 다들 놀란 눈치였으나 일단 누군가가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하, 하지만 모두가 말뿐인 것이지 않습니까? 다름 아닌 황실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이니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기는 어렵습니다. 혹 선황의 필체로 남겨진 서류라든가…… 혹은 황실에 남은 기록이라도 없는 것입니까?〉

그에 카밀루스가 쓰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선황은 그러한 걸 남길 수도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해 두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건 없지.〉

〈그럼 방금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씀입니까?〉

증거가 없다면 차라리 이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황위에 오르겠다고만 한다면 일단은 부정할 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기에.

물론 이후 분란의 씨앗은 충분히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계승 서열에 있는 크레이거 공작가에 수작질을 거는 인간들이 잔뜩 생겨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방책은 없어 보이는 난제.

이것을 해결해 줄 이가 바로 미아블레 후작이었다.

〈그 믿음은 제가 심겨 드리지요.〉

미아블레 후작은 모두의 앞에 제 가문의 가보 두 가지를 꺼냈다.

황성 내에 신성한 동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던 귀족들은 모두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았다.

다만 블랑셰의 전설에 대한 것도 이제는 신화로 생각할 정도인 터라 그것으로 어떻게 카밀루스의 정통성을 증명할 수 있는 건지 모두가 의아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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