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5)

  

  

몸을 조금 움직여보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고 온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다. 코에 뭐가 하얀 게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 같다. 난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꽃인 줄은 이상하게 잘 안다. 꽃밭에 누워있는 나는 이상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분홍색과 흰 색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진 평범한 드레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빠를 몹시 닮은 토끼가 깡총깡총 뛰어오는 게 보였다. 징그러워서 발로 차려고 했더니 토끼가 방방 뛰면서 말렸다. 분명 토끼가 방방 뛰는 모습인데 죽여벼리고 싶었다.

  

“일쭈야, 그럼 안 돼, 때찌야! 응, 우리 일쭈 그럼 혼나! 혼나면 아야아야 해, 아야아야…….”

“시, 싫어, 말투 존나 병신 같아, 저리 가!”

“일쭈야, 얼른 성에 가야 돼, 가서 왕자님이랑 쭈, 해야 돼!”

“왕자?”

“지금 쭈, 안 하면 이렇게, 막, 맘마가 때찌, 때찌, 일쭈는 아야, 아야 해.”

“뭔 소리야.”

“성에 가야 돼, 일쭈야!”

  

아빠의 얼굴과 목소리는 가졌지만 몸까지는 다 가지지 않은 토끼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왕자라는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드레스를 입고 있는지, 왜 성에 가서 왕자하고 쭈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좀 따져야겠다.

  

길을 가는 도중에 갑자기 내 드레스에 뭔가가 박혔다. 아무리 봐도 그건 화살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놈의 화살인지, 하도 웃겨서 웃으니까 토끼가 뭐가 우습냐고 그런다. 아빠를 닮은 토끼도 존나 웃겨서 죽여 버리고 싶은데 주제도 모르고 나한테 화를 낸다. 발로 까버리고 싶은 걸 참아가며 화살을 뽑고 있자 누군가가 나무에서 뛰어 내려가며 멋있게 나타난다.

  

그건 백 날 봐도 석현이다.

  

“난 강도다, 가진 걸 다 내놔라!”

“어,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인데, 저번에 했던 게임 중에…….”

“닥쳐라, 너의 목숨과 돈을 내놔라!”

  

복장은 로빈훗 주제에 말 하는 건 그냥 중딩 때 국어책 읽는 수준이다. 계속 날려대는 화살은 생각보다 느려서 다 피할 수 있었다. 한참 다 피하고 있자 결국 제 풀에 지친 석현이가 활을 내동댕이치더니 내게 다가왔다.

  

“내 화살을 모조리 피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가만 보니 얼굴도 내 취향이고, 몸도 잘 빠진 게 꽤 먹음직스러운데?”

“석현아, 너 지금 핸드폰 있어?”

“그 드레스를 벗어라!”

“야, 나 급해. 빨리 태종이한테 전화해 봐야 돼.”

“태종?”

  

다가오다 말고 눈을 찌푸리던 석현이는 다시 그 눈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얼른 드레스를 벗어라, 그 태종인지 종태인지 따위 잊을 정도로 쑝 가게 해줄 테니까.”

“아, 뭘 또 어디를 가, 전화비 줄 테니까 좀 빌려달라고.”

  

그래도 말 잘 듣는 개의 습성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나는 진짜 드레스를 벗기 시작했다. 뭔가 좀 이상하다 했더니 내 엉덩이엔 꼬리가, 머리엔 개귀가 달려 있었다. 아, 드디어 내가 개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어쩐지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별로 사람 같진 않았다. 거기에 늘 돌멩이 형제네 집에서 입었던 빨간 빤쓰가 입혀져 있다, 내 모습에 완전히 쑝 간 석현이는 금방 나한테 달려들면서 뽀뽀를 하려고 했고, 언제 나타났는지 아빠토끼가 나타났다.

  

아빠 얼굴을 단 토끼는 얼른 석현이를 발로 차면서 코피를 터뜨렸다. 금방까진 참 동화적이고 분위기 좋았는데 석현이가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 보니까 조금 무서워진다. 서둘러 달려가 살펴본 석현이는 다행히 큰 상처는 없고 털이 복슬복슬한 토끼한테 차여서 그리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끌어안아가며 펑펑 우는 석현이는 아빠토끼를 가리키면서 욕을 퍼부었다.

  

“저 씨발토끼가 날 찼어, 으어어엉! 완전 생긴 것도 씨발인 게 나를 찼어, 씨발! 나 호 해줘, 호 해줘!”

“아빠, 왜 석현이를 때려?”

“일쭈야, 빠빠는 나쁜 애 때찌 한 꼬야, 빨리 도망가야 돼, 나쁜 애는 아야 하게 해야 해!”

“뭔 소리야, 아빠 말투 지진아 같아, 나 갈 거야!”

“일쭈야!”

  

토끼를 두고 얼른 성이 있을 법한 쪽으로 달리자 뒤에서 석현이와 아빠 토끼 목소리가 계속 메아리친다. 화가 너서 귀를 막고 계속 달리니 좀 잠잠해진다.

  

“씨발, 너 방금 뭐 봤어! 감히 우리 일수 알몸을 봐, 호로새끼야!”

“이 토끼 뭐야!”

  

산을 거의 다 건너자 저 멀리에 정말 궁전이 보인다. 만화 속에서 봤을 법한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거다. 아빠토끼도 더 이상 따라오는 것 같지 않고, 석현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어차피 개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데서나 막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풀을 뜯으며 쉬고 있는데 이번에는 웬 이상한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쓴 남자가 나타났다. 얼굴만 보면 석훈이다. 석훈이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이상하게 아주 부드러운 얼굴을 하면서 나를 일으켜주고는 갑자기 나와 같이 걸으려고 한다.

  

석훈이도 사실 석현이만큼은 아니지만 변태다. 저번에 내 빤쓰 속에 손을 넣었던 걸 기억한다. 그래도 일단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서 같이 걷기로 했다.

  

“오늘 점괘에 이곳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고 나왔어요.”

“그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급한데 아무 대사나 치면 뭐 어때?”

“그것도 들어 봤어.”

“하여튼 일수, 넌 내꺼야. 넌 내 운명의 상대야. 아무데도 갈 수 없어.”

“왜?”

“지금 성에 가려는 거야?”

“응, 아빠가 가래.”

“그럼 장인어른이 점 찍어준 사위라는 거지?”

“장인어른?”

  

항상 그렇지만 석훈이는 가끔 뜻 모를 소리를 한다. 지 장인어른을 왜 나한테 찾지, 이상하다. 어차피 성까지 가는 것도 귀찮았으니 잘 된 거다. 이게 현실일 리 없어 당연히 꿈이고, 석훈이를 만남으로서 그냥 꿈이 끝나버리면 나만 편한 거다. 더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다. 꿈 안 꾸고 그냥 자는 게 더 속 편한데.

  

내 귀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석훈이는 갑자기 뿅하고 내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줬다. 잘 보니까 들고 있는 지팡이가 조금 요상해 보인다.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몰라도 갑자기 턱시도를 입고 있는 석훈이는 나와 결혼하려고 한다. 난 여자랑 할 건데.

  

그 때였다. 갑자기 석훈이의 머리를 세게 때리며 내 손을 잡고 끌고 가는 사람이 생겼다. 아무리 봐도 엄청 익숙한 사람이다.

  

“엄마!”

“저 쌍놈 새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빨리 성에 안 가? 아빠는 어딨는데?”

“석현이랑 싸워.”

“뭐? 내 이럴 줄 알았어, 하여간 5분 뒤에 바로 결혼식 시작인데 지 아들 하나 제대로 못 데려와?”

“누구 결혼식?”

“누구긴, 니 결혼식이지!”

“어, 진짜? 누구랑?”

“누구긴 누구야, 이미 정해졌잖아.”

“정해졌어?”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멍청하게 엄마가 끌고 가는 데로 갔다. 진짜 궁전은 이미 결혼식 분위기에 신랑이 먼저 입장해 있다. 하얀 왕자옷을 입고 있는 어떤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엄마가 놀라서 얼른 나보고 가라고, 갑자기 내 귀와 꼬리를 떼버렸다. 피 철철 나는 거 보고 또 놀라서 기절할 뻔했지만 다행히 꿈이라 기절까진 안 한다.

  

꼬리가 뽑힌 자리를 붙잡고 울면서 엄마를 돌아봤다. 엄마는 내 꼬리와 귀를 버리고 와서 나 보고 얼른 입장하라고 등 떠민다.

  

“내 꼬리!”

“니 꼬리 이제 필요 없어, 넌 개가 아니야.”

“그럼 뭔데?”

“빨리, 늦겠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걷자 사람들이 나를 보고 축하해준다. 나를 기다리는 키가 큰 왕자를 향해 걷는 동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남잔데 왜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하지. 이제 동성결혼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된 건가, 꿈이라 남자 신부를 보고도 토하지 않는 걸까, 참 이상하다. 그리고 남자끼리 결혼하면 둘 다 턱시도 입는 거 아니었나, 꼭 드레스 입어야 하는 건가, 드레스 너무 불편해 등 혼란스럽다.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보며 아직도 서 있는 엄마한테 소리쳤다.

  

“엄마, 나 깍두기…….”

  

그와 동시에 내 팔을 낚아챈 사람은 아까 그 왕자였다. 하얀 왕자옷을 입고 망토를 두른 왕자는 다름 아닌 석희였다. 와, 짱 멋있다. 나도 이런 거 입어보고 싶었는데.

  

석희는 내 허리를 감싸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왕자옷을 만지작거리는 내 손을 잡아끌어서 결혼반지를 껴주고, 나한테도 내밀어서 나보고 자신의 것을 껴달라고 한다. 일단 석희라면 좋기 때문에 문제없이 껴줬다. 거기에 기분이 좋아진 석희는 내게 입을 맞추려고 한다. 맹세의 키스인지 뭐 그런 거 같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살살 다가오는 눈치에 나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꿈속이라 눈을 감아도 전부 다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갑자기 누가 창문을 깨고 날아 들어왔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술렁거리면서 그 사람을 일제히 가리켰다. 석희는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려고 하고, 나는 내 얼굴을 때려대는 망토를 치운 다음 창문을 깨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 했다.

  

태종이었다.

  

황금색 갑옷을 입은 태종이는 칼을 휘두르면서 석희에게 달려들고, 석희도 하얀 손잡이가 달린 칼을 꺼냈다. 재밌어 보여서 구경하고 있는데 누가 내 앞에 나타난다.

  

둘이 싸우는 것을 뒤로 하고 나는 이끌리듯 그 향기를 따라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네모진 얼굴과 주황색 피부색을 지니고 있다. 군데 군데 고춧가루가 붙어 있고 새콤한 국물이 줄줄 흐른다. 깍두기 왕자님이다. 너무 좋아서 그 깍두기에게 달려들어 끌어안았더니 실컷 싸우던 석희와 태종이가 뭐라고 욕을 하며 나를 향해 달려온다.

  

깍두기 왕자님의 얼굴을 쭉쭉 빨고 있는데 누가 내게 일어나라는 소리를 한다. 태종이인지 석희인지 잘 모르겠다. 엄마가 담가준 깍두기 맛이 나는 왕자님을 더 먹고 싶은데 자꾸만 깨운다. 내 얼굴을 때려대는 손을 밀어내려 하자 이번엔 어깨를 흔든다.

  

어쩔 수 없이 겨우 눈을 비벼가며 떴더니 눈앞엔 아주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다.

  

“서, 설마 여기서 잤어?”

“응.”

“씨발, 아주 잘 한다!”

  

신발을 베고 자서 얼굴에 자국이 난 것을 겨우 알고 마구 문질렀다. 나 하나 먹여 살리느라 빠듯할 태종이는 택시를 잡아서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내 집이 아니라 태종이네다. 태종이는 제 소매에 침을 발라가며 내 얼굴 여기저기를 닦았다. 드럽다고 밀쳐냈더니 내 꼴이 더 드럽다면서 특히 내 볼을 열심히 문지른다. 나도 그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으니 그냥 닥치고 있었다.

  

눈 밑이 어두운 태종이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밤 새 잠 안 자고 뭐 했나, 눈 밑을 문질러봤더니 뭘 바른 건 아니었다.

  

“아, 깜짝이야!”

“눈 왜 그래?”

“왜?”

“벌게.”

“씨발, 너 찾느라고 이 꼴 난 거 아니야! 너 갑자기 없어져서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길도 잘 모르는 새끼가……. 밤새도록 찾아다니다가 혹시나 싶어서 니네 집 근처로 와보니까 니 코 고는 소리가 도로까지 다 들리더라.”

“진짜?”

“너 집에 갔었어?”

“어, 근데 집에서 도망 나왔어.”

“왜?”

“이수 때문에.”

“이수, 그 새끼가 뭔 짓 했는데?”

“내 고추 만졌어.”

“뭐, 이 씨발새끼가!”

  

내 말에 태종이는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계속 물어 봤다. ‘그 새끼가 거기만 손댔어? 다른 데는, 다른 데든 손 안 댔어? 뭐, 뽀뽀도 했어? 혀도 넣었어?’ 하고, 택시기사가 계속 힐끔거리는데도 계속 물어봤다. 그래도 이수에게 화난 게 많았기 때문에 이수가 한 짓을 전부 말해버렸다.

  

그러다 문득 태종이 품에 저번에 봤던 쇠막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갈면서 그 쪽으로 자꾸 손을 집어넣는 태종이는 표정이 좀 무서웠다. 일단 집에 도착할 때까진 자는 척해야지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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