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가게 아들내미 -3
"잘 봐."
녀석은 달걀 하나는 족히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남겨둔 허술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적당히 그을린 녀석의 팔뚝을 따라 큼지막한 주먹위로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이 닿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주먹 안의 그 작은 공간은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 버렸고,
그 찰나의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단단하게 쥔 녀석의 주먹 위로 굵은 혈관들이 비죽비죽 솟아나 있었다.
".....이렇게."
단단하기가 바위 같을 녀석의 주먹을 멀거니 바라보던 나는,
알 수 없는 녀석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었다.
녀석도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녀석은 낮고 음습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널 갖고 싶다고. 이렇게 꽈악....."
솟아 오른 핏줄이, 이제는 꿈틀거리기까지 했다.
저러다 터지지는 않을까.
우습게도 나는 진심으로 녀석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녀석의 주먹이 바람을 탄 듯 순식간에 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알아듣겠어? 김주영, 널 이렇게 갖고 싶다고, 이렇게!!"
라며 녀석은 바위 같은 주먹을 삿대질하듯 움직이며
그렇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이야! 이렇게! 이렇게!!!"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녀석의 고함 소리.
콧잔등 위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가는 녀석의 주먹.
온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와중에도,
눈동자만은 잘도 굴러 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사시가 되어버린 시야 안으로 여러 개의 주먹이 흔들거렸다.
"갖고 싶어! 널 갖고 싶다고!! 이렇게!!!!!"
어지럽다.
토할 것 같다.
울리는 고함 소리에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만, 제발........그만.
"...........그만 해!!!!!!!!!"
헉................헉헉헉........
꿈이었다. 천만다행히도 꿈이었다.
뜨인 눈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훤한 아침이었고,
갖고 싶다고 발악을 하던 녀석의 괴성 대신 들려오는 것은,
당장 일어나지 못해! 라고 문밖에서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왜 그런 꿈을 꾸었냐는 것이다.
비록, 새벽 등교길마다 녀석의 삐걱거리는 자전거 소리에 시달리고,
틈만 나면 이쁘다는 둥, 귀엽다는 둥, 심지어는 곱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한 달 여를 보내던 시기이긴 했지만, 그 날 꾸었던 그 꿈과는 그닥 맥이
닿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얼굴을 들이밀고
징그러울 정도로 주위를 맴돌던 녀석은, 단 한 번도 내게 강요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끈질긴 느끼함과 닭살로 못살게 굴긴 했어도,
그 꿈속에서처럼, 윽박을 질러가며 나를 몰아 붙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결국은 녀석에게 먹혀버리고 말, 내 팔자(!)에 대한
경고, 내지는 예지몽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가끔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여튼, 그 날 나는, 감히 어머니께 [그만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어머니 손에 들려있던 쇠국자에 오지게 얻어 터졌다.....
과일 가게 아들내미-3
"타."
"싫어."
아....오늘도 어김없군...웃기지도 않은 이 똑같은 실랑이 레파토리는,
이젠 정말 지겹다고....
"........타라고."
"........싫다니까."
참자 참아. 조금만 참으면 버스 정류장이야. 고지가 멀지 않았다고, 김주영....
"후욱----"
짧게 끊기는 한 숨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끼익-거리던 자전거 바퀴 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허해진 오른쪽 시야를 힐끔 곁눈질을 해보니, 녀석이 없었다.
없으면 없으려니 하고 가던 길이나 마저 갈 것이지, 호기심은 뭐 같이 많은
김주영, 결국 뒤돌아보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버스에 올라타는
내 뒤꽁무니만 멀거니 바라보도록 끈질기게 쫓아오던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버스 정류장을 저 멀리 남겨두고 자전거를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지은 죄-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도 있고 해서, 나는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녀석을 돌아보았다.
"웬만하면 좀 타지 그래?"
잔뜩 굳어버린 얼굴 위로 녀석의 눈만이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제 딴에는 절대 겁먹지 않게 하자는 의도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싸하고 올라타는 소름은 어쩔 수 없다.
".....버스 탈꺼야....그러니까...가..."
라며, 나는 비록 개미같은 목소리였을지라도, 나름대로 내 의지를 피력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당시 눈에 뭐가 씌인 녀석에게는 그것조차도 앙증맞기 짝이 없는
반항 혹은 애교로 보였다. -라고, 후에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
"김주영."
녀석이 자전거의 핸들을 고쳐 잡으며 나를 불렀다.
힘겨운(?)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 녀석의 얼굴은 이제 마음대로
구겨져 있었다.
"정말 안 타?"
"...응...."
"왜?"
"....."
"이유를 말해 봐. 왜 안 타는데?"
바보 아니야, 이거.
내가 그 뻐걱거리는 자전거 뒷자리로 올라타는 순간,
그건 네 (사귀자는) 헛소리에 맞장구치는 꼴 밖에 안 될 거라는 걸,
너라는 녀석은 정녕 모르겠다는 말이냐? 으으음??
"....그냥...싫어..."
아아, 이게 아닌데....생각했던 대로 다 불어버리면 될 것을,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굴고 있는거냐 김주영.
"그냥? 그냥 싫어? 그냥같은 소리하지 말고,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 봐."
그래, 말 해, 말하라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라잖아.
나는 뒤에 앉아 네 허리를 잡을 생각도 없고,
너랑 변태 짝짝꿍 놀이를 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고, 얼른 말 해!!
"나..나는......나는 그러니까....뒷자리가 싫은거야!"
..............오, 마이 갓.........이게 아니잖아....
언어여....너는 어찌하여 앞뒤 다 짤라먹어도 말이 되고야 마는 것인가....
"뒷자리가...싫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라아........
라고 아무리 수습을 하려해도 때는 이미 늦었으니.
녀석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숨까지 내 쉬며 자전거를 내 쪽으로 밀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니가 앞에 타. 자식, 저도 사내라고 뒷자리는 싫은 모양이네.
알았다 임마, 니가 운전해라. 대신 무겁다고 구박이나 하지 마라."
얼떨결에 떠맡겨진 자전거 핸들을 어정쩡하게 붙잡고 선 채,
나는 뒷자리에 풀썩 올라타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긴 다리로 중심을 잡고 선 녀석은 나를 향해 어서 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참나....지 멋대로다 이 녀석은...맹구를 닮은
내 혀만큼이나 말이다.......
그 날 아침, 나는 산만한 녀석을 뒤에 태우고 버스로 15분이면 족할 길을
무려 30분이나 걸려 학교에 도착했다. 어찌나 무겁던지, 적어도 열 번은 더
쉬었을 것이다. 교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녀석에게 자전거를 돌려주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무지하게 후들거렸다....
녀석의 자전거 공세(?)가 시작된 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그렇게 녀석과 첫 등교를 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느낌은, 뒤에서 내 허리를 잡던 녀석의 손길이다.
어울리지 않게 수줍을 타는지 조심스럽게 교복 끝을 잡은 녀석의 손은
조금 떨렸던 것도 같다. 그리고 가끔씩 서늘한 뒷통수로 녀석의 짧고 얕은
한숨이 느껴지기도 했다. 같잖아서....참....
다음 날, 어김없이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은,
아직도 후들거리는 내 걸음걸이를 보자 피식-웃어 보이며,
고맙게도(!) 뒷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다리 근육
덕에 나는 정확히 일주일을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등뒤에 붙어 통학해야 했고,
그리고 다리가 온전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그 다음 날부터는,
습관처럼 녀석의 자전거에 올라타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첫판(?)부터 아주 맥없이 녀석에게 지고 만 것이다.....
녀석의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가면서,
나는 녀석의 심산이야 어찌됐든 그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차비가 굳었다. 중학교 시절, 우유값 떼어먹었다가 뒤지게 얻어터진 후로,
감히 어머니 주머니에는 손 댈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뭔가 굉장한 금고를 터는
기분마저 들기도 했다. 학생 버스비라고 해 봐야 껌 한 통 사먹으면 끝장 날 액수이긴
했지만, 그 껌 한 통 값도 며칠 모이면 꽤 쏠쏠한 금액이 되었으니, 사나흘 모인 돈으로
하루만에 학교 매점에 앉아 포식-기껏해야 컵라면에 단팥빵이 전부이긴 했지만-을
하곤 했다. 그 당시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꽤 한 영악했다는 사실에
가끔씩 우쭐해지기도 한다.(우쭐할 꺼리가 워낙에 없다보니, 이러고 살고 있다...)
여하간에, 녀석은 말없이 자전거에 올라 타주는 내가 만족스러워서 웃고,
나는 모이는 차비에 흐믓해져서 웃으며, 그렇게 근 보름을 동상이몽에
빠져 있던 중........
"너, 돌았지?"
우리 누나다. 무거운 책가방에 눌린 채 꽉 묶인 운동화 끈을 풀고 있는 내게,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나 돌았냐다. 내가 뭘? 하는 표정으로 거실로 올라서자,
누나는 대답해 보라는 표정으로 내 길을 막아섰다.
"........왜 그래..?"
"너, 돌았냐고."
"무슨 소리야...더워 죽겠는데....비켜.."
라며, 슬그머니 옆으로 빠져 나가려는데 이 여인네, 고 앙증맞게 생긴 손으로
어깨를 툭 쳐가며 다시 나를 붙든다.
"넌, 돌았어. 분명해."
"내가 뭘!!"
아아, 짜증난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 일 투성이구만, 왜 누나까지 설치고 그래...
"다 봤어."
"뭘 봤는데?"
"그 곰이랑 자전거 타는 거."
아, 그래? 봤어? 그래, 봤구나............가 아니라!
뭐? 봤다고? 어..어떻게..??
"미친거 아니야? 어떻게 그 자식이랑 다닐 생각을 해? 앙?
어떻게 이 누님께서 혐오해 마지않는 새끼랑 히히덕 거릴 생각을 하냐고!!"
누나는 말을 하면서 더 분이 솟는지 쿵쿵 발까지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움찔움찔 어깨를 들썩였다.
겁나게 무섭다, 소리 지르는 우리 누나 얼굴은.
"그..그게...하..학교가 같은 방향이어서...그래서.."
"시끄러. 그게 변명꺼리가 된다고 생각해?"
"그..그래도.."
"다시 묻는다. 된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시덥잖은 변명은 당장 집어치우고,
도리질까지 쳐가며 누나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나, 누나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니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웬수놈이랑 붙어 다닐 수가 있어, 앙?
너 미쳤지? 맞지? 미쳤지??"
라며 코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무시무시한 오라를 내뿜는 누나를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보니 어느 새 맨발로 현관 바닥 위에 서 있었다.
아...어머니는 대체 어딜 가신걸까.......
"김주영."
"으응..."
"난 그 곰의 옷자락과 스쳤을 너의 모든 것이 혐오스러운 사람이야.
끔찍하다고. 알아들어?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해!"
쿵!
이게 무슨 소리냐고? 우리 누나 알밤 만한 주먹이 신발장 내려치는 소리다.
드디어 실성을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쿵!
"다시는!"
쿵!
"그 자식이랑!"
쿵!
"다니지 마!"
쿵!
"알았어?"
"응, 알았어!"
나는 또 다시 올라가는 누나의 주먹을 두 손으로 매달리다시피 붙잡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누나는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주먹을 제 자리로 내려놓았다.
"두고 보겠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으름장을 놓은 누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주먹에
입김을 후우-하고 불더니 쌩하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현관 바닥에 얼어붙어 있던 나는, 때늦게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시는 어머니 덕분에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도시락 통 내 놓고 들어가라."
어머니는 벙쪄 있는 내 얼굴을 보시고도, 니가 언제는 안 그랬냐는 듯,
어제와 변함 없는 멘트를 남기시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도시락 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그러면 안 되는거였다.
녀석은 누나의 적(우습군)이다. 그리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녀석과 상종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 주먹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말이다....
그래, 바로 그거다!
내가 왜 여적지 그 생각을 못한거지?
최산들, 난 너랑 다니면 안 돼.
왜냐고? 그건 말이지.
"누나가 싫어해...."
아니, 아니야, 이런 표정은 별로야. 마치 로미오와 가슴 아프게 헤어지는
줄리엣 표정 같잖아? 그럼, 이건 어떨까?
"우리 누나가 너랑 다니지 말래."
아...이것도 아니야. 이건 꼭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하는,
초등학생 꼬마 같잖아....
토요일 이른 아침, 단정하게 차려 입은 교복 위로 불쑥 솟은 내 얼굴이
마치 스티커 사진이라도 찍는 양,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오늘은 녀석에게 이별을 고하는 날이다. 그것은 즉,
아주 즐거운 날이라는 뜻이다. 으하하하!!
.........하고 웃을 때가 아니다. 아직, 적당한 표정을 찾지 못하지 않았는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표정, 이건 결코 내 의지가 아니니 더 이상 내게
따지지 말라는 표정, 그 표정이 안 나온다. 역시 난 연기로 밥 벌어먹고
살 생각은 일찌감치 그만 두는 게 좋겠다.
"안녕."
결국,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벙한 얼굴로 녀석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녀석은 그런 내 얼굴에 대고 속 편하게 안녕하냐고 묻고 있다.
"으응..."
언제나처럼 이렇다 할 인사 없이 녀석 앞에 선 나는, 어떤 표정이든 상관없으니
누나의 뜻을 전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번쩍....아니, 실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뭔가 시원한 것이 내 눈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시원하다 못해,
썰렁하게 밀려버린...녀석의 머리통이었다.
"어...머리..."
어찌나 살벌하게 밀렸던지 나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어설픈 손가락질로
녀석의 머리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녀석은 손으로 그 썰렁한 머리통을 쓱쓱
문질러가며 피식 웃었다. 피식-웃는 그 얼굴이 또 가관이다. 오른쪽 뺨이
한 눈에 알아보도록 부어있었고, 입술도 터졌는지 검붉은 피딱지가 간당간당 붙어 있었다.
"....싸웠냐...?"
나는 처음의 내 용건은 싸그리 잊어버린 채 녀석의 얼굴과 머리통만 번갈아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사람 하나 땅에 묻고 돌아왔을 법한 모양새다.
역시.......아주 잘 어울린다.
"하하....흉하지?"
응, 흉해. 라고 대답하려는 입을 얼른 막아버렸다. 상처 주지 말자. 아니, 상처받지 말자.
난 좀 더 살고 싶다고....
"요즘 지각 좀 했더니, 어제 담임이 불러내더라고. 그래서 좀 맞아주고,
바리깡으로 밀린 머리는 그냥 다 밀어버렸지. 많이...흉하냐..?"
피딱지 앉은 입술을 힘들게 비틀며 웃는 녀석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각을 해서 맞았단다. 그래서 저렇게 뺨이 붓고 머리도 밀린 거란다.
바보가 아닌 이상, 녀석이 왜 지각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정 반대의 거리를 아침마다 오고가니 늦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니가 자초한 일이니 지각을 하건 결석을 하건 그건
니 일이야.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미안해서 기분 나빴고,
미안해하고 있는 내 자신은 더욱 기분 나빴다.
"뭐해, 빨리 타."
찝찝한 기분으로 서 있는 나를 두고 먼저 자전거로 올라 탄 녀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녀석 앞에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나는
녀석이 시키는 대로 자전거 뒷자리로 올라탔다.
하지만, 그 날은 조금 달랐다.
그 날 만큼은, 녀석이 무서워서, 혹은 언제나 형세를 역전시켜 버리는
내 망발이 두려워서 입을 다문 것이 아니다.
부어오른 뺨과 썰렁하게 밀린 머리통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의 그 얼굴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녀석을 위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언제 말해도 말하게 될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 날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교문을 멀리 두고 자전거에서 내려서자, 녀석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매고 있던 책가방을 내려 그 안을 뒤적이더니,
작고 까만 봉지를 꺼내 들었다.
"자, 이거 가져가서 먹어. 포도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또 받아라 말아라 따위의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몇 송이가 들었는지 묵직한 느낌이
손안을 가득 채웠다.
"...고마워.."
우물쭈물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피식-하는 싱거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전거 페달 위로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내일, 우리 집에 올래?"
그렇게 묻는 녀석의 표정이 너무나 태연해서 나는 자칫하면, 응 그래, 라고
대답해 버릴 뻔했다. 나는 달싹거리던 입을 얼른 다물어 버리고, 대답 없이
땅바닥만 내려보고 서 있었다. 안 가겠다는 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일은 일요일, 즉 최산들이가 가게 일로 바쁜 일요일이란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녀석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일주일 중 유일한
날이라는 뜻이다. 그런 황금 같은 휴일에, 내가 미쳤다고 내 발로 널 찾아가겠냐....
라고 부르짖던 뇌구조가 갑자기 휙 사고회로를 바꿔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자, 그래 가자. 가서 딱 부러지게 말하고 오자. 이 말도 안 되는
찝찝함을 오늘 밤 안으로 씻어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는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되는거지.
누나가 너 싫대!!
............아, 이게 아닌가.........뭐 여튼.
"기다린다, 와라."
라며 힘차게 페달을 밟고 돌아서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끈적끈적에 붙어있던 찝찝함이 배로 불어나는 것 같았다.
손에 들린 포도 봉지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 날의 그 감정은, 나로서는 참 낯설고 기묘한 감정이었다.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은 답답하고 심란한 감정.
세상을 조금 더 살아본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부담]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늦은 아침, 어머니의 잔소리에 억지로 뜬눈을 부벼가며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늦게 잠이 든 탓에 약간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가 다시 떼었다.
껌뻑껌뻑 거리던 두 눈이 문득 뭔가를 상기해 낸 듯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오늘 녀석의 집에 가야했다.
바로 오늘, 나는 녀석과 끝장을 내러 가야하는 것이다.
........라고는 했지만, 역시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가게로 가는 길 내내, 나는 꼭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적당히 피하면 저도 알아서 떨어지지 않을까.
하아........알고 있다.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최산들은 그런 녀석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의 키워드는 바로 '말'이다.
말로 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알아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단호한 표정에, 확고한 음성으로 듣지 않는 이상은, 저 좋을대로 생각하는 것이,
최산들같이 단순한 인간들의 특징이다. 어리버리한 나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몰래 훔쳐 본 누나 일기장에 그렇게 써 있었거든....
다 왔다. 녀석의 가게 앞이다. 무더운 여름의 한 낮, 텅 빈 가게 안에는
먼지 낀 선풍기만이 덜덜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해 보았다. 손님도 아닌 것이 [계세요?]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산들아~]라고 부르는 건 때려 죽여도 못하겠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헛기침이다.
"산들아! 최산들!!"
헉.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지막지한 굉음(?)에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목소리가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을 뿐 그때와 별 다르지 않은 상황에,
그때도 살아서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두 다리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러자 곧, 가게 저 안쪽으로 작게 열려 있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중얼중얼 거리며 걸어나왔다.
"이 놈의 새끼가 가게 비워놓고 어딜 간 거야? 망할 놈의 새끼."
라며 바지춤을 툭툭 털며 나오시는 그 아주머니는, 한 눈에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말투가 그 누군가와 아주 닮아있었다.
낮은 어조에 조금은 느릿하면서도 여유 있는 어투.
닮았다. 아주, 똑같다.
"뭐 사러왔어, 학생?"
아주머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두툼한
손으로 몇 번 툭툭 쳐가며 멀거니 서 있는 나를 힐끗 돌아보셨다.
놀랍게도 몇 대 얻어터진 선풍기는 마치 겁먹은 어린아이 소리 죽여 울 듯,
매우 조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녀석도 저렇게 맞으며 자랐을까.
그래서 그렇게 비정상적인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뭐 사러 온 거 아니야?"
엉뚱하게도 녀석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상상하며 멀거니 서 있던 내게,
이상한 녀석 다 보겠군하는 눈으로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하셨다.
"아......저.....산들이...."
"친구냐?"
"예...? 아......예..아...안녕하세요..."
무뚝뚝하기가 대쪽같은 아주머니를 향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때늦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주 잠깐동안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시더니, 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새끼 지금 어디 나간 모양이다. 나중에 와라."
사족 하나 없이 딸랑 그 말씀만 남기신 아주머니는 아까 나왔던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셨다. 주인 없는 가게에 덩그라니 남겨진
나는 잠시 벙찐 표정으로 서 있다가 굉장한 허탈감에 빠져 발길을 돌렸다.
뭐냐 최산들. 내가 오늘 얼마나 단단히 마음먹고 왔는데, 또 하루를
혼자 낑낑대면서 넘겨야 된다는 말이냐.........하아....
"어라."
나는 내 쉬던 한숨을 단숨에 들이켰다. 가게를 나와 서 너 걸음이나 떼었을까.
녀석이 그 앞에서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라는 아주 싱거운 감탄사와 함께.
"왔네?"
라며 녀석이 씨익-웃었다. 올 줄 알았어, 하는 표정이다.
슬그머니 약이 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펑크 날 줄 알았던 기회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조금만 더 참자. 그리고 마지막 한방으로 날려 버리는거야. 아주 멋지잖아, 안 그래?
으쓱으쓱.
"뭐해, 들어가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것도 모자라서 늴리리까지 불고 섰던 나는 녀석의 나른한
재촉에 흠칫 놀라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내 산만함에 나도 정신이 없다.
"어디 갔다 와!!"
먼저 들어간 녀석을 따라 들어서기도 전에 가게 안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 다시 나오셨는지 녀석의 어머니는 가게 안 마루에 걸터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는 녀석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계셨다.
"도장 갔다왔어. 아까 말했는데 못 들었어?"
녀석은 그 고막 터질 것 같은 소리에도 아랑 곳 않고 태연하게 들고 있던
까만 옷 꾸러미를 흔들어 보였다. 도복인 것 같았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더 이상 소리지르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옆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봉지 두 개를 녀석에게 내미셨다.
"배달이나 갔다와. 희선이 아줌마네 집이다."
앞에 놓인 봉지더미를 잠시 내려다 본 녀석은 나를 한번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녀석의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친구 왔는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아주머니 역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
모전자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자간이다.
"알았어 알았어. 갔다 올게."
라며 녀석이 졌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자, 아주머니는 그제야 내가
다시 돌아왔음을 눈치 채셨는지 내게 말씀을 붙이셨다.
"더운데 저 새끼 따라다니지 말고 윗방에 올라가 있어라."
역시나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무뚝뚝한 말씀이었지만,
[나중에 와라]보다는 좀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올라가 있어라. 금방 갔다 올테니까."
"으응.....그래..."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하자,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아주머니는 아까 그 문안으로, 녀석은 봉지를 들고 가게 밖으로,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또 다시 덩그라니 남겨진 나는,
그 몇 분간의 숨통이 조일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내가 왜 여기에 왔던가를 잠시 잊은 채 윗방으로 연결된
계단을 하나 둘 올라섰다.
텅............
말 그대로 녀석의 방은 터엉 비어있었다. 그 흔한 옷장 하나 없다.
사실 그 방이 녀석의 방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방 한 구석에 꾸겨진 채 쳐 박혀 있는 녀석의 낯익은
책가방과 벽에 걸린 커다란 교복을 보아하니 녀석이 쓰는 방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 하나 더 있긴 하다. 녀석이 덮고 자는 얇은 이불 하나. 베게는? 없다.
낮은 천장의 길다란 방.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넓어 보이는 녀석의 방.
그 흔한 앉은뱅이 책상 하나 없는 썰렁한 그 방이 그나마 방 같이 보였던 것은,
가게문의 위치와 반대편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이었다. 창이 어찌나 큰지,
창 밖으로 보이는 작고 큰 주택들이 마치 동네 하나를 그대로 옮겨놓은 커다란
그림처럼 보였다. 커튼도 없어서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방안으로 굴러들어
온 것처럼 아주 뜨겁고 더웠다. 나는 조심스레 창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선심 쓰듯 살짝 살갗을 스치고 지나간다.
태양은 뜨거웠지만, 시원하게 트인 그 창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내 방은 창도 작은데다가 책꽂이로 반쯤 가려 놓은 상태라 창문이라기보다는
환풍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는 그 창문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가만히 창가에 붙어 서서 바깥을 구경하고 있자니,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어깨를 빳빳히 세우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곧 문이 열렸고 그 사이로 녀석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이거 먹어라."
아주머니는 창가에 달싹 붙어있는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시더니,
들고 있던 커다란 유리 그릇을 문 앞에 내려 놓으셨다.
화채였다.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보기만 해도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수박 화채.
"잘 먹겠습니다...."
가지고 들어가서 먹는 걸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은 절대 꼼짝도
안 할 것 같이 서 계시던 아주머니는, 주춤거리며 그것을 들어 안으로
옮기자 그제야 걸음을 옮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고 난 수박이야."
아, 예에........
곧 다시 문이 닫히고 아주머니가 계단을 내려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난 뒤에야 나는 힘들어갔던 어깨를 풀고
유리 그릇 안에 꽂혀 있던 숟가락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동동 떠다니는 얼음을 저어내자 빨간 수박 덩어리들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것들 중 가장 먹음직스러운 것 하나를 숟가락에 얹어 입안에 넣자,
달콤한 과즙이 메마른 입안을 기분 좋게 적셔 주었다.
아....살 것 같다.....
"덥지? 어? 화채네?"
헉, 켁켁...켁켁켁......
갑작스러운 녀석의 등장에 나는 삼키던 과즙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애꿎은 기도만 고생을 시키고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사래가 들렸는지,
녀석이 올라오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화채와 사랑에 빠졌던 내가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켁켁....켁..."
"야, 괜찮냐?"
"켁......으응...켁...."
눈물까지 고여가며 기침을 하자 녀석은 저까지 인상을 구겨가며
나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민망하다, 진짜.....
"우리 엄마가 갖다 준거냐?"
"으응...켁....."
"재고 난 거래지?"
"어...? 으응...."
"늘 저렇다니까."
라며 피식-웃는 녀석의 얼굴이 왠지 기분 좋아 보였다.
"친구들 올 때마다 그래. 멀쩡한 수박 깨면서도 꼭 재고 났다고 그러더라.
우리 엄마지만, 참 재밌는 사람이야."
그래......그런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기침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기침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은
아직 원상복귀가 안 되 있었던 모양이다. 녀석이 안 해도 좋을 말을, 기어이
하고 만다.
"얼굴이 빨간 게 꼭 수박 같다. 귀여워."
...............귀가 썩을 것 같다.
수박 맛이 확 달아난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마주 앉은
녀석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녀석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예의 상으로라도 더 먹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저 혼자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남은 숟가락은 그대로 버려 두고 내가 쓰던 숟가락으로 말이다.
상관하지 말자. 일일이 신경 쓰기도 이젠 지쳤다.
나는 후루룩 쩝쩝대며 열심히 먹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커다란
창가로 다시 붙어 섰다. 바깥을 내다보는 척 서 있었지만, 사실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가 막막했다.
제대로 정리해서 말하지 않으면 또 어떤 망발을 쏟아낼지 모르는 것이
내 특기라, 나는 뜨거운 태양이 그대로 쏟아지는 아래에 서서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다.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싫어.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걸까.
"저기 저 나무, 보이냐?"
불쑥 눈앞으로 튀어나온 녀석의 굵은 팔뚝에 나는 호흡이 일시정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값비싼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람 놀래키는데 한 재주 하는 녀석이다....
"안 보여?"
".......어디..?"
나는 녀석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눈을 찌푸려가며 찾아보았다.
나무를 보라는데, 저 널리고 깔린 수많은 나무들 중 도대체 어떤
나무를 보라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저기, 꼭대기만 살짝 보이는 나무 말이야."
라며 내 시선에서 바라보기 위해 은근히 얼굴을 붙어오는 녀석을
피해 나는 슬쩍 몸을 뺐다. 녀석이 다시 묻는다.
"....보여?"
"으응....보여..."
일단 보인다고 해 두자. 자꾸 안 보인다고 하면 답답해서 그 나무를
직접 뽑아다가 보여줄지도 모른다....
"저거 니네 집 감나무야."
"어........?"
"니네 집에 있는 감나무 꼭대기라고. 잘 봐, 맞지?"
그제야 녀석이 가리키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겐 다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아 잘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녀석과 우리 집 사이의 약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그 나무는 확실히 우리 집 감나무가 맞았다.
종이 좋다고 아버지께 칭찬 받던 우리 집 감나무도 여기서 보니, 별거 아니다.
게다가 꼭대기만 겨우 보일 정도였으니 가까이 보이는
크고 무성한 나무들에 비해 초라하기가 짝이 없었다.
"사실, 이 방은 내 방이 아니야. 그냥 비어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됐지. 이 방 창문이 너희 집 쪽이라는 걸.
게다가 운도 좋게 감나무 꼭대기도 보이잖아. 그래서 방을 옮겼어.
원래는 아래층 가게방에서 잤거든."
말을 마친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운 듯, 녀석은
씨익 웃으며 등을 돌려 창가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는 여전히 창 밖을
향해 서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와 줘서 고맙다."
고개를 돌려 녀석을 올려다봤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이 진심을 담고 있었다.
진심을 담아, 내게 고마워 하고 있었다. 뭔가가 내 안에서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때까지 내가 녀석을 향해 쌓고있었던
벽 한 모퉁이가 무너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진심은 사람을 불가항력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에 미숙했던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무너지는 그 벽이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나...갈게."
나는 누가 쫓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방문을 열고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녀석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잖이 당황해하며 나를 쫓아 나왔다.
"왜 벌써 가. 좀 더 있다 가."
"아..아니...가야 돼.."
잘만 들어가던 운동화는 오늘따라 왜 이리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다.
꾸겨진 뒷 부분이 펴지지가 않아 나는 식은땀이 운동화 코 위로 톡 떨어지는
것이 보이도록 몸을 굽혀 그것을 폈다. 너무, 덥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아.......그러고 보니, 잊은 것이 있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온 목적.
해야 할 말, 해야만 하는 말. 그것을 빼 놓고 갈 뻔했다. 나는 바보다.
"저기....내일부터는......"
일단 입은 열었다. 입을 열었으니, 말은 맺어야겠지...
"내일부터 뭐?"
"그러니까...내일부터는...."
"음."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자....."
나는, 바보에다 천치다. 틀림없다.....
정신 없이 뛰다보니, 어느 새 우리 집 대문 앞이었다.
굳게 닫힌 대문에 두 손으로 기댄 채 턱까지 차 오르는 숨을 삭히고 있던
그 순간에도 정신이 없기는 매 한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또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변함 없이 녀석과 함께 등교를 했다. 늘 그랬듯, 변변한 인사말도 없이 만나,
변변한 이야기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역시나 변변한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나 눈을 피하기 위해 옮긴 약속 장소와,
이제는 다른 의미로 복잡해 진 내 머리를 제외하고는,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벽 한 모퉁이가 무너졌다고 해서 그 전체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완전히 철거되지 않는 이상, 여전히 벽이라는 이름은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벽은 여전히 [넘어오지 마]의 상징적인 표시가 되는 것이다.
.........따위가 다 뭐냐. 집어치우라고 김주영. 벽이 멀쩡하게 버티고
서 있던 때조차도 녀석은 언제나 그 벽 위에 서 있었어. 언제든, 준비만 되면
이 쪽으로 넘어 올 태세로 말이야. 그런데, 그런 최산들이가 내 허물어진
모퉁이를 보지 못하겠어?
"구경하러 와라."
토요일 저녁,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나를 불러낸 녀석은 검은 색 종이 한 장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이것 봐. 내 말이 맞잖아.......
녀석의 얼굴은 분명히 허물어진 모퉁이를 넘어서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보면 안다. 넌 당연히 와야 해, 라는 표정, 저 뻔뻔스러운 표정을.....
"중요한 시합이야. 이걸로 대학 갈꺼거든."
녀석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나는 종이 위에 써 있는 글씨를 읽어보았다.
흐린 대문 앞 작은 백열구 밑으로 보이는 깨알같은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사단법인 대한 합기도협회 주최 제 23회 전국 합기도 대회]
뭔지는 몰라도 합기도와 관련된 일인가보다. 문득 녀석의 도복이 떠올랐다.
그때는 무심코 보고 지나쳐서 몰랐지만, 알고 보니 합기도 도복이었다.
녀석의 취미, 아니 말하는 것을 보니 녀석의 특기인 모양이긴 하지만,
사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봐라. 녀석은 저 덩치에,
저 표정 없는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무기가 된다. 술에 취했다거나,
삶에 이렇다 할 애착이 없지 않는 한은 실수로라도 어깨조차 부딪히고
싶지 않은 외모를 가진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왜 굳이 돈 버리고 시간 버려가며
그런 것을 배우려고 하는지,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뭐 좋다. 녀석이 합기도를 하건 태권도를 하건 그건 내 상관할 바 아니다.
그걸로 대학을 간다고 하니 이왕이면 잘 싸워서 이기면 좋겠지.
하지만, 내가 왜 거길 가야 하는거지? 도대체, 왜?
"올꺼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댄다면 간다.
니가 아니라,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
"시합장소가 이 근처야. 찾기 어려울 테니까 같이 가자.
내일 아침 8시에 데리러 올게. 그럼 난 간다."
라고 다다다 말해버리더니, 정말 쏜살같이 가 버렸다.
어둑한 골목 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결심해 버렸다. 가지 않을 생각이다. 벽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고, 다시 쌓으려면
얼마든지 다시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다.
허물어진 벽도, 존재하는 이상은, 여전히 벽이다.
"야, 일어나 봐."
누나 목소리다. 꿈인가 보다. 누나가 내 방에 들어오다니 말도 안 된다.
결벽증까지(?) 가지고 있는 우리 누나는 절대 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분명히 꿈이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쁜 꿈.....
"야! 일어나 보라고!!"
헉......이렇게 사운드 빵빵한 꿈은 또 처음이다....가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현실이었다.
"우웅....왜 그래 아침부터...."
"좋은 말로 할 때 눈떠."
"왜."
눈이 절로 번쩍 뜨인다. 살벌한 목소리만큼 내려다보는 그 눈도 어찌나
살벌하던지 나는 발딱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 말씀하십시오 누님.
"밖에 누가 와 있는 줄 알아?"
"......누가....왔는데....?"
슬쩍 시계를 보았다. 아침 7시 40분. 알만하다.
당연히 나는 그 누구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안다고 하면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어제는 누나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녀석이 우리 집까지 찾아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적당히 입을 다물어줘야 서로가 편하다.
"그 자식이 와 있어. 그 곰새끼 말이야. 우리 집 앞마당 공기가
오염되고 있다고!!"
누나는 으르렁 거리 듯 그렇게 말하며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나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자기 표정이 그 보다 배로 더 끔찍하다는 것을....
"걔..걔가 왜....?"
"글세, 알 수 없지. 너도 몰라?"
"으응....몰라.."
"정말 몰라?"
"응, 정말."
누나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흥, 뭣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실컷 기다려 보라지.
엄마 아빠도 아직 주무시겠다 아무리 기다려도 들여보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초인종을 누르면 어쩌지...?"
순간 누나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미처 그건 생각 못한 모양이었다.
저렇다니까......달리 한 핏줄이겠어......쯧쯧...
"서...설마 누르기야 하겠어 뭐.....오호호호...."
기어이 실성을 한 모양이로군.....
누나는 그렇게 겁이 잔뜩 먹은 웃음소리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은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을 걸.....누나도 세상에 무서운 게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누나가 나가고 난 뒤, 나는 다시 침대 위로 누워 버렸다.
그리고 얇은 모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당겼다.
도복을 들고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을 녀석이 자꾸 떠올랐지만,
나는 도리질까지 쳐가며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나는 나간다고 한 적이 없다. 녀석 마음대로 생각한거다.
기다리는 녀석이 잘못이다. 잘못은, 녀석이 한거다.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웬일인지 늦잠을 주무신 어머니 덕분에,
나는 아주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 깨어보니 벌써 오전 11시.
시합이 시작하고도 한 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나가 대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당연히 녀석은 없었다. 다시 문을 닫았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일 수 도 있었다.
다 저물어 가는 저녁, 내가 '그것'만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
요즘 누나가 이상해졌다.
물론 누나가 이상한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요즘 누나의 괴기함에는 그 어떤 특별함(?)이 있다.
언제나 히스테리와 살기로 중무장되어 있던 얼굴이
봄날 개나리 노란색처럼 붕 떠서 샐샐 실웃음이나 흘리고 다닌다거나,
또는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때조차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거나,
더 나아가 머리 스타일이 일주일 동안 무려 세 번이 바뀐다거나...
아무튼, 여러 가지로 사람 겁주면서, 때때로 더 이상은 혈연의 정으로도
버틸 수 없다는 모진 생각마저 들게 하고 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누나의 눈빛이다.
느끼는 대로 말하자면, 백치 아다다 뺨치게 멍한 눈빛이고,
조금 미화해서 말해 주자면, 꿈을 꾸는 사춘기 소녀의 눈빛이라고나 할까...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이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누나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저녁 무렵,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등뒤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계시던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듣게 되었다.
"니 누나가 연애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게 됨과 동시에 속으로 '아하!'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랬었군. 그래서 그렇게 표류하는 먼지처럼 온 집안을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군....
......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문득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헉.....설마....!!
나는 들고 있던 물컵을 요란하게 개수대안으로 밀어넣고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거울 앞으로 찰싹 들러붙어 18년 동안 수도 없이 봐왔던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말똥말똥하니 적당한 크기의 눈 두 개,
양끝으로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
전체적으로 어딘가 약간 긴장되어 보이는 상기된 표정.
음, 좋아!
난 여전히 건재해!!
연애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누나처럼 헤벌레 애벌레하고 다니는 건 아니라고!
하하하하!!............아...??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돌아서던 발길을 돌려
다시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러나 조금 전 보다
더욱 유심히 거울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 좋아, 다 좋다고.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 헌데 말이야...
.....나 원래 이렇게 생겼었던가.......??
얼떨결에(아주 얼떨결에) 녀석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지
한달 쯤 되어가던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저녁,
나는 나도 모르게 변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감정이라는 것에 서툴렀던 그 어린 시절의 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녀석에게 적응하지 못한 채 언제나 허둥대었고,
그래서 만날 때마다 늘 티격태격, 아웅다웅 싸워댔지만,
그러는 사이 나는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몇 프로 부족해 보이던 멍한 눈은 또렷한 초점을 가지게 되었고,
언제나 일자를 그리던 입술조차도 표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요즘의 누나 못지 않게 무방비 상태였던 얼굴 표정 또한
예전에는 없었던 뭔가,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팽팽해 져 있었다.
사랑이란, 사람을 변화시킨다.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또 때로는.....기타 등등으로...
(나는 바보도 현자도 아닌지라, 기타 등등 항목에 집어넣기로 했다.)
나는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누나의 '그'를 생각했다.
스스로 인생의 셔터를 끌어내리는 그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괜찮겠지 싶었다.
나 역시 스스로 셔터를 끌어내린 사람이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니까.
변해 버린 내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