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은 확실히 컸다. 태종이네 집 전체를 합한 것에 두 배만 했다. 하긴, 태종이 집이 워낙에 좁은 것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기가 막히게 넓고 좋은 욕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석현이는 매너 있게 내 옷을 벗겨주고 거기다 의자까지 챙겨서 놓아주었다. 삐그덕거리는 허리를 노인네마냥 두드려가면서 앉아 콧구멍에 손가락을 꼽았다. 일주일 간 묵혀놨더니 아주 푸짐하게 여물어져 있다.
손가락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알이 꽉 찬 콧속 때문에 기분이 좋아 실실 쪼개면서 내용물을 빼내고 있으니 한참 목욕준비를 하며 내 몸을 위아래 관찰하던 석현이가 인상을 썼다. 다리를 떠는 것까진 좋다고 쪼개면서 보다가 내가 손가락을 코 안으로 꼽는 것에서부터 얼굴이 팍 구겨진다.
거기다 감기 때문에 그것의 색깔은 형광 초록색이었다. 손가락에 꽂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을 하던 석현이는 그 뒤로 누렇고 질척한 뭔가가 쭉 딸려 나오는 것을 보더니 입을 악 다문다.
“오, 왕건이네.”
마땅히 둘 데가 없는 왕건이를 바닥에 삭삭 바르고 다시 그 손가락을 코에 꽂자 다른 쪽 팔을 석현이가 잡는다. 지가 태종이라도 되는 줄 안다.
“자, 잠깐, 따라와 봐. 저기 세면대 있으니까 청소는 저기서…….”
코에 손을 꽂은 채로 거기까지 끌려가서 마저 청소를 하고 그 동안 바닥을 샤워기로 훔치는 석현이는 큰 한숨소리를 냈다. 그래도 태종이처럼 귓방망이를 때리지 않으니 안심 된다. 기분 좋게 청소를 마치고 물로 훔친 다음 다시 의자 쪽으로 가자 석현이는 아까처럼 웃으면서 내게 앉으라고 권한다.
일단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있으니 알아서 물을 뿌려준다. 여기, 저기, 가랑이까지 시원하게 씻겨주는 손놀림에 어깨춤을 춰가며 덩실거렸다. 태종이보다 훨씬 약한 손 힘 때문이다. 아주 부드럽고 느린 동작으로 여기저기를 주물러가며 씻겨준다.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로 꼼꼼하게 문질러주기도 한다. 저번에 태종이가 나를 바닥에 눕혀놓고 벅벅 씻겼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손놀림이다. 아,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오한이 인다. 내가 물건도 아니고 왜 그렇게 벅벅 닦는 거야?
거품 칠을 가득 하면서 점점 시원해지는 기분에 절로 콧노래가 나오자 갑자기 석현이가 또 인상을 구기면서 나를 본다. 아, 사람들은 꼭 내가 콧노래를 부르면 저런 표정을 짓더라.
“겨우 분위기 다 잡아 놨는데 거기서 깨냐?”
“뭘.”
“아, 돌겠네. 아주, 아까 그 똥냄새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어.”
“뭐가.”
“여기 만지고 있는데 갑자기 도라지 타령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도라지 노래 좋아.”
“하…….”
허벅지 안쪽을 열심히 주무르던 석현이는 결국 허공에다가 거품을 털고 내 앞에 마주 앉아서 고개만 팍 숙이고 있다. 이상한 놈이네, 왜 도라지를 싫어하지?
혹시나 해서 무궁화를 부르자 이번엔 나한테 그 거품을 턴다.
“씨발, 도라지나 무궁화나! 지금 나랑 장난해?”
“왜 그래, 무궁화 꽃 이뻐. 벌레가 많이 껴서 그렇지.”
“어우, 돌겠다. 혹시 지금 분위기 파악 안 되어서 그런 거야?”
“아, 알았다, 알았다.”
“뭘 알아?”
머리를 쥐어뜯던 석현이가 한숨을 동반한 물음을 던졌다. 왠지 석현이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것이 조금 미안했던 나는 아주 간만에 환하게 웃으며 답을 알아냈다는 기쁨에 심지어 안 내던 웃음소리도 냈다. 평소에 거의 비웃느라고 의도적으로 내긴 하지만 지금처럼 기뻐서 저절로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내 웃음소리를 듣고 조금 얼굴이 풀렸다가 기어이 덩달아 웃음 짓는 석현이는 내 볼을 건드리면서 좋아한다. 심지어 내 볼을 꼬집기도 하며 ‘으이그’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알았어? 하하하, 이 둔팅이.”
“어, 신나는 거 불러달라는 거지? 쾌지나칭칭나네…….”
“씨발, 좀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결국 태종이한테서처럼 귓방망이 얻어맞고 뻗어버렸다. 이상할 정도로 태종이 손보다 더 맵게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자 식식거리는 얼굴로 한 번 더 손을 치켜드는 게 보인다. 멍청하게 그 부분을 보고 있으니 석현이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제 얼굴을 갈아엎었다.
“뽀뽀야, 넌 이제 내 개니까 말 안 들을 때마다 맞을 거야, 알았지? 계속 말 안 들으면 혼나.”
평소에 그렇게까지 떠 본적 없을 정도로 의욕이 없는 내가 눈을 크게 뜨면서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분명 난 그 전까지만 해도 석현이가 아주 좋은 놈이고 나를 제 강아지로 여긴다고 해도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나를 개처럼 여긴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의욕이 없는 나마저도 배신감 느끼게 한다. 그래도 태종이는 이 정도까지 힘을 줘서 나를 때린 적이 없다.
발로 차도 조금 따끔할 정도로 살살 치는 식이고 귓방망이도 소리만 세게 나게 해서 겁만 줬을 뿐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빴지만 지금처럼 거지같진 않았다.
기분이 더러워서 몸에 샤워기로 대충 둘러 거품기를 없애고 그대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석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리 와.”
“싫어.”
“셋 셀 동안 와라.”
“나 안 해.”
“안 오면 더 맞으니까 오라고.”
“혼자 해.”
뒤도 안 돌아보고 손잡이를 돌리자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물이 가득한 욕실에서 넘어지지도 않고 잘도 달리는 게 신기해서 막 돌아보려고 하는 동시에 나를 냅다 껴안는다.
“에이, 알았어, 알았어. 왜, 때려서 삐쳤어? 그러게 맞을 짓을 왜 해, 얌전히 있었으면 이렇게 안 맞잖아.”
“아, 나 간다고!”
“알았다니까 어딜 가, 목욕하자, 목욕.”
“간다고, 좀 놔!”
“아, 뭘 어디를 가! 그러지 말고 마저 목욕 하자.”
“아, 혼자 해. 나 갈 거야.”
“그러니까 뭐, 어딜!”
“태종이한테!”
“태종이는 또 누군데?”
“내 주인!”
‘이었으면 하는…….’을 빼놓고 간결하게 말했다. 두 눈이 동그래진 석현이는 꽤 웃긴 얼굴로 멍청하게 나를 바라본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 이름이 태종이가 아니라 종태고 별명이 태종이라는 부분을 빼먹고 말 안 해서 그런가, 참 여러 가지로 복잡한 표정이다. 태종이라니, 이름이 좀 위대하긴 하다.
턱까지 벌벌 떨면서 쫄아 붙은 석현이는 내 팔을 되게 아프게 잡았다. 멍들 것 같이 아파서 뿌리치려고 했더니 못 뿌리치게 마구 흔들어서 몸을 못 가누게 한다. 무언의 경고인 것 같다. 덕분에 봉산탈춤 추듯 몸이 흔들려서 넘어질 뻔했다.
“이거, 순진한 척 하더니 완전 걸레였구만?”
걸레란 말에 충격 받았지만 반박은 못 하겠다. 내가 좀 안 씻긴 하지. 맞는 말이라 더 슬퍼진다.
“인정할 테니까 놔, 좀. 태종이한테 갈 거야.”
“누구 마음대로?”
오늘 한 끼도 안 먹은 새끼가 손힘은 오지게 강하다. 아파서 아, 아 거리는 나를 굳이 또 끌고 가서 바닥에다 내팽개친다. 석현이도 내 머리가 돌인 걸 알고 막 다루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 다음에 냅다 내 입에 제 입술을 문대고 내 고추를 주무른다. 놀라서 펄쩍 뛰어 올라 석현이 머리를 무릎으로 갈긴 다음 당장에 욕실을 달려 나왔다. 변태처럼 어딜 만져, 석현이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변태다! 아까 아침에도 내 거기를 쥐고 자더니, 또 잡으려고 한다!
욕실에서 튀어나가 거실 쪽으로 보이는 곳으로 한참 달리니 소파에 앉아서 뭘 마시던 남자가 놀라서 나를 본다. 나라도 알몸으로 뛰쳐나온 남자는 별로 반갑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무조건 그 남자한테 달려들어 팔을 잡았다. 잘 보니 면접 때 보고 게임하다가도 봤던 그 어두침침하게 생긴 남자다. 펑펑 울면서 매달리는 나를 이상하게 내려다본다.
“으, 으흐으으으……. 석현이가 나 두들겨 패고 내 그시기를 막……. 나 보내줘, 보내줘! 집에 갈 거야!”
“뭐야, 이석현은 어디 갔고?”
“몰라, 이 씨, 내 그시기……. 내 그시기가 뭔 죄라고 자꾸……. 으흐으으으…….”
이젠 대놓고 통곡하는 나를 보고도 가만히 있기만 하는 남자가 야속하다. 그렇다고 무슨 자세나 표정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계속 그 똑같은 표정 그대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목석같은 얼굴로 날 보고 있다.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괜히 더 서럽다. 나만 보일 거 다 보인다는 치사한 감정까지 생긴다.
남자는 잠깐 주변을 보다가 뭘 집어 와서 내 얼굴에 문댄다. 숨이 막혀서 고개를 빼려고 하는데도 굳이 따라와 힘을 줘서 한참 얼굴에 문댄 다음 뗀다. 겨우 막혔던 숨을 몰아쉬면서 본 그것은 쿠션이었다. 지금 쿠션으로 내 얼굴을 닦아준 거다.
그리고 난 뒤 내 뒤 쪽에다 대고 말을 한다.
“이석현.”
아, 드디어 날 따라 나온 모양이다. 용기를 내서 돌아본 거기에는 가운까지 걸치고 나한테 얻어맞은 머리를 쥔 채 서 있는 석현이의 모습이 보인다. 나를 보고는 어, 하다가 남자를 보고는 조금 놀란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아, 이 사람 목소리가 원래 낮았기 때문에 화내니까 더 무섭다. 석현이보다 바로 옆에서 듣는 내가 더 쫄아서 나오려고 했더니 내 팔을 붙잡아서 제 옆에 앉혔다. 아니, 난 지금 석현이보다 당신이 더 무서워요.
“우리가 니 장단에 맞춰주면서 내건 조건 기억 안 나?”
“아니, 그게…….”
“비인간적인 변태 짓 끊으면 애완인 하나 선물해준다고, 분명히 말했어.”
“어, 어.”
“넌 순수하게 귀여워만 하겠다고 각서까지 썼지?”
“마, 맞지.”
“그러니까…….”
남자가 아직도 멈추지 않는 딸꾹질 때문에 아리는 갈빗대를 노인네처럼 문지르고 있는 나를 한번 돌아봤다.
“어긴 만큼 대가를 치러야지.”
“자, 잠깐만, 형! 뭐 하려고?”
“개는 오늘 내 방에서 재운다.”
“뭐야, 그러는 게 어디 있어! 내 거잖아!”
“시끄러.”
“형, 형 게이 아니잖아, 그렇지? 남자 싫어하잖아, 응?”
“아, 그리고.”
내 팔을 잡아 당겨 제 쪽으로 더 오라는 신호를 보낸 남자 때문에 나도 알아서 붙어 앉았다. 그러자 먼저 일어나더니 나를 끌어서 일으킨다. 그런 다음에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한다.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 터치 금지.”
“뭐?”
“내일 아침까지 손대지 마.”
“뭐야, 말도 안 돼! 그러는 게 어디 있어, 완전 지 맘대로야! 내 선물인데 왜 내가 못 만져!”
“시끄러.”
어느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문을 세게 닫았다. 닫힌 문은 열면 된다. 그런데도 밖에서 고래고래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석현이는 발을 쿵쿵 울리면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다. 문 열 줄 모르나?
한참 문 쪽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뭐가 내 머리에 씌워진다. 감촉을 보면 이 건 옷인 게 확실하다. 막 욕실에서 나와서 좀 추웠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생긴 거와 다르게 매너 있게 옷부터 챙겨 준다. 티셔츠며 속옷이며, 바지까지 열심히 입혀준 남자는 내가 멍청하게 서 있는 꼴을 여러 번 눈 여겨 본 다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그 얼굴로 밥 먹자고 했다.
아침 점심 다 뛰어 넘고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 거다. 겉은 무섭게 생겼지만 의외로 착한 남자의 손을 잡고 밥 먹으러 갔다. 다음부터 또 석현이가 때리면 이 사람한테 도망 와야겠다. 근데 난 대체 언제 태종이한테 돌아가지?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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