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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17)화 (317/317)

수호자가 현신해 있으면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싶었는데, 커다란 문을 열자 그러한 고민을 무색하게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빛이 내리쬐는 높은 천장과 백여 명의 사람도 수용할 것 같은 넓은 안쪽, 마나가 솟는지 푸른색 빛의 물결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화이트 드래곤이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제 몸집의 백 배는 되어 보이는 어미 드래곤의 손가락 위에 누워서 자고 있는 욤뇽이도 보였다.

그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을 확인한 이온은 두 녀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오늘의 주역인 그들을 이대로 계속 재울 수는 없었다.

하여 안쪽으로 걸음을 들였다.

발소리가 집요하게 이어져 마침내 제 앞까지 다가오자 어미 드래곤이 살며시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곧 두꺼운 눈꺼풀 아래로 물빛 눈을 드러내고는, 이온에게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이온은 어색하게 오른손을 들고 흔들었다.

“잘 잤어?”

“끼이이이.”

이온이 묻는 말에 어미 드래곤이 그렇게 우니, 손가락 위에서 새근새근 자는 욤뇽이도 깨어나 눈을 말똥하게 떴다.

이렇게 마나가 가득한데도 작아진 이후로 아직 어린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녀석이 몸과는 비대칭하게 너무 작은 날개로 포르르 날아왔다.

그리고 안아 줄 걸 알고 이온에게 날아서 뛰어들었다.

“꾸, 꾸!”

제가 날다람쥐인 줄 아는 걸까?

날개를 펼치며 제 품에 푹 안겨 오는 녀석을 받아 내며 이온이 생각하던 무렵, 어쩐지 주변의 공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돌아섰다.

“카밀루스!”

곧 이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카밀루스가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선 그가 눈에 비쳤다.

황제가 된 이후로 이전처럼 드레스 셔츠만 입고 다니는 차림새는 사라졌으나, 오늘의 행사를 위해서 특히나 무거운 정복을 입은 그가 시종들을 이끌고 나타난 채였다.

이온이 반가운 마음에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카밀루스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며 먼저 말문을 텄다.

“이제 곧 시작할 시간이야, 이온.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온은 그 말에 제 앞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밀루스의 이 손을 잡으면 정말로 끝이었다. 더 이상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닌 황실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이 돌연 물밀듯이 제 안으로 밀려들어 와 이온의 가슴 안에 어떤 감개를 일으켰다.

“꾸?”

두 팔의 조임이 세진 것을 느낀 욤뇽이가 품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서 잡지 않고 뭐 하냐는 거였다.

그렇지만 이온은 카밀루스와의 단 몇 걸음을 좁히지 못해 그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카밀루스는 이 기묘한 거리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는지 짝을 찾지 못하는 손이 무안할 텐데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간단한 말도 함께였다.

“이온, 괜찮아. 이 손을 잡아도 소중한 사람들은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이온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불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린 그의 한마디였다.

그에 온갖 감정이 깃든 웃음이 이온의 입가에 나타났다.

“……그렇지?”

지금껏 저를 둘러싸 왔던 익숙함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그렇지만 지난 8년을 지배해 왔던 어둠에서 벗어나 이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온은 아직 불안감이 상존했으나 언제까지나, 평생 이 8년의 굴레를 쓴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가 노력해서 벗어난 불행이었다.

앞길이 어둡다면, 서로 손을 잡고 나가지 못한다면 이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였다.

단 한 번도 그런 미래를 그린 적은 없다.

또한 그들에게는 행복한 미래를 영위할 자격과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이온은 카밀루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커다란 손이 저를 단단히 잡아 오는 것을 느끼며 이온은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다정한 빛을 띤 파란 눈을 마주 보면서 이온은 생각했다.

일단 오늘의 계획은, 완벽하다고.

앞으로도 이렇게 완벽한 하루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신이 축복한 그들의 관계이니까.

* * *

〈허억, 헉…… 끄윽.〉

레이어먼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곧장 선선대 황제를 찾은 마리엘은 방심하고 있는 그를 마기에 잠식시켰다.

어차피 자신이 끌고 가 영원히 실험체로 쓸 것이기 때문에 약을 먹일까 말까 하는 가벼운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아 적당한 담소를 나누다가 제 몸을 변형해 제 몸에서 뻗어 나온 촉수로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황제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이었다.

그는 제 몸을 잠식해 나가는 마기와 최대한 싸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던 그가 변형된 손으로 마리엘의 발목을 붙잡았다.

〈너, 너, 어째서…….〉

그에 마리엘은 벌레처럼 기고 있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악마처럼 웃었다.

〈제 염원을 이루어 줄 더 적절한 사람을 찾았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폐하께서는 저와 같은 목표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같은 목표.

그랬다.

선선대 황제는 한때 타고난, 아주 천재적인 마법사였으나 언젠가 마법을 잃을 뻔했다.

간신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꿈꿨다.

그리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제 손자를 이용할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클로델 황가의 번영을 위하는 척하며 마리엘의 충성을 요구했다.

거기까지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마리엘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탐욕을 깨달았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다만 마리엘은 그가 얼마나 흥미로운 존재인지 좀 더 알고 싶었다. 인간의 이성을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있을 때.

하여 제 발목을 움켜쥔 마수의 손을 내려다보며 실시간으로 몸이 변형되어 가는 황제의 앞에 몸을 낮추었다.

〈그렇지만 궁금하네요. 제 호기심을 채워 주시면 마기에 더는 잠식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무, 무슨.〉

〈저 또한 몸에 마기가 가득 차 있는데 멀쩡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방법이 뭔지 궁금해지셨을 거 아니에요? 호기심을 하나씩 풀자는 것이지요.〉

물론 마리엘은 그런 거래 따위 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으나 곧 마물이 되어 갈 황제는 그것을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뭐, 뭐가 궁금한 게냐. 다, 다 말해 주겠다.〉

그가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며 마리엘은 차라리 진작 이런 식으로 협박할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했다.

그랬다면 더 빨리 그의 비밀에 대해 알 수 있었을 텐데.

〈제가 궁금한 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어떤 금지된 마법을 썼는지, 그리고 그 마법은 어떻게 쓰는 건지 알고 싶을 따름이니까요.〉

〈그, 그걸 알려 주면 되는 거냐? 조건이 그뿐이야?〉

황제는 제 심장을 물들이기 시작하는 마기를 느끼면서 공포로 눈을 흔들었다.

그는 제 몸이 전부 마기에 지배되기 전에 마리엘과 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예.〉

〈차원 이동과 회귀, 마법이다…….〉

〈두 개나?〉

마리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문하는 것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 회귀 마법은 실패했지만.〉

그의 말인즉 차원 이동 마법은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젊었을 적 그는 차원의 틈을 지나 실제로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곳에는 마법이 없었지만 대신 모든 산업이 눈이 부시도록 발전한 세계였다.

머리 위에는 고철로 만든 새가 날아다니고,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이 아닌 고철로 만든 어떤 똑똑한 존재의 도움을 받아 효율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곳에서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저 목격만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 황제는 차원의 틈에서 제 몸에 흐르는 마나의 절반 이상과 다른 차원에서 얻은 ‘경험’을 빼앗겼다.

황제의 경험을 빨아 먹은 차원의 틈은 기묘한 방식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님, ‘틈’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실’과 ‘틈’의 규칙은 동일하지 않으나 시간과 죽음에 관련한 규칙은 유지됩니다.]

……와 같이.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플레이어의 마나의 흔적을 ‘틈’에 보관합니다.]

하여 두 번째로 시도한 것이 회귀 마법이었다. 실제로 회귀를 하고 싶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리하면 차원의 틈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짓이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보관되어 있던 제 마나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묘한 믿음이 있었기에 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회귀 마법은 실패했고, 그는 틈을 다시 열지 못했다.

차원의 틈이라거나 경험을 빼앗겼다거나, 게다가 공간이 말을 한다는 헛소리를 듣던 마리엘은 혹시 제가 놀림을 받는 건가 싶어졌으나 일단 되물었다.

〈왜 실패하셨지요? 마법 이론이 잘못됐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빠르게 답했다.

〈이론은 완벽했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어.〉

결국 차원의 틈이라는 걸 열 마나가 부족했다는 의미였다. 마법은 아예 시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 그 이론이라는 건 어디에 있습니까? 기록은 해 두셨겠지요?〉

〈……〉

그런데 마리엘의 이 질문을 받고 나서야 황제는 마리엘이 거짓을 말할 가능성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거래를 걸어왔다.

〈내 몸 안의 마기부터…… 가라앉혀 주면 알려 주겠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결국 깨닫지 못할 줄 알았지만 아쉽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엘의 호기심은 어차피 나중에 풀면 되는 문제였다.

어딘가에 보관이 되어 있을 그것을 찾으면 된다. 숨겼다고 해도 위치는 황성 안쪽일 터이고, 마리엘은 황성 어디든 몰래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약속과 달리 그만 몸을 일으키며 마물화되어 가는 황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제가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당신은 아주 좋은 실험체가 되실 터인데.〉

그렇게 마리엘은 선선대 황제를 제 소유의 괴물로 만들었다.

금지된 마법을 쓴 위대한 이 마법사는 마물이 된 다음에도 간혹 의식을 차려 인간처럼 눈물을 흘렸다.

마리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금지된 마법을 써서 잃었다고 하는 그의 마나가 어딘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말하는 차원의 틈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대략 25년 뒤, 선선대 황제가 남긴 그 마법 중 하나는 결국 카밀루스의 손에 들어왔다.

그것을 접한 카밀루스는 탑에 갇힌 제 구원자를 위해서 제 모든 힘을 쏟아부어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틈’은 카밀루스를 그대로 현실로 되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시스템을 가동했다.

어째서 그런 자비를 베풀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카밀루스는 추측할 뿐이었다.

‘틈’으로 와 한 첫마디를 들은 신이 저를 가엽게 여겨 기적을 안배한 것이라고.

〈제발, 이온을 살려 줘.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으니까…… 그 아이만큼이라도 과거로 되돌려 줘.〉

그때 틈은 무어라 답했던가.

[…….]

[…….]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목표 달성 확률과 ‘이온 제멜 크레이거’의 최종 사망 확률의 연동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빛이 있는 세계로 돌아와, 작아진 제 몸을 확인했다.

[‘틈’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현실’과 ‘틈’의 규칙은 동일하지 않으나 시간과 죽음에 관련한 규칙은 유지됩니다.]

그때부터 시스템은 카밀루스의 눈앞을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 ‘이온 제멜 크레이거’에게 적용할 적절한 시스템을 찾는 중입니다.]

[매칭에 성공하였습니다. 현실과 동기화 중…….]

[동기화를 완료하였습니다.]

[오픈 월드 게임 ‘영원의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 오픈 월드를 이용하는 유저에게는 아래와 같은 기본 사항이 주어지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태 이상: 적의. 불특정 다수에 의해 사망할 확률이 있음.]

[상태 이상: 호의. 불특정 다수의 도움을 받을 확률이 있음.]

[상태 이상: 금어(禁語). 특정 단어 및 문장을 말할 수 없음.]

[본 오픈 월드 게임 ‘영원의 제국’에서 살아남을 플레이어님의 즐거운 생활을 기원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두 번째 8년이 시작되었다.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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