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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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느라고 장을 보는 것을 미룬 태종이는 나보고 집안에만 박혀 있으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추가로 내가 또 없어져도 다신 찾지 않을 거라며 욕을 한 바가지 했다. 나도 따라 나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왜냐면 내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늘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방 청소다. 화가 난 태종이에게 이쁨을 받으려면 내 자신이 깨끗해져야만 한다.

  

우선 청소를 즐겁게 하자는 의미에서 태종이의 오디오에 꽂혀있는 아무 시디나 무작정 틀었다. 시디 사 모으는 걸 좋아하는 태종이는 클래식 같은 걸 잘 듣는다. 이번 건 모르는 우리나라 남자 가수의 노래가 틀어진다. 남잔데 꼭 소프라노처럼 부른다. 이름이 정세훈인가, 하여튼 남잔데 여자 목소리로 노래한다. 난 열심히 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제일 먼저 방 안에 있는 이불이나, 기타 여러 가지 청소에 방해되는 것들을 전부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 걸로도 모자라서 탁자 같은 건 다 화장실에 박아 놨다.

  

충전기나 그런 것들도 방해가 되었다. 그런 건 둘 데가 없으니 그냥 싱크대에다 넣어 놨다. 설거지 감들 하고 섞였지만 괜찮다. 줄만 잡아당기면 알아서 쏙 빠지게끔 올려놨기 때문이다.

  

일단 빗자루를 들어서 먼지부터 모았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 먼지들을 끄집어내고 있으니 뭐가 내 머리에 쓸려서 후두둑 떨어진다. 음, 이건 내가 책상 밑에 붙여놨던 코딱지 들이다. 안에 들어가서 올려다보자 상당히 많은 양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다. 그걸 손톱으로 긁어보니 순식간에 주룩주룩 떨어진다. 이것도 모아야지.

  

내 머리에 떨어진 건 대충 털어내고 코딱지들을 모았다. 컴퓨터도 쓸어보니 본체 옆쪽에 내 코딱지들이 있다. 게임하면서 자주 코를 파는데 둘 데가 없어서 본체 옆에 붙여놓는다. 물론, 태종이는 모른다.

  

그것도 빗자루로 대충 쓰니까 알아서 떨어진다. 꽤 오래 되서 말라비틀어진 덕에 잘 떨어진다.

  

이번에도 가운데쯤으로 모으고, 장롱 밑도 후벼 파봤다. 가끔 이런 곳에 예상치 못한 레어템을 발견하기도 한다. 오백 원짜리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폐 뭉치가 나온다면 더더욱 고맙다. 빗자루로 한참 쑤신 다음 잡아끄는 데에 온 힘을 실어서 한 순간에 잡아 당겼다. 그러자 뭔가가 한가득 나온다.

  

이건 내가 자면서 장롱 밑에다 붙인 코딱지들이다. 여기저기서 내 손길이 다녀간 자국들이 나오니 괜히 좀 감상에 젖게 된다. 이번에는 꽤 많은 양이 뭔가와 함께 나왔다. 뭔지 모르지만 분홍색 편지봉투다.

  

엉켜 붙은 코딱지들을 전부 떼고 앞부분을 살폈다. 겉에는 ‘태종’이라는 글만 적혀 있다. 태종이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

  

스티커가 붙은 그 부분에도 엉킨 코딱지들을 전부 떼자 놀랍게도 빨간 하트모양의 스티커가 나온다. 설마, 하면서 아무리 살펴봐도 분홍색의 편지봉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태종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려고 써놓은 게 분명하다.

  

방 한 가운데에 쌓인 코딱지들과 먼지들을 뒤로 하고 우선 조심스럽게 스티커가 다치지 않도록 뜯어보았다. 예상보다 조금 쉽게 떼어진 봉투 안에는 하얀 편지지가 예쁘게 접혀져 들어가 있다. 편지지 안은 분홍색 하트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고 그 안에는 검은색 펜으로 글씨가 써져 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내용이다.

  

‘이렇게 갑자기 편지를 써서 많이 놀랐을 거야. 하지만 말로 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글로 써봤어.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밤새 생각했지만 역시 묻지 않고 내 마음만 전하기로 마음먹었어. 조금 겁이 나고 상처 받을 것 같아서…….

사귀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 마음만 알아줬으면 해.

난 니가 좋아.’

  

나도 모르게 편지지를 박박 구겼다가 놀라서 얼른 폈다. 누구를 향한 편지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기분 나쁘고 조금 화가 난다. 분명 내 앞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 태종이다. 편지는 좀 오래 되어 보이고, 먼지가 많이 끼었다. 장롱 밑에 왜 숨겨놨는지 몰라도 그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에 편지를 못 전해줬거나 전해주는 걸 포기한 것 같다.

  

태종이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아니, 태종이가 나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몰래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니, 진짜 충격적이다. 게다가 편지 내용이 완전 순수하다. 옛날 까까머리 시절 중학생 남자애가 근처 여학교 학생에게 전한 다음 자전거 타고 얼른 도망가 버리는 순수한 편지와도 같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그 배신감이 나한테 말을 안 해서도 있지만 어딘지 조금 이상하게 배신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뭔지는 몰라도 계속 태종이는 나하고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어디서 또 혼자 어떤 여자를 계속 봐왔다는 거다. 태종이에게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구겨진 편지지는 도무지 펴지질 않아서 나도 모르게 다리미를 꺼내 다렸다. 여기저기 거멓게 그을려질 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그 원망스러운 편지지만 내려다봤다.

  

분홍색의 하트가 둥실거리는 예쁜 편지지에 정성들여 깔끔하게 쓴 글씨들이 너무 짜증나게 보인다. 누굴까, 누군데 태종이를 이렇게 순수하고 수줍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결국 다림질을 멈추고 거뭇거뭇 누렇게 오른 편지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백날 읽어도 내용은 같지만 그 안에 무슨 단서라도 있을까봐 계속 읽는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만일 태종이가 이 편지를 발견하게 되면 다시 이 여자애에 대해서 떠올리게 될 지도 몰라. 그럼 우선 나를 내쫓아내고, 그 여자애를 이리로 들여놓을 지도 모른다.

  

편지를 들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가장 효과적인 것이 생각났다. 아예 태워버리는 거다. 그럼 영영 기억 못할 거고, 어차피 여기 오래 짱 박혀 있는 걸 보면 아예 잊어버리고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와 지내는 것만 봐도 최소한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는 모습이 없었다. 여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 된다. 나는 거기에 큰 안도를 느끼며 이상할 정도로 편지를 금방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혹시, 그럼 이 편지의 주인공과 편지를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의 사이가 된 건 아닐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왜 내가 태종이에 관해 이런 생각을 가지는 지도 모른다. 왜 태종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안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기분이 나쁘다.

  

우선 제 아무리 태종이라도 절대 청소하지 않는 부분을 찾아낸다. 바닥을 뜯어내 그 밑에 숨기는 거다. 그 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 되었고, 그 위를 아무리 지나다녀도 그 얇은 편지의 감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여기다 평생 동안 보관해야겠다. 그래도 남의 편지라 없애 버리기 껄끄러워 이렇게라도 해놔야겠다. 장롱 밑에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본인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괜찮다.

  

이참에 장롱 밑에 또 뭐가 있는지 빗자루로 더 쑤셔 봤다. 10원 짜리 두 개와 뭔가가 나왔다. 갈색 종이 봉투다. 괜히 불안해져서 코에 손가락을 꽂은 채로 그 봉투를 박박 뜯어 봤다.

  

역시 뭔가가 우르르 나왔다. 사진들이다. 누군가의 사진이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상당히 열 받을 정도로 이쁘장한 여자애다. 도시락 까먹는 사진, 소풍 갔을 때의 사진 등 전부 몰래 찍은 사진도 아니다. 카메라를 보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짧은 커트머리에 약간 사진 찍는 걸 귀찮아하는 표정이지만 진짜 이쁘게 생겼다. 뭐야, 편지의 주인공이 바로 이 여자애잖아, 하는 감이 확 들어서 순간 눈앞이 우글우글 거렸다.

  

코에 손가락을 꼽은 채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요즘 난 참 자주 운다. 다 태종이 때문이다. 모든 게 그냥 다 태종이 때문인 것 같다.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으면서, 다른 쪽으로 이렇게 다른 여자애를 흠모하고 있었다.

  

둘은 대화도 해봤겠지,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손도 잡아봤을 거다. 놀이동산 같은 곳에 놀러간 사진이 많은 걸 보면 상당히 친했나 보다. 살결도 부드러워 보이고 하얀 목도 이쁘다. 진짜 짜증날 정도로 이쁘다. 근데 왜 내가 화가 나고 서러운 건지 모른다. 그냥 태종이가 이딴 여자애하고 놀아났다는 게 화가 난다.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해줬으면서!

  

편지처럼 귀중하게 다루지 않고 박박 찢다가 세 장 정도 남았을 때 멈췄다. 그래도 남의 건데 막 찢으면 안 될 거다.

  

찢은 건 좀 미안해서 테이프로 붙인 다음 다시 봉투에 넣어 놨다. 그리고 그것도 바닥 까서 그 밑에 집어넣었다. 이번 건 두꺼워서 그런지 바닥이 엄청 뜨는 게 보인다. 그래서 그 위에다 내 코딱지들이 전부 쏟아 놓고 이불을 가져와 구석에서 잠을 잤다.

  

머리에 붙은 코딱지들도 신경 안 쓰고 그냥 눈물을 쏟으면서 잠을 청한다. 머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잠을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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