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5)

  

  

누가 어깨를 세게 흔들어서 밀쳐내다가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았다. 보나마나 태종이일 거다. 여자가 있는 태종이다. 일어나기 싫어서 코에 손가락을 쑤셔가면서 눈을 감고 있었더니 또 머리를 세게 때린다. 그와 동시에 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놀란 태종이는 얼른 내 코에서 손가락을 잡아 뺐다. 뭐가 딸려나가는 걸 보면 분명 콧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다.

  

태종이가 씨발 거리는 소릴 내며 냅다 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화장실로 얼른 뛰어 들어가면서 나는 아까 내가 묻어놓은 사진들과 편지가 전부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을 눈치 챘다. 발에 밟히는 그것들은 분명 사진들이다.

  

세면대에 머리를 박고 코를 훔쳐 주는 태종이는 다행히 피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게 아닌지 조금 찢어진 것뿐이라고 말해주었다. 차라리 그대로 확 쑤셔져서 뇌까지 뚫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여자가 있는 태종이하고는 더 지내기 싫다. 가서 그 여자나 데려다 키우지? 아니지, 그 여자는 소중하니까 좀 더 예쁘게 대해줄 거다. 모셔놓고 매일 같이 진수성찬을 대접하고 청소는 혼자서 다 하고 빨래나 밥도 다 혼자서 할 거다.

  

그 뿐인가, 그 여자가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밥상을 차릴 거다. 그 귀찮은 머리 감기도 다 해주고, 밥도 먹여주고 씻겨주고 잘 때는 꽉 끌어안고 잘 거다.

  

흠, 그렇게 할 거다. 머리도 감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좋아하는 음식으로 매일 밥 차려주고…….

  

생각해보니 나랑 별로 다를 게 없네? 아, 대신 그 여자한테는 이렇게 머리를 때리진 않을 거다. 발로 차지도 않고, 귓방망이를 때리지도 않을 거다. 맞아, 욕도 안 할 거다.

  

“혼자 뭘 그렇게 궁시렁 대?”

“내가 뭘.”

  

내 머리를 감겨주는 태종이는 계속 뭔가 좀 불만스러워 하는 목소리다. 머리도 평소처럼 벅벅 감겨주지 않고 얌전하게 감겨주고 있다. 게다가 그러느라고 하도 오래 걸려서 목뼈가 뻐근해지기까지 했다. 급기야 옷을 또 벗기더니 목욕도 시켜주었다. 평소처럼 벅벅 문지르지 않고 얌전하게 천천히 비누칠만 해준다.

  

하긴, 지도 쪽팔릴 거다. 그 편지하고 사진들을 내가 보고, 또 망쳐놨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속상할까, 마음 같았으면 날 죽이고 대포동 미사일에 묶어 날려도 시원치 않을 거다.

  

내 가랑이를 벌려가며 태종이의 손이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괜히 태종이의 손길이 계속 신경 쓰였다. 한 번 나를 진짜 숑 가게 했던 그 때의 태종이 손놀림 때문에 태종이의 손이 거기로 향하면 굉장히 부끄러워진다. 나도 드디어 개에서 사람으로 진화해가나 보다. 그래도 태종이가 이런 식으로 멀어진다는 게 싫다. 계속 나와 마주치기 부끄러워하겠지, 이제 나보고 집을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건 싫다. 난 진짜 태종이가 너무 좋다. 계속 함께 하고 싶고, 이대로 늙어가는 것도 좋다.

  

다리 전체를 거의 끝마친 태종이는 제 손에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를 잰다. 그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생긴 것만 보면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다. 깔끔하고, 뭐든 다 잘할 것 같다. 약간 성질이 급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도 매력적이다.

  

태종이는 정말 이쁜 여자와 결혼할 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샤워기로 내 몸을 씻기려던 태종이는 문득 내 얼굴을 보다가 놀라는 얼굴이다.

  

“왜 그래?”

  

열이 나는 눈으로 태종이를 끝까지 바라봤다. 날 챙겨주는 척이다. 여자도 있는 새끼가 왜 나 같은 새끼한테 이 정도의 친절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괜히 화가 나서 샤워기를 빼앗아 내 몸을 내가 씻었다. 그런 다음 서둘러 밖으로 나가 옷을 입었다. 내가 이곳에 오면서 들고 온 짐가방을 찾고, 그 안에 내 옷가지들을 집어넣는다.

  

내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종이는 바닥에 밟히던 사진과 편지를 집어 든다. 그걸 번갈아 보면서 상당히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참인 것 같다. 태종이 입에서 나가라는 소릴 듣느니 내가 나가는 게 바람직한 것 같다.

  

짐을 대충 챙긴 나는 태종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태종이가 들고 있는 사진을 눈앞에서 박박 찢었다. 진 작에 찢지 않아 몇 남은 성한 사진이었기 때문인지 태종이가 굉장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말리지도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이 년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사진 조각들을 태종이 얼굴에 뿌린 다음 짐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큰 소리를 내며 걸었다. 큰 충격을 받은 태종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역시 가지 말라고도 않는다.

  

막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갑자기 태종이가 쿵쿵거리며 뛰어온다. 놀라서 얼른 나가려고 했더니 빨리도 와서 나를 끌어당긴다. 덕분에 뒤로 몸이 넘어가는 날 내버려두고 문단속부터 열심히 하는 태종이는 내가 째려보는데도 이것저것 잠근 다음 내 발에 끼워진 슬리퍼를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 내 말을 그냥 껌으로 생각하기로 했나 보다.

  

째려보는 것도 힘들지만 열심히 힘을 내서 노려보고 있는 나를 잠깐 흘겨본 태종이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다. 손에는 성한 사진들 중 한 장을 들고 있다.

  

그걸 내 눈앞으로 가져온다.

  

“누구, 이 년?”

  

사진 속에서 평범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는 여자애를 가리킨다. 햇빛을 거의 안 보고 살았는지 정말 하얗고 이쁘게 생겼다. 괜히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아서 침을 넘겨가며 그 사진과 태종이를 번갈아 가며 봤다. 그러자 태종이가 갑자기 웃는 얼굴을 한다.

  

“이게 넌 년으로 보이냐, 병신아?”

  

왜 태종이가 웃는지 파악을 제대로 못 했다. 아, 년이 아니라 여성분이라고 해야했나보다. 지 여자친구를 년이라고 해서 화가 났는지 뭔지 이상하게 웃고 있는 태종이는 아직도 멍청하게 저를 보는 나를 갖다가 저한테 끌어당긴다. 싫다고 내치면서 뒤로 물러나니 또 내 목을 끌어당기면서 안으려고 한다.

  

열 받아서 세게 밀치자 밀쳐져놓고도 좋다고 큰 소리로 웃는 태종이는 다시 내게 다가와 나를 끌어안는다. 원래 태종이는 이 정도로 들러붙지 않는다. 드디어 맛이 갔나 보다.

  

너무 이상해서 분노마저 사라진 나한테 태종이가 그 사진을 마구 흔들어 보인다. 태종이의 미소가 참 자비롭다.

  

“이거 너잖아, 병신 새끼야!”

  

햇빛을 자주 안 봐서 허연 얼굴에 깨끗한 목을 가졌고, 진짜 이쁜 얼굴이지만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는 커트머리 여자애는 네모진 사진 속에서 나보고 병신이냐고 묻고 있다. 나도 사진을 보면서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왜 여자애가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교실에서 밥을 먹고 있지, 분명 우리 학교는 남학교였는데.

  

그리고 인간 적으로 가슴이 아예 없었다. 그리고 자세도 좀 구부정하고 앉을 때도 인간적으로 다리를 너무 벌리고 앉아 있다. 나시를 입은 것도 있는데 여자라고 보기 어려운 사진이었지만 그 당시 분노에 휩싸인 내게 그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멍청하게 서 있다가 도로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에 있는 옷들을 전부 꺼내 서랍장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럼, 그 편지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사진 일이 안심 되면서 쪽팔려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