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단 위에서 숨죽여 그를 지켜보고 있던 카밀루스와 눈길이 맞았다.
그럼에도 다음의 행동을 주저하고 있는 이온에게 문득 크레이거 공작이 다가왔다.
그는 먼저 아직 허공에 떠 있는 욤뇽이를 데려가 안고 이온에게 단 쪽을 가리켰다.
“시종장이 다음에 어떻게 할지 안내해 줄 테니 올라가려무나.”
자연스럽게 이 일이 이온의 몫임을 알리는 크레이거 공작의 발언에 이온이 반문했다.
“제가요……?”
“네가 받았으니 그게 나을 거 같구나. 이런 일은 상징성도 있는 법이야.”
이온은 그에 주변의 시선을 살폈다.
모두가 이온의 쪽을 바라보면서 그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기색을 보이는 중이었다.
순간적으로 이온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제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이 일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는 것이 명확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이온이 단 쪽으로 다가서자 시종장이 앞으로 나섰고, 시종들 중 누군가는 왕관과 레갈리아를 올려 둘 수 있도록 푹신한 받침대를 내밀었다.
이온은 그곳에 두 개의 성물을 내려놓은 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카밀루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온이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가만히 서 있는데, 카밀루스가 시종이 들고 있는 두 개의 성물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나의 머리에 쓰인 왕관과 손에 쥐어진 레갈리아의 모습과 똑같군.”
“…….”
이온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지그시 듣고만 있으니, 카밀루스가 미아블레 후작을 돌아보았다.
“미아블레 후작가는 이 오브라이언의 역사보다 더 긴 역사를 이어 온 가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려온 성물과 황실에서 만든 물건들의 모습이 같다는 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지. 그렇지 않나, 후작?”
다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미아블레 후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성실히 답했다.
“영명하신 폐하의 판단에 감히 말을 보태지 않겠습니다.”
후작은 대답을 보류했으나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들었을 터였다.
카밀루스와 후작이 하는 이야기는 곧 황실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 왕관과 레갈리아가 모방품이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선언이 끝나자 시종장이 카밀루스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고, 카밀루스는 직접 제 머리와 손에서 왕관과 레갈리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온을 다시 마주 보더니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엄숙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오브라이언의 위대한 수호자인 블랑셰의 앞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그것은 뒤에 있는 눈처럼 새하얀 드래곤을 향한 말임에도, 이온은 어쩐지 제 심장이 조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밀루스가 하는 행동에는 이온만이 아니라 모두를 당혹게 했다.
카밀루스가 몸을 낮추어 이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오브라이언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 된 카밀루스가 고작 공작가의 후계자 앞에서 몸을 낮추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이 불합리한 일임을 외치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성물을 받치고 있는 시종이 이온을 눈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 이온은 신성한 블랑셰의 대리자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온은 결국 아까 전 크레이거 공작이 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우선 왕관으로 손을 뻗었다.
오래된 물건인데도 녹 하나 슬지 않고 반짝거리는 왕관이 그의 두 손에 들렸다.
대관식장에 밝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반사해 은빛 몸체도, 그곳에 박힌 파란 보석도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렸다.
이온이 그것을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밀루스의 머리 위에 얹어 주었다.
크레이거 공작이 왕관을 올려 줄 때는 어쩐지 그저 그런 일처럼 느껴졌는데, 내려놓는 순간 손이 떨리도록 긴장이 되었다.
정말로 제 손으로, 그를 황위에 올렸다.
이온은 이 벅찬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숨을 참았다.
그렇게 아득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옆에서 시종이 채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공작, 레갈리아를 폐하께 건네십시오.”
그에 겨우 의식을 되찾은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레갈리아를 집어 카밀루스의 앞으로 내밀었다.
카밀루스는 그제야 눈을 들어 이온을 올려다보며 작은 레갈리아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짧은 인간들의 의식을 지켜보던 커다란 드래곤이 마침내 날개를 도로 펼쳐 하늘 위로 다시 날아올랐다.
동시에 카밀루스가 잡은 레갈리아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던지 카밀루스도 제 손에서 빛이 나는 레갈리아를 신기해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레갈리아에서 흘러나온 그 빛은 곧 대관식장을 빠져나가 하늘 위로 올라간 드래곤에게 닿았다.
그러자 호이이이 길게 우는 신비한 소리와 함께 황성 전체를 감쌀 만큼 옅은 빛이 흩어졌고, 대관식장 위에 희미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한, 오브라이언의 황성을 지켜 낼 새로운 결계의 마법진이었다.
오래된 전설로만 남아 있던 블랑셰가 현신하여 직접 내보인, 첫 번째 기적이었다.
* * *
대관식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 새하얀 드래곤이 나타나 황성 결계를 쳐 주는 모습을 본 귀족들은 흥분했고, 대관식에서 있었던 일은 제국민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새로운 황제가 신성한 블랑셰의 축복을 받았다.
게다가 어렸을 적에 제 아버지인 선황에게 학대를 받고 자랐던 사생아가 사실은 진짜 황자였고, 결국 황위까지 오른 카밀루스의 이야기는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황제파와 귀족파로 이분화되어 있던 귀족들까지도 저희들이 목격한 커다란 드래곤의 존재에 결국 카밀루스는 모두 인정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카밀루스가 황위에 올랐으니 이제 떠오른 새로운 걱정거리는 반려를 찾는 일뿐이었다.
며칠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지겹게 들었는지, 황실―그러니까 카밀루스는 귀족들에게 빠르게 초대장을 보냈다.
빠르게 보냈다고 해도 준비 기간만 한 달이 넘었으나 어쨌든.
그리고 내용인즉…….
“오빠 결혼하는 거야?”
“…….”
에밀리가 저에게도 온 초대장을 보면서 생긋생긋 웃었다.
이온이 공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내놓고 황실로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전혀 납득하지 못했던 크레이거 공작은 그럼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는, 답을 찾으시라는 말 한마디에 결국 고집을 꺾었다.
당연히 그걸 인정하기까지 수일이 걸렸으나 크레이거 공작가를 가장 우선시하는 그 역시 미래에 태어날 손자의 존재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정한 다음에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에밀리는 이온에게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겠어?〉
이온의 그런 물음에 명확히 답했다.
〈하고 싶어.〉
그 말을 기점으로 에밀리를 두고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이 시작되었다. 늦게 시작된 배움인 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시간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식사 때라 그나마 짬이 생긴 참이었다.
에밀리는 카밀루스가 보내온 초대장의 내용을 보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온에게 결혼하는 거냐는 장난스러운 물음을 건넸다.
황실에서 온 초대장에 적힌 글은 이러했다.
오브라이언을 지키는 수호자인 블랑셰를 기리는 성전이 모두 복구되었으니,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그 자리에서 황후궁의 주인을 밝히고 축복을 받고자 하니 황도의 모든 귀족들은 모이도록 하라.
밑에는 성전의 재개관식을 치르는 시일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야 이걸 보고도 이온과의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할 테지만 적어도 이온의 가족들은 아니었다.
에밀리의 물음에 이온은 먹던 음식이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얼굴을 붉혔다.
“……나도 모르지.”
“왜 몰라? 어제도 폐하를 뵙고 오지 않았어?”
바로 반박을 하는 에밀리를 살짝 흘기고 있으니 옆에서 크레이거 공작이 한마디 했다.
“그래서, 황실에는 언제쯤 들어가기로 한 게냐? 최근에 청혼서가 종종 들어오고 있는데 일일이 거절 핑계를 대기가 곤란하구나.”
“저한테요?”
이온은 그게 제 청혼서가 맞느냐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것도 모르냐며 옆에서 핀잔이 들려왔다.
“요즘 분위기 몰라? 밖에 나가면 다들 오빠랑 폐하 이야기밖에 안 한다고!”
“카밀루스는 그렇다고 쳐도 난 왜?”
이온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이온은 일부러 바깥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문 내부적으로 에밀리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자신이 대외적으로 나서는 것이 그렇게 모양새가 좋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으로 제 동생이 기존에 제가 해 왔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하기를,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하게 해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다들 알고 있는 게지. 이온 네가 지금의 폐하를 황위에 올려놨다는 걸 말이다.”
크레이거 공작이 대신 답해 오는 것에 이온은 어쩐지 먹고 있던 양상추가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최근 음식에서 조금만 비린내가 나도 구역감이 올라오는 터라 채식주의가 더 강해진 이온인데, 여기서 더 식사를 거를 수는 없었다.
“앞으로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은 안 할 거예요.”
“지금까지 실컷 발휘해 온 습관이 어디 가지는 않을 테지?”
“아버지…….”
이온니 난처해하며 공작을 부르자 그가 눈썹만 살짝 들썩였다.
그야 이온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공작은 그만큼 아들이 뒤에서 어떤 짓들을 해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솔친 후작과 바스커스 후작을 이간질하거나 버니언의 주변을 망쳐 놓은 일은 이온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야비해질 수 있는지 알려 주는 일화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