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13)화 (313/317)

아직 사람들은 그 실체를 모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온은 어쩐지 불편해지는 식사 자리를 서둘러 뜨기로 하고 급히 제 앞의 그릇을 비웠다.

그러고 식당을 나서자 늘 그렇듯 에렌스트 경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온은 2층으로 올라가며 그림자처럼 쫓아오는 에렌스트 경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말이 있으니 방까지 따라 들어와.”

“예, 도련님.”

방 안쪽의 집무실로 걸어가 탁자 앞에 앉을 때는 에렌스트 경의 부축을 받았다.

이온은 제 몸이 한결 무거워진 것을 느끼며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에렌스트 경에게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하는 표정이었으나 에렌스트 경은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잡았다.

“하실 말씀이 어떤 겁니까?”

“거창한 건 아니야, 보다시피 황실에서 초대장이 왔고…… 이 이후로 공작가를 떠날 예정이니까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이온의 말이 갑작스러웠던가.

충분히 예고된 일이었음에도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두 손을 꽉 쥐었다.

명백히 긴장감이 밴 그 모습에 이온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정확히는, 미안함을.

그렇지만 그의 거취를 정하지 않은 채 떠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둔 게 있어?”

“……아니요, 딱히. 그렇지만 도련님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온을 계속 따르겠다는 건 에렌스트 경으로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8년 넘게 따라오던 주인이었다. 기사로서 오로지 이온 하나만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그다.

하지만 에렌스트 경의 대답을 들은 이온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게 아닌 네 길을 찾는 건 생각해 본 적 없고?”

“도련님.”

이온의 말은 에렌스트 경을 떼어놓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에렌스트 경은 단번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제가 도련님께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 네 충성이 진심이라는 건 알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날 위해 일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 자리가 도련님의 옆은 아닌 거군요.”

“그래.”

에렌스트 경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이온은 시선을 피했다. 비겁한 건 알지만 이온으로서도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런 이온에게 에렌스트 경이 물었다.

“그럼 황실에서 도련님은 누가 지킵니까?”

이온은 그간 카밀루스와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눈 결과를 짧게 말해 주었다.

“페드로 경이.”

“……페드로 경은, 그래도 노아 기사단 단장 자리도 공석이니 그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요.”

이온도 에렌스트 경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카밀루스는 이미 이온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마음 정리를 해 둔 상태였다.

“카밀루스는 주변을 기존에 있던 본인의 사람들로만 채우는 걸 원하지 않아.”

특히나 노아 기사단은 황실을 수호하는 두 개의 기사단 중 좀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의 앞에 갑자기 제 사람을 들이밀면 아무도 따르지 않으리라는 게 카밀루스의 설명이었다.

이온도 카밀루스의 의견을 듣고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유를 듣고는 납득했다.

페드로도 다행히 자리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닌 터라 카밀루스의 그런 생각을 받아들였다.

“폐하의 의중은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그렇지만 호위 기사가 한 명만 필요하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 제 위에 누가 있든 상관없습니다. 도련님을 따라가게 해 주세요.”

“……알렉.”

“물론 전 크레이거 가문의 기사이죠. 그러니 도련님 개인을 따른다는 제 말이 불경하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에렌스트 경이 중간에 말을 흐렸다. 더는 뒤를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그를 보면서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말했잖아, 계속 날 위해 일해 주길 바란다고.”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에렌스트 경의 물음에 이온은 드디어 겨우 그에게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길드는 네가 이끌어 갔으면 해, 알렉.”

“예……?”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에렌스트 경이 떨어뜨렸던 고개를 도로 들어 올렸다.

그는 눈에 의문을 가득 채우며 물었다.

“황실로 들어가시더라도 같이하시는 데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없지. 하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일도 아니야.”

“그래서 전부 내려놓으시겠다고요……? 지금까지 도련님께서 쌓아 오신 것들을요?”

“글쎄? 나는 내려놓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소유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니까. 알렉, 네가 날 위해 열심히 일해 줄 거잖아.”

이온의 물음에 에렌스트 경은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의 눈빛에 약간의 원망마저 배었다.

“도련님께선 이미 제 미래에 대한 결론을 다 내려놓으셨군요.”

“미안해. 하지만 알렉, 이 또한 내가 널 아낀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줘.”

나직이 한숨 쉬는 소리를 내는 에렌스트 경에게 이온은 열심히 핑계를 덧붙였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건 한계가 너무 명확해. 너에게도 분명 야망이 있을 텐데.”

아니, 사실은 핑계가 아니었다.

이게 이온의 진심이기도 했다.

페드로는 카밀루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고, 이미 귀족 작위도 받았다.

그리고 수년간 미루어 놓았던 가족들과의 소소한 일상도 즐기기를 원했으니, 카밀루스가 준비해 둔 그 자리가 가장 적절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렌스트 경은 달랐다.

이제야 20대 후반인 그는 앞으로도 날개를 펼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또한 이온은 그간 그의 노력과 그에 따른 눈부신 성과를 봐 왔다.

길드의 운영도 사실상 에렌스트 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유능한 그를 일개 황실의 기사로 소모하기엔 아쉬웠다.

아마 에렌스트 경도 느끼고는 있을 터였다. 이는 제 인생에 주어진 더없는 기회라는 사실을.

그러나 한 발 앞에서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게 생각할 시간은 주시겠지요?”

이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네가 이 길을 선택할 거라고 믿지만 말이야, 알렉.”

단정적인 대꾸에 에렌스트 경이 다시금 불편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 문을 여닫는 소리를 들으며 이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빈방에 잠시간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실로 돌아갔다. 커넥팅 도어를 막 지나쳤을 때였다.

뒤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음성이 들려왔다.

“싫어할 거라고 했잖아, 내가.”

“……!”

이온은 순간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런 일은 간신히 막았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이온은 제 위로 그림자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떼었다.

이온은 제가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게 맞는가 의심하면서도 뒤의 사람에게 물었다.

“왜, 어떻게 왔어?”

그러자 단단한 팔이 이온의 어깨를 안아 왔다. 곧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쳐 오는 것에 이온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카밀루스였다.

그가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몰래 나왔지. 황성만 나오면 단숨에 올 수 있거든.”

“……이래도 돼?”

이온은 창밖을 확인하며 물었다. 아직 저녁놀이 남아 있는 시각이었다. 해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한창 바쁠 때일 터였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이온의 뺨에 짧게 키스하며 대답했다.

“겁 많은 시종장한테는 쪽지를 남겨 놨으니 곧 날 잡으러 오긴 할 거야.”

“……하.”

곧 이 저택이 뒤집힐 거라는 친절한 설명에 이온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에 든 의미를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카밀루스는 도무지 혼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초대장은 받았지?”

“보내겠다고 예고까지 하신 수고를 저버리지 않고 잘 받았지.”

“그날 정말로 우린 정말 부부가 되는 겁니까, 소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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