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잠시 후에 성전의 재개관식에서 있을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계단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에렌스트 경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가니 과연 이온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화려한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선 페드로를 발견한 이온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페드로!”
그러자 이온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페드로가 서둘러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소공작.”
이제는 후계자가 아니니 엄밀히 말해서 소공작이라 불려서는 안 되지만, 이온은 아무렴 어떠랴 싶어 미소만 지었다.
“페드로가 데리러 올 줄은 몰랐는데요.”
“폐하의 명으로 온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도 그렇네요.”
“자, 어서 타시지요.”
권유를 받은 이온이 크레이거 공작을 한 번 돌아보았다. 에밀리도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가도 된다는 의미로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페드로가 안내하는 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공작가의 마차는 아마 바로 뒤를 쫓아올 터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었으나, 이온은 다른 게 떠올라 페드로가 문을 닫기 전에 얼른 물었다.
“혹시 제 기사도 함께 타도 될까요?”
바로 출발할 생각에 문에서 물러나던 페드로가 이온의 질문에 에렌스트 경을 확인했다.
에렌스트 경도 이 부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으나 페드로의 손짓에 결국 안에 함께 올라탔다.
그가 맞은편에 앉고, 이온이 준비되었다는 의미로 마차 안쪽의 줄을 잡아당겨 종을 울리자 얼마 안 가 마차가 출발했다.
그와 함께 황실에서 신경 써서 만든 것이라 그런지 진동이 덜한 편안한 마차에 이온이 등을 기대었다.
에렌스트 경은 잠시 틈을 두고 이온의 기색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마차에 타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이전 내 제안에 대한 답은 생각해 두었나 해서. 어쨌든 내가 황실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야 하잖아.”
“이미 선택권이 저한테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은 안 했어. 단지 너도 같은 판단을 내릴 거라고 얘기했을 뿐이지.”
“…….”
항변을 하는 이온을 에렌스트 경이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민스러워하는 표정의 그의 말을 기다리다가, 결국 이온이 먼저 말을 이었다.
“결론은 어땠어, 내가 틀렸던 거야?”
“도련님은 틀리신 적의 거의 없으시지요.”
그 말은 에렌스트 경의 동의를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어딘가 원망이 밴 눈길로 이온을 보던 에렌스트 경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제가 원하는 답을 내놓은 그를 향해 이온이 조용히 입가를 휘어 보였다.
“그래, 너라면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어. 그게 날 위한 길이라는 걸.”
“칼을 드는 일로만 충성을 표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평생 기사로서 살아온 그에게는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일 터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온은 그저 그의 선택에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그런데 에렌스트 경이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저는 도련님을…… 계속해서 섬기고 싶습니다. 그러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해 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긴말하기를 선호하지 않는 에렌스트 경치고 머뭇거림이 길었다.
그는 두 손을 꽉 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이온을 마주 보았다.
“더 이상 황실의 정보는 수집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도련님도 약속해 주십시오. 황실로 들어가시더라도…… 가장 곤란하고 급할 땐 저를 찾아 주시겠다고요.”
그의 말에 이온은 눈웃음을 지었다.
잠시 장난기가 발동해 고개를 기울이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카밀루스도 제쳐 두고 널 먼저 찾아야 하는 거야?”
놀리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에렌스트 경이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겨우 한마디 더했다.
“……그분 다음으로.”
이온은 그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푹 흘리고는 기꺼이 그의 요청에 화답했다.
“약속할게. 그리고 착각하지는 마. 널 황실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너와 멀어지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야. 앞으로 알렉, 너와 난 더 전략적인 관계가 될 거야.”
“전략적이요…….”
별로 아름답지 못한 단어 선택이었던가. 에렌스트 경이 이온이 한 그 말을 곱씹으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러더라고. 지금까지 실컷 발휘해 온 습관이 어디 가겠냐고. 맞는 말이야, 황실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겠지. 무엇보다 아직 카밀루스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있을 테니 서서히 정리를 해야 하고 말이야. 그러려면 내가 쌓아 온 것들을 이용하는 편이 가장 손쉽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에렌스트 경은 이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 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저에게 집중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이온이 덧붙였다.
“하지만 황실에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는 것들이니 난감하니,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전부 맡기는 거야. 내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도련님.”
“이 정도면 답이 되었겠지? 네가 말한 모든 조건은 수용하겠어.”
대답을 들은 에렌스트 경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지만 아까와 같이 불만이 있는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온의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에 황실에 저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그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녹고 있음을 느꼈다.
얼마 안 가 에렌스트 경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 * *
“도착했습니다, 소공작.”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온과 에렌스트 경이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곧 열린 문으로 에렌스트 경이 먼저 내렸고, 그는 이온의 손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이 내민 손을 보고서 잠시 멈칫했다.
이것이 그가 기사로서 이온을 도와주는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그 점을 상기하니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졌으나 자신이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서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폐쇄 지역이라 줄을 쳐 놓았던 황성의 북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황실에서 보낸 초대장을 받고 저마다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황실의 마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이 누굴까, 혹시 황후가 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차의 입구 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온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이곳을 지켜보던 이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역시 폐하께서 크레이거 가문을 특별히 챙기신다더니 오늘도…….”
황제의 마음이 기울게 한 게 확실한 이온을 향한 은근한 부러움을 드러내거나.
“오늘 이 행사에서 황후가 누군지 밝히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하지만 듣자 하니 아직 폐하께 청혼서를 받은 가문이 어딘지 알려지지 않았다는데…….”
굳이 이런 때에 왜 이온을 황실 마차까지 대령하여 데려왔는지 의아해하거나.
이온은 그런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든 모두 무시한 채로 밖으로 나가 몸을 세웠다.
그러자 기존의 성전 터에 그대로 재건한 새로운 성전 건물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황실의 기록들을 참고해서 그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성전의 외관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상앗빛을 띠는 수수한 느낌의 건물.
하지만 신성한 동물을 섬기기 위해서 지은 그곳의 건물이 초라하다 비웃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외려 수수하기 때문에 더욱 경건해 보이는 그 건물의 모습을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나 성전 앞을 그레나 기사단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이온을 제외하고서는.
이온이 페드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오늘의 성전 개관식은 성전의 앞마당에서 진행되기로 하였으니 본래라면 이온 역시도 그 앞에 자리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오늘 성전의 출입을 허락받은 한 사람이 바로 이온이었다.
성전의 문이 도로 닫히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서 드디어 멀어진 이온이 페드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밀루스는 역시 마지막에 오겠죠?”
“예, 아직 폐하께서는 준비 중이실 겁니다.”
페드로의 대답에 이온이 싱긋 웃으며 잠깐 가까이 와 달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페드로가 이온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손으로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가라고, 이온에게 안내를 하는 와중이었다.
이온은 그 손짓을 따라 걸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폐하라고 부르기 안 어색하세요?”
넌지시 묻는 이온의 말에 페드로가 피식했다.
“원래 대공 전하라고 불렀으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소공작을 폐하로 부를 때는 어색할 거 같은데요.”
“아, 그건 생각 못 했네요…….”
이온이 난처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붙을 황후 호칭도 너무 어색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애써 당장의 일은 아니라며 외면했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니 이온의 표정이 살짝 불편해졌다.
그러는 사이 성전 안쪽의 넓은 방 앞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