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이 오자 태종이는 쉴 새 없이 집안을 돌아다닌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불 속에 파묻혀 태종이가 하는 짓만 구경하는 나는 태종이가 내는 소리를 모조리 좋아한다. 특히 발자국 소리는 누군가가 집안을 돌아다닌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가장 좋아한다. 내 옆을 지나다닐 때 일부러 그 다리를 건드려 보기도 한다. 평소의 태종이었으면 무시하고 말았을 아무 생각 없는 행동에 오늘은 조금 색다른 반응을 보인다.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참 신기하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태종이의 늘씬하고 이쁜 다리를 구경하다가 내 옆을 지나가기에 한번 꼬집어 본 건데 태종이가 딱 멈춰 섰다. 나는 설마하니 내가 바닥에 붙여놓은 코딱지라도 밟았나 해서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눈치가 아닌 태종이는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내 옆으로 몸을 숙여왔다.
형광등 불빛 때문에 역광으로 어두워진 태종이 얼굴이 웃고 있는 건 알겠다. 뭔지 모르게 계속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태종이는 그 사진사건 이후 계속 이렇다. 내가 뭐만 하면 자꾸 관심을 가지고 다가온다.
그게 좀 부담스러워서 모른 척 딴 짓 하면 그냥 내 볼을 꼬집고 가버린다. 태종이 답지 않은 그 행동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뭐 잘못 먹었나, 오히려 나는 태종이가 갖고 있던 사진을 거의 다 찢어버려 굉장히 혼날 줄 알았다. 비록 전부 다 내 사진이긴 했지만 어쨌든 태종이 소유의 물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왜 내 사진을 그렇게 잔뜩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걸 또 굳이 봉투에 넣어서 장롱 밑에 숨겨둔 것으로 봐서 남에게 보이기 싫은 물건인 게 틀림없다.
아, 그럼 그 보기 싫은 물건을 내가 찢어줘서 기쁘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사진이 왜 그렇게 보기 싫은 지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약간 감은 잡힌다. 내가 그리 좋진 않은 거다. 원래 태종이가 남을 잘 챙겨주긴 해도 나를 좋아하진 않을 거다. 매일 자신의 깨끗한 집을 더럽히는 것이 곧 나고, 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내는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 나도 일을 해야만 하나보다. 돈을 벌어서 태종이에게 쥐어주고, 자주 씻기만 한다면 태종이는 금방 날 좋아하게 될 거다. 하지만 지금 생활이 너무 좋아서 그게 잘 될지 모르겠다. 지금의 생활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다. 매일 이렇게 누워서 지내다가 태종이 오면 반기고, 같이 밥 먹고 하는 생활이 너무 좋다.
“넌 니 고등학교 때 생각 안 나?”
내 옆에 드러눕는 태종이는 나를 보면서 묻는다.
“어떤 거?”
“그냥,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일들 다 생각 안 나?”
“좀 나.”
“그럼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뭐야?”
갑자기 다정하게 묻는 태종이가 이상하다. 하지만 태종이가 내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므로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원래 생각도 안 하지만.
“1학년 때, 체육시간에 다 같이 축구하는데 애들이 나 골키퍼 시켜줬을 때.”
“아, 그 때 생각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랑 축구 했었지.”
“얼굴에 공 맞고 코피 터졌잖아.”
“애들이 난리였잖아, 그대로 기절하는 바람에 양호실에 데려다놨더니 3시간이 지나도 안 깨어나서 보니까 잠이 부족해서 못 일어나는 거였다며.”
“아빠랑 밤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느라고 못 잤어,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뽀뽀해주기였거든.”
내 말에 태종이가 웃었다.
“그땐 니가 참 깔끔하고 애교도 많았었는데.”
“내가?”
확실히 깔끔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씻기는 담당은 늘 아빠였고, 아빠는 나와 함께 씻는 걸 가장 좋아했다. 머리도 늘 내 손이 아닌 아빠가 감겨주고 목욕도 다 아빠가 시켜줬다. 심지어 이를 닦는 사소한 일도 아빠가 모조리 다 해줬다.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게으른 탓의 일부는 아빠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 손으로 뭘 자꾸 해보듯 해야 자발적으로 씻겠다는 생각이라도 들지, 내 손을 늘 안 해 와서 하겠다는 의지가 생기질 않는 것 같다.
난 집안에서도 개였구나.
“냄새도 이쁜 냄새만 나고 자주 내 손 잡고 다녔었잖아.”
“애교 많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는데.”
“재밌는 말도 많이 했었어, 니가 뭔 소리 하나만 하면 바로 반 애들이 다 웃었잖아.”
“몰라, 난 나름대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는데 애들이 막 웃더라.”
“그게 재밌는 거야, 남들은 일부러도 하기 힘든데.”
“왜 일부러 하는데?”
“일부러 웃기기도 힘들다고, 뭘 자꾸 물고 늘어져.”
“내가 웃겨?”
“그럼 안 웃기냐?”
“지금도?”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워있다. 언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기억 안 나고 한참 나를 뜯어보는 태종이는 내 머리를 계속해서 넘겨주고 있다. 엄마도, 아빠도 아닌 새끼가 참 손길도 부드럽다. 가만히 당하고 있으면 절로 잠이 오는 손길이다. 이 손으로 편지를 쓴 거다. 내가 모르는 어떤 여자애에게 편지를 썼었을 거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는 썼겠다.
내 눈으로 다가오는 손가락 때문에 눈을 감았다. 태종이가 무슨 생각하는 지에 관해서는 전혀 모른다. 나는 늘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다. 적어도 나와 마주 보고 누워 있는 지금의 시간이 싫진 않은 것 같다.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내 속눈썹을 열심히 건드리고 있다. 손가락으로 슬슬 쓸어보는 모양새를 보니 내 속눈썹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간지러워서 실실 쪼개고 있는 나한테 태종이도 같이 웃음소리를 낸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지만 태종이 손가락 때문에 눈을 못 뜨겠다. 지금도 확실히 내가 웃긴가 보다. 난 웃긴 사람이다. 태종이가 생각하는 나란 그런 사람이다.
“나는 니가…….”
“응?”
웃다 말고 꽤 진지한 목소리를 낸다. 뭔가 계속 할 말이 있어 보였던 태종이는 괜히 실없이 고등학교 때 얘기를 일부러 꺼냈었던 것 같다.
“계속 안 씻어도, 계속 냄새나도……. 내가 계속 다 씻겨줄 거야, 밥도 주고 돈 안 받고……. 계속 놀아도 주고, 안 심심하게 얘기도 계속 해주고, 휴일에도 너랑 계속 보낼 거야.”
“진짜?”
“어.”
“나중에 놀러도 가자.”
“그래, 여기저기도 다니자.”
“돈은 다 니가 대고?”
“내가 너 하나는 끝까지 책임질 거야.”
내 팔을 잡아끈다 싶더니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태종이는 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훨씬 특별한 것 같다. 그 품에 얼굴을 비비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신세만 지려고 하는 것에 대해 아무 잔소리가 왜 없는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일일이 화내면서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이건 태종이가 아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막 화를 냈으면 한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태종이 혼자서 나를 데리고 사는 것이 꽤나 버거운 일이란 것을 잘 안다. 태종이는 지금의 벌이로 미래계획도 해야 하고, 아무 이윤 없이 내게 투자할 만한 여유도 없다.
역시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 내 장기를 살리는 그 뭔가를 해야겠다. 나도 남자고, 뼈 빠지게 고생하는 태종이를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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