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결국 전부 다 만져 봤다고…….”
카밀루스의 마지막 말에 이온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걸 위해서 공작이 자리를 만든 거였어.”
이온은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제 아버지가 정말로 카밀루스의 편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가에 조금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뒤돌아선 이온이 카밀루스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표정은 다소 엄했다.
“그래서, 대관식은 언제 하려고?”
“준비는 다 되었어.”
“밖에 황궁의 시종들이 와 있는 건 바로 해결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일 얘기부터 하는 이온이 너무나 그다워서.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온이 또 자신을 혼낼 것을 알고 있으니 카밀루스는 얌전히 수긍했다.
“그렇게 할게. 그보다, 이온?”
“응?”
이온이 뭐냐는 듯이 대꾸하자마자 카밀루스가 이온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온이 놀라 숨을 삼키자 카밀루스가 눈매를 접어 웃으며 냉정한 현실을 알렸다.
“너는 좀 더 쉬어야 해. 그리고 우리 할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던가?”
“할 이야기?”
제가 기절하기 전의 일을 의식한 이온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카밀루스를 자신을 혼내려는 걸까?
카밀루스는 홀로 향하는 계단에서 멀어져 다시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뒤에서 존재감 없이 서 있던 페드로와 에렌스트 경이 둘을 따라왔지만 카밀루스는 그들을 별 의식 하지 않고 제 방으로 향했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제가 깨어나기만을 벼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안겨 가는 동안 에렌스트 경에게 구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에 에렌스트 경이 움찔하다가 끼어들었다.
“대공 전하? 도련님 방은 저 방향입니다.”
얌전히 방 안으로 데려다 두지 않고 뭐 하냐는 일침이었으나 카밀루스가 옅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난 떠날 테니 잠시간의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군.”
“…….”
이온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카밀루스가 저를 위해서 모든 일을 미루어 두었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이해했다.
‘내일 나가는구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새삼,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럼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에렌스트 경을 가볍게 물리친 카밀루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단숨에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
이온을 얌전히 앉힌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카밀루스가 복도에서와 달리 조금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혼날 듯한 분위기에 이온이 눈을 굴리고 있으니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낮고 무거운 음성이었다.
“이온, 혹시 아닐 수도 있지만 너무 이상하게 듣지는 마.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네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깨달은 부분이니까.”
“뭐가?”
다만 조금 영문 모를 이야기라 이온이 살짝 눈썹을 들썩였다.
잠시 뒤 카밀루스에게서 이온으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시스템을 보나?”
“……!”
이온이 숨을 삼켰다.
대답하지는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카밀루스를 빤히 바라보자, 카밀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였군.”
“……설마 너도?”
이번에는 카밀루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온도 카밀루스도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주제로 대화를 끌어가기가 다소 버거웠다.
한참의 침묵 끝에 카밀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시스템이 너한테도 적용이 되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이게 뭔지 알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호한 탓에 카밀루스는 잠시 헤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아리송한 것들이었다.
“‘틈’에서 가져온 거야. 아니, 정확히는 그곳에서 나에게 부여한 거지.”
“‘틈’이라는 게…….”
카밀루스도 그 공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란 어려웠다.
그 공간은 이 세계와 함께 굴러가는 여러 세계선을 구분 짓는 경계선과 같은 곳이었다.
설마 차원 이동과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그가 믿는 건가 싶었지만, 카밀루스는 꽤 진지했다.
도저히 농담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그리고 그 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야. 시간을 뒤트는 마법을 쓰는 거.”
[시스템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온은 점점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고 말해 주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카밀루스가 어떤 마법을 썼는지는 이온도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제가 생각하는 것이 틀리지 않을 터였다. 감옥에서의 대화에서 카밀루스 역시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온은 이 비현실적인 것이 모두 현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았으나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자신이 ‘겪은’ 것이었으니까.
“내가 기억이 전부 돌아왔다고 했지?”
이온의 물음에 카밀루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마도 끝이 좋지 않았던 그때를, 카밀루스는 떠올리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온은 그 부분은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카밀루스는 그 한 번의 실패를 디딤돌 삼아서 전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려 두었다.
그것도 최상의 상태로.
이온은 그런 그가 고마웠고, 나아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진실은 알고 싶었다.
“혹시 나는 그때 죽었었어?”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로워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온의 예상보다는 훨씬 양호했다.
“그렇지는 않아. ……그 전에, 시전했으니까.”
“다행이다…….”
안도감이 밴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슬픔이 배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온은 그 표정을 보면서 8년 전, 카밀루스가 저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던 그때를 떠올렸다.
떨리는 손으로 저를 잡아 주었던 것도.
그때 이온은 눈앞의 소년이 대체 왜 그러는지 의아해했으나, 이제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을 탑에서 꺼내 준 구원자를 앞에 둔 감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잃을 뻔했던 사람이 되돌아왔다는 안도감.
그것이 그때 그 감정의 실체였을 터였다.
이온은 그간 카밀루스가 혼자 견뎌 왔을 지극한 초조감의 실체를 이제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고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난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어. 기억이 없는 내가 누군지 너무 혼란스러웠고.”
“이온…….”
처음 눈을 떴을 때 이온은 제가 다른 육신을 찾아 들어왔다고 생각했고, 최근까지도 그런 오해를 했었다.
물론 영혼이 옮겨 온 것은 맞았다.
미래에서, 과거로.
“네 사랑을 받을 이온 크레이거가, 내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확증해 줄 수 있어. 너는 그 사람이 맞아.”
“……그래.”
어쩐지 목이 메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이온이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결국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날 위해 희생을 했구나.”
“아니, 나는 내가 희생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해.”
단정적인 어투로 그렇게 반박해 오는 것에 이온이 카밀루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쓰게 웃는 카밀루스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