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돌아왔으니까 알 거야. 내가 얼마나 한심했었는지. 얼마나 나약했는지.”
이온은 기억 속에서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던 카밀루스를 떠올렸다.
지금에 빗대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네 존재가 날 일으켜 세워 줬다고. 덕분에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
“카밀루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반대로 이야기할게. 처음부터 끝까지 날 구원한 건 너였어, 이온.”
“…….”
담담한 고백이었지만, 어째서일까. 이온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을 향하던 눈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독백같이 들리기도 하는 카밀루스의 그 말에 이온의 양 뺨이 달아올랐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한참 됐지만 그와 이렇게 터놓고 말한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은 터라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한데 바뀐 화제에는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조금 달라졌다.
“그런데 고민이 한 가지 있어서, 이온.”
“어떤 고민?”
카밀루스는 약간 긴장한 기색이었다. 깍지 껴 모은 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만 봐도 그 부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우선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고…….”
저주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이나 납득할 이유이지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분명 불길함의 전조라고 느낄 것이었다.
여러 귀족들이나 일반 제국민들에게 알릴 핑계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인 만큼 일반을 상대할 때는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이온도 내내 고민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카밀루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곧장 알아들었다.
카밀루스가 이어 그들의 앞에 놓인 몇 가지 문제들을 손으로 꼽았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각자의 후계자인 셈인데 황실에서 키울지 아니면 공작가에서 키울지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 마지막으로.”
이온은 일단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듣다가 카밀루스가 마지막 이야기를 하기 전에 주저하는 것을 보며 눈썹을 살며시 들썩였다.
카밀루스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사실 몇 번이나 주저했던 질문이었으나,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왔으니 어쨌든 이온의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물론 그는 이온이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이온이 정신을 잃은 동안 바로 그에 대한 마음 정리를 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썼으니까.
카밀루스는 입 안이 바짝 마른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때 쓰는 것이구나 실감하며 이야기했다.
“네가…… 어떤 신분으로 살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듣고 싶은데, 혹시 생각해 둔 것 있어?”
이온은 질문을 받고 한참을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어떤 신분으로 살지.
한마디로 황실에 들어가서 살지, 아니면 공작가에 남을지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황실로 들어간다면 이온은 아마 지금과 같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기 어려울 터였다. 어쩌면 가지고 있는 것 중 몇 가지를 내려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또한 오브라이언 역사상 처음으로 남자 황후의 존재가 생겨날 테니 모양새가 약간 우스워질 수도 있을 터였다.
제국민들의 우상이 되어야 하는 자리에 자신이 앉을 때의 위화감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반면 공작가에 남을 때도 몇 가지를 포기해야 했다.
우선 둘 중 누군가가 아이를 포기해야 했다. 카밀루스가 데려가든 이온이 데려오든 사생아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당연히 아이가 그렇게 되는 건 카밀루스와 이온 모두 원하는 바가 아닐 테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었다.
둘의 아이가 정치적 의미를 가지지 않을 리 없다.
또한 카밀루스와 지금과 같이 자유롭게 만날 수 없을 터였다.
연인이 아닌 황실의 제일가는 충신으로 남아야 할 운명이었다.
앞으로 인간으로서 누릴 거의 모든 것을 가질 두 사람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대한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 모든 정치적인 요소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내가 가진 게 너무 많네. 그렇지?”
이 부분이 문제였다.
이온으로서는 둘 다 놓치기 싫다는 점.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할 거야.”
“그건 알아.”
이온은 어떤 상황에서든 카밀루스가 자신에게 최선의 대우를 생각해 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굳이 몇 가지를 더 확증해 주었다.
“네가 황실로 들어온다면……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지. 네가 나와 공식적으로 결혼해 황후가 되어 준다고 해도 난 네가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게 해 줄 거야.”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카밀루스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네가 내 말을 어느 정도로 믿을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모로 최초가 되겠네.”
황후 겸 공작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쓰겠다는 의미였다.
다만 크레이거 공작이면서 황후라니.
너무 절정의 권력이었다. 어쩌면 황제보다 더한 권력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온이 굉장히 탐욕스러운 성격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은 이온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황위에 오른 카밀루스가 우스워지는 일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대관식은 이틀 뒤에 있을 예정이야. 그 뒤에 공신들에 대한 처분을 결정해야 할 거고.”
“상벌은 대략적으로 정해 두긴 한 거겠지?”
“당연한 일이지.”
다행히 자신이 깨어나지 못한 동안 놀기만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온은 안심했다.
혹시나 카밀루스가 정말로 아무것도 결정 못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었다면 분명 실망했을 테니까.
제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카밀루스가 앞으로 훌륭하게 증명해 주기를, 이온은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나도 대답을 신중히 생각해 볼게.”
“이미 네 안에 정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카밀루스의 중얼거림에 이온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말대로 이온의 안에는 어느 정도 답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카밀루스가 이렇게 미리 제 결정에 대해서 물어봐 줄 줄은 몰랐던 터라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망상으로만 머물 때야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거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상당하니 말이다.
이온은 꿈꾸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어리석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래, 하지만 몇 가지 준비할 일이 있어서.”
“준비?”
정리가 아니라 준비라는 말에 카밀루스는 이온이 또 제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답을 내놓으리라는 점을 알아챘다.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엮인 당사자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지. 지금까지는 내 머릿속에서만 진행되던 일이니까.”
“어떤 것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되겠지.”
“안타깝지만 나도 지금까지 모든 걸 이루면서 살아온 건 아니야, 카밀루스. 생각보다 아버지의 고집이 세거든? 눈치는 빠르지, 근데 무시할 수도 없고.”
은근히 제 아버지가 매우 귀찮은 존재임을 언급하는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온이 어떤 의미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럼 네 답을 기대해도 될까? 결정하는 데는 얼마나 걸려?”
“이틀이면 충분하지. 내가 내리는 결정이 네 마음에 들지는 나도 확실히 말해 줄 수 없지만.”
뒤에 덧붙인 말은 불안감을 일으켰으나 이온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양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보다 욤뇽이는 어디 있는 거야? 이번 일의 최대 공신일 텐데?”
“그 녀석은 안쪽 방에서 자고 있을걸.”
카밀루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곧장 몸을 일으켰다.
커넥팅 도어를 열어 그의 말대로 안쪽 방을 들여다본 그가 얼마 안 가 잠에 취해 늘어져 있던 하얗고 말랑말랑한 생명체를 데리고 나왔다.
이온은 녀석이 입가에 쿠키 가루를 묻히고 있는 것을 보면서 푹 웃었다.
가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쿠키만 먹고 자는 녀석다운 모습이었다.
제 주인을 살리겠다고 온몸의 마나를 다 털어 낸 탓에성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작게 쪼그라든 욤뇽이를 카밀루스가 이온의 품에 안겼다.
“꾸우……?”
익숙한 품에 잠깐 눈을 떴다가 도로 눈꺼풀을 내려 버리는 녀석의 모습을 들여다보던 이온이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선 버니언이 성전의 복구를 지시했었는데, 중단시키는 않았겠지?”
“……일단은. 그 녀석의 어미가 거기 살고 싶어 하는 거 같길래.”
카밀루스가 알아본 바로, 황성의 그 위치는 나름대로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역 일부의 땅에서 끝없이 마나가 생성되어 올라오는 것이 확인된 것이었다.
오브라이언의 건국 당시 그곳에 성전을 세운 것은 나름대로의 안배에 의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온은 잘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로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납득시킬까 고민된다고 했지? 그건 그 성전을 이용하면 될 거야. 마침 우리에겐 이 아이도 있고 말이야.”
잠귀가 밝은 편은 아닌데 이온의 입에서 자신이 언급되자 거슬렸는지 욤뇽이가 품에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