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굳이 크레이거 공작한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카밀루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뭐, 그렇게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매달려서 그를 붙잡아야 할 이유는 없는 듯해.”
크레이거 공작은 아직도 약간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단 하나를 이끌 리더를 쉽게 정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검증된 사람이 많지도 않고.
그러나 결국은 앞으론 전부 카밀루스의 판단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 부분들이기도 해, 크레이거 공작은 결국 한발 물러났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보다 소공작, 이리 바쁜 때에 왜 찾아온 게냐?”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09)화
대관식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공작이 조금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이온은 갑자기 제 방문에까지 의심을 품는 크레이거 공작에게 침착하게 답했다.
“전하와 미리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던 게 있어서요.”
그 말과 동시에 욤뇽이가 제 얘기가 나올 것을 눈치챘는지 이온의 목깃 사이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꾸!”
“……!”
크레이거 공작은 작은 생명체가 나와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서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양손을 내밀고 욤뇽이를 제게로 불렀다.
“이리 오세요, 드래곤님.”
왜 주변의 나이 든 남자들은 전부 욤뇽이에게 존댓말을 하는 걸까…….
페드로도 그렇고, 크레이거 공작도 그렇고 욤뇽이를 심상치 않게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이온은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욤뇽이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라, 귀여워해 주는 크레이거 공작의 품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는 욤뇽이를 내버려 두고 카밀루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이온이 등장했을 때부터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카밀루스였다. 그 때문에 크레이거 공작도 남겨 둔 터라, 이온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온은 이전에 카밀루스가 했던 세 가지 질문을 떠올리며 우선 아직 상황을 잘 모를 크레이거 공작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지금 카밀루스와 저 사이에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요.”
“……설마 그걸 답변하러 온 게냐?”
“네, 그리고 아버지도 결론은 알고 계셔야 하겠죠.”
크레이거 공작의 팔 힘이 느슨해지자 욤뇽이가 앞의 탁자에 폴짝 뛰어내렸다.
이온은 녀석에게 살짝 웃어 주다가 카밀루스에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주었다.
“일단 제 배 속의 아이는, 당연히 저주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모두에게 밝힐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아직 태어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 데다, 그사이에 성전이 다시 세워질 테니…….”
“혹시 블랑셰의 축복으로 생겨났다는 쪽으로 가자는 거군.”
“그래, 어차피 소문을 내는 건 내 전문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아이의 존재를 밝히는 것도 성전의 개관식 때가 딱 좋겠어.”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거 공작은 아직 분위기 파악이 필요한 모양인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까지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범위이니 반박할 거리도 없기는 했다.
그러나 다음 말은 다르다.
이온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제가 내린 두 가지의 큰 결정에 대해서 두 사람에게 전했다.
“그리고 아이는 역시 황실의 아이가 되는 게 낫겠지.”
“이온.”
역시나 크레이거 공작이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아들이 낳은 아이라고 해도 본인의 손자인데 공작가를 잇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가 납득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이온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온은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주관이 있었다.
“이 아이는 태어난다면 카밀루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어요. 이 힘을 공작가에 남긴다면 황실과 크레이거가와의 균형이 깨질 겁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아이는 황실로 가야 해요.”
이온의 손이 배 위에 올려졌다. 약간 단단해진 배가 이제는 조금 부담스러워졌을 정도였다.
약한 제 몸에 뿌리내린 이 아이는 저와 달리 아주 강대한 존재였다.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일이 많이 있었는데 살아남은 것만 봐도 그랬다.
이 아이는 특별하다.
그렇기 때문에 크레이거 공작가에 남기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 요소들이 있었다. 나중에 분쟁을 남기느니 황실로 가는 게 맞았다.
아이를 보낸다고 하면 또 누군가는 크레이거 공작가가 만년 2인자를 자처하더니 또 아이까지 보낸다 어쩐다 말을 얹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주변의 눈치까지 챙기기에는 너무나 예민한 문제였다.
다만 카밀루스가 직접 아이를 황실에 내놓으라고 하기에는 분명 부담이 되었을 터.
이온은 차라리 제가 이 말을 꺼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견을 물어봐 준 카밀루스가 현명한 거다.
이온은 아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 카밀루스에게 먼저 물었다.
“카밀루스, 너도 동의하지?”
“……오히려 나는 감사해해야 하는 처지야. 네가 그렇게 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그리고 중요한 건 역시 마지막 질문에 대한 것이었다.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의 흥분을 막기 위해서 일단 상황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 말인데. 아버지, 제가 아이를 낳게 된 이상…… 몇 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크레이거 공작으로서는 평생 답변을 유보해 두고만 싶은 어떤 문제.
그것을 건드리리라는 것을 알아챈 공작이 미간을 구기는 모습에, 이온은 서둘러 카밀루스에게 비난의 화살이 가지 않도록 연막을 쳤다.
“제가 황실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문제 말이에요. 다행히도 카밀루스는 제 뜻을 존중하기로 했고, 저도 오랫동안 신중하게 생각한 것이니 아버지께서도 납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소공작…… 대공이 황위에 오르기로 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설마 그 시간 안에 전부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인 게냐?”
“아버지, 저는 대공을 황위에 올리겠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선택의 순간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
이온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다소간 가라앉았다.
크레이거 공작도, 카밀루스도 앞으로 나올 이온의 말 한마디에 황실과 크레이거 공작가의 처지가 매우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의 유일한 아들이고, 어렸을 때부터 내정되어 있던 후계자였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황위에 오르고, 이온의 배 속 아이가 무사히 다음 대를 이으려면 반드시 이온은 황실에 들어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제외하더라도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이 선택은 이온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카밀루스와 계속해서 함께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었다.
카밀루스는 이온과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이온이 두 어깨에 짊어진 것의 무게가 무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이온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었다.
황실에 들어오면 포기할 것이 많은 그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카밀루스는 저를 선택해 달라고 호소하기 어려웠다.
이온에게서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카밀루스는 마치 영겁의 시간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붉은 입술이 어떤 단어를 내뱉으려 작게 달싹거릴 때마다 괜히 제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잠시 뒤, 이온이 크게 한숨을 들이켠 뒤 카밀루스와 크레이거 공작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답을 내놓았다.
“에밀리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작해 주세요, 아버지.”
“뭐라고?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야!”
그리고 이온의 말에 공작이 곧바로 소리쳤다.
단 한 번도 이온 외에는 다른 후계를 생각해 본 적 없는 공작으로서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선언이었다.
“제국 최초로 남자 황후가 나오게 생겼는데 여자 공작이 나오지 못할 법은 없죠. 귀족이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고, 제국법 어디에도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요.”
“……소공작.”
“저는 에밀리가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그 아이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건 아버지께서 에밀리를 집에만 두었기 때문이에요. 더 자유로운 세상을 보여 주세요, 그럼 에밀리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그간 에밀리는 이온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집에만 갇혀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성격도 밝은 데다, 그녀에게도 크레이거 공작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분명 현명하게 모든 일을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헤맬 때는 남에게 도움을 받는 법을 알려 주면 되는 것이고, 이온도 에밀리가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잘되리라 믿고 있기에, 이온은 쉽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저는 황실로 들어가겠습니다.”
* * *
황제궁은 불타고 태후 자리는 공석이기 때문에 대관식은 카밀루스의 의사에 따라 기존과 다른 곳에서 진행되었다.
황성 내의 연회장에서 진행하기로 한 건데, 누가 이런 곳에서 대관식을 하느냐는 우려와 달리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는 넓은 연회장을 엄숙한 분위기로 꾸며 제법 구색을 갖추어 놓았다.
그리고 모든 문을 개방해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그렇지만 단 몇 개월 만에 황제가 바뀌는 이 상황에 모두들 아직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아니, 어수선한 건 버니언 때문일지도…….’
버니언은 오브라이언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제위에 있었던 황제로 기록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사실 황위에 있는 동안 이룬 것도 딱히 없는 데다 누군가의 인심을 얻기는커녕 잃기만 했으니, 훌륭한 황제 노릇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결국 아이오딘으로 쫓겨나기까지 했으니 그로서는 최악의 결말을 맞은 셈이다.
그러나 이런 날에 눈치 없이 쫓겨난 황제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없었다.
이온은 대관식이 이루어질 높은 단 위에 미리 올라가 있는 크레이거 공작을 확인하며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앞자리로 향했다.
카밀루스의 대관식이라니, 괜스레 제가 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니, 단순히 두근거림을 넘어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구역감마저 들었다.
그를 이 자리에 올리기까지 계획이나 행동을 하는 데는 거침없었는데, 막상 모든 것이 끝나는 오늘에야 이런 긴장감을 느끼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러나 이따 카밀루스가 걸어올 붉은 카펫을 깐 대관식장의 가운데 길을 내려다보며 이온은 바짝 말라 오는 입 안을 침으로 축였다.
한데 그런 그의 옆으로 걸어온 이가 있었다.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군요, 소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