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35)

  

  

모카빵과 커피를 같이 마시면 한동안 맛이란 것을 못 느끼게 된다. 때문에 깍두기를 아무리 먹어도 혀가 마비되어 있어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깍두기가 싸구려라 그런가, 석희가 담근 깍두기의 맛이 더 절실해져서 아까운 감에 엎어진 깍두기바다를 다시 찾았을 때 이미 전부 청소되고 없었다. 태종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가봐야 이미 다 청소하고 없다고, 5살짜리 어린 여자애를 시켜도 그것보다는 덜 화려하게 쏟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 다음 한 번만 더 깍두기 통을 손으로 직접 들고 오는 날엔 손톱 사이사이를 바늘로 5번 이상 쑤셔버린다고 했다. 다시 그 생각이 들자 너무 끔찍해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태종이는 늘 먼저 밥을 먹고 난 다음 컴퓨터 앞에 붙었었다. 그럼 나는 그런 태종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이불과 노는 거다. 그러다보면 잠이 들고, 아침에 태종이를 배웅하는 게 내 일과였다.

  

그러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태종이는 내가 깍두기로 골목길을 테러했던 그 날 이후로 바로 컴퓨터 앞에 앉지 않고 나를 좀 더 놀아준 다음에 컴퓨터를 하거나 그냥 바로 잤다. 확실히 그건 기쁜 일이다. 또 보수 받아야 하는 생각을 까맣게 잊은 채 태종이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말장난도 한다. 이런 식으로 내 장난을 모두 받아주다 보니 전보다 나는 더 맞을 짓을 많이 하게 된다.

  

그 중 가장 심하게 맞았던 일이 바로 이 일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태종이가 내게 커피를 타오라고 했다.

  

나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태종이를 기쁘게 해줄 커피를 탔다. 설마하니, 태종이는 아무리 나라도 커피 하나쯤은 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문제는 커피를 직접 타 마시는 건 별로 많이 해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나 자신이 약간 불안 했었다.

  

일단 커피가루와 설탕을 넣었다. 평소 태종이가 커피에 뭘 넣어 먹는지 모르지만 나를 향해 ‘설탕 둘’이라고 하는 걸 보면 두 번 넣으라는 것 같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두 번을 가득 넣었다. 설탕이 잔의 반을 채운다. 그런 다음 태종이에게 처음으로 타주는 커피는 맛있고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미원과 다시다도 넣었다. 그리고 찬장을 한참 뒤져서 핫케익 소스를 찾았다. 어쩌다 한 번씩 몰래 꺼내서 마셔보는데 진짜 달콤하고 맛있다. 마지막으로는 고소한 향이 일품인 참기름을 꺼냈다. 냄새까지 맡아가며 확인을 하고, 그걸 두 숟갈 넣은 다음 물을 끓여 부었다. 거의 잔을 가득 채우던 조미료들이 한 순간에 녹는 걸 보면서 개운함을 느낀다. 태종이가 좋아해야 할 텐데.

  

내 것도 똑같이 만든 다음 태종이가 사온 모카빵을 쟁반에 얹어서 가지고 들어갔다. 책을 들춰보던 태종이는 내가 쟁반을 들고 들어가자 굉장히 부드럽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야, 내가 일수 손으로 탄 커피를 마시게 될 줄이야. 생각보다 좀 오래 걸리던데 뭐 넣었어?”

“마셔보면 알아.”

“하하, 그래. 잘 마실게.”

  

너무 기분이 좋고 쑥스러워서 일부러 다른 곳을 보며 커피와 빵을 먹었다. 커피를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모르지만 되게 중독성 있는 맛이다.

  

태종이 반응이 궁금해서 태종이 쪽을 바라보자 새색시처럼 얌전하게 앉아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태종이는 입에서 커피를 질질 흘리고 있다. 왜 저러지, 너무 맛있어서 패닉상태가 되었나 보다. 눈앞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왠지 장난치는 것 같아서 웃었더니 태종이가 컵을 내 쪽으로 던졌다.

  

난 이유도 모르고 쟁반으로 30분 동안 두들겨 맞아야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을 때마다 태종이는 소리를 질러가며 나를 때렸다. 내가 모르고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가?

  

한참 뒤에야 내가 바닥에 쓰러져 엉엉 우는 걸 정신 차리고 본 태종이는 말했다.

  

“뭐, 뭐야, 누가 그랬어! 강도라도 들었나? 씨발, 뭐야?”

  

하여튼 커피에 관해선 위의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뒤로 절대 태종이가 암만 부탁해도 커피를 타다주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도 모른 척 했고, 더 나아가 화를 내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먼저 잤다. 전혀 당시를 기억 못하는 태종이는 한 번만 타달라며 내게 달라붙어 안 부리던 애교까지 부렸다. 나도 타다주고야 싶지, 근데 한 번만 더 타면 날 진짜로 죽여 버릴 것 같아서 못 하겠다.

  

태종이 눈에는 그런 내가 굉장히 우울하고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보였나 보다. 한동안 내게 별 다른 터치 없이 내 눈치를 봐가며 지내던 태종이가 3일 쯤 뒤에 손에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일수야, 이거 봐라!”

  

그건 축구공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왠지 날 준다는 것 같아서 웃으면서 받아들였더니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내일 휴일이고 하니 공원에서 공놀이 하고 놀자는 거다. 내가 그래도 공을 꽤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아서 공을 사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좁은 집안에서는 뭘 갖고 놀기가 겁나 일단 빨래바구니 옆에 공을 얌전히 두고 실실 쪼개면서 태종이 허리에 팔을 두른 다음 같이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태종이 옷을 벗겨주고 있으니 태종이가 묻는다.

  

“오늘은 뭐 했어?”

“응, 게임.”

“그리고?”

“잤어.”

“그리고?”

“어……. 게임했어.”

“그래.”

“그리고 잤어.”

“그래.”

  

태종이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딱 하나, 내 스스로 변화한 게 있다. 바로 세수를 꼬박꼬박 한다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고, 밤에 자기 전에 한다. 내가 스스로 세수를 하자 태종이는 엄청 놀라워하며 사진으로도 찍어놓은 다음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려야 한다고 호들갑 떨었다. 뭐, 나도 내 손으로 세수를 하니 참 생소하긴 하다.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검사하는 태종이에게 당당하게 평소와 달리 깔끔한 얼굴을 들이밀자 내 이마에 볼을 대며 웃는다. 간지러워서 따라 웃었더니 전과 달리 뽀송뽀송하다며 내 볼을 문지른다.

  

“어때, 세수 하니까 개운하고 좋지?”

“응.”

“그렇지, 좋지, 이제 계속 그렇게 하는 거야.”

“응.”

  

내가 윗옷을 전부 벗겨줬더니 알아서 서랍장으로 가 속옷을 꺼내온다. 씻으러 들어가려는 거다. 나는 얼른 그 앞을 막아서서 태종이를 자신 있게 바라봤다.

  

“왜?”

  

태종이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상 줘야지.”

“상?”

“세수 했잖아, 상 줘.”

“어떤 거 줄까?”

  

개구쟁이처럼 짓궂게 웃는 태종이의 얼굴을 보니 왠지 감이 좋았다.

  

“내 부탁 들어주는 걸로 해줘.”

“무슨 부탁인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태종이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사실 난 이걸 노리고 태종이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행동하며 스스로 하루 두 번 세수를 꼬박꼬박 챙겨 했다. 태종이는 잊었겠지만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신경 쓰여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특히 태종이와 나란히 밥 먹을 땐 수도 없이 나를 괴롭혀온 의문이다.

  

“그 때 장롱 밑에서 사진이랑 같이 나왔던 거…….”

“코딱지?”

  

온 인상을 써가며 답하는 태종이 때문에 하마터면 무방비하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웃겨서가 아니라 쪽팔려서다.

  

“아니, 그 편지.”

“편…….”

  

역시, 뭔가 찔리는지 얼굴이 완전히 시뻘게져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심지어 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나와 눈을 못 마주치는 태종이는 허둥지둥 손에 들린 속옷을 괜히 돌리다가 날려서 그걸 주우러 뛰어다닌다. 집안이 그렇게 넓은 것도 아닌데 굳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 일부러 바쁜 척 얼버무리려는 속셈인 것 같다. 곧장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태종이의 바지를 잡고 늘어지자 제 내려간 바지를 추스르고 씻고 올게, 라는 말을 하며 냅다 안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 한다.

  

평소엔 이불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고 꼼짝도 안 하는 내가 이상할 정도로 적극성을 발휘해 그 편지의 주인공을 알아내려고 한다.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다. 그저 평소에 태종이가 아주 이뻐 보이다가도 편지만 생각하면 눈알을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문틈으로 손을 넣다가 손가락이 끼어버리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더니 놀란 태종이가 서둘러 뛰쳐나와 내 손가락을 낚는다. 겉보기엔 별 다른 외상은 없지만 너무 아파서 온 신경이 펄쩍펄쩍 뛰어댄다.

  

“괘, 괜찮아? 씨발, 그러니까 무식하게 손을 왜 거기로 집어넣어? 미쳤어, 어?”

“개……. 으으으, 개새끼, 말 다 안 끝났는데 들어가 버리는 게 어딨냐고! 으으, 개새끼……. 아이고, 내 검지, 검지가 뭔 죄야…….”

“손가락은 어때, 구부릴 수 있겠어?”

“응, 응.”

“그럼 다행이네. 한 번만 더 병신처럼 문틈에 손가락 집어넣어 봐? 그땐 아주…….”

“편지 어떤 년한테 쓴 거냐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의 허리인지 장딴지인지 잘라가며 소리를 질렀다. 아마 옆 동에서도 편지를 대체 어떤 년한테 썼길래 저 지랄일까 하는 생각을 할 거다. 뜨겁게 타오르는 내 두 눈, 엉성하게 척 벌리고 멍청한 눈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태종이, 그리고 나는 그 멍청하고 바람둥이로 밖에 안 보이는 태종이의 젖꼭지까지 세게 꼬집어가며 정신이 들게 했다.

  

아프다고 궁시렁대는 꼴도 너무 보기 싫어서 코를 때리자 의외로 순순히 맞고만 있다. ‘어, 지도 뭐 찔리니까 맞아주네?’ 이 생각에 기회다 싶어 더 때리려고 하니까 갑자기 또 태종이가 웃는다.

  

저번에 장롱 밑에서 나왔던 그 사진을 박박 찢으며 이 년 누구냐고 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 진짜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 화병으로 디지는 꼴 보자고 저렇게 실실 쪼개댄다. 속이 꽉 들어 차 답답한 느낌에 가슴을 두드리며 노려봤더니 이번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병신처럼 입 헤 벌리고 웃는다. 쟤 왜 저래.

  

“아, 누구한테 쓴 거냐고, 미친 척 하면서 넘어가려고 하지 마.”

“일수가 웬일로 이렇게 열을 내지, 응?”

“씨발, 내 말 먹냐? 미친 척 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지 말라고!”

“제 손으로 하는 세수도 이제 겨우 시작한 일수가 왜 이렇게 열을 내지?”

“한 번만 더 하면 나 진짜 콱 나가버릴 거야.”

“아, 알았어, 알았어.”

  

미안한 척 해도 모자랄 판에 소리 내어 쪼개가며 나를 앉힌다. 진짜 왜 이렇게 죽여 버리고 싶을까, 태종이는 이를 갈아대는 나를 진짜로 위경련, 아니, 위암으로 디지게 만들 속셈인 것 같다.

  

“글쎄, 어떤 년일까?”

“나 갈래.”

“하하하, 일수야, 어떤 년한테 쓴 걸까?”

“아, 놔, 나 갈 거야!”

“일수야…….”

  

자리에서 나와 현관 쪽으로 한 발짝도 못 뗐다. 냅다 나를 껴안는 태종이는 내 입에다 제 입을 박아버렸다. 그렇지, 밥도 아니고 깍두기도 아니고 고기도 아닌 내 입에다가 제 입을 박은 거다. 박치기를 할 의도는 없는 것 같다. 제 앞니로 내 앞니를 깨부수기 위해 내 입에다 붙인 것 같진 않다. 파워도 파워지만 우선 앞니 앞으로 쿠션 역할을 해주는 입술이 먼저 닿았기 때문에 딱딱해서 아프지 않고 아주 부드러웠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좀 더 편한 자세로 고쳐 섰다. 이상하다. 남자끼리 뽀뽀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태종이와 맞댄 입술은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다.

  

내 몸을 완전히 끌어안은 채로 나와 함께 이불 위로 쓰러질 때는 조금 아팠다. 바닥에 부딪쳐서가 아니라 태종이의 딱딱한 몸이 반동으로 부딪쳐서다. 태종이의 몸은 생각보다 더 말랐다. 그럴 수밖에 없지, 나 먹여 살리느라고 그 밥솥 만드는 데인지 어딘지, 거기서 일한다는데……. 뼈 빠지게 고생하는 태종이 몸이 완전히 다 느껴진다. 내 몸 위로 다 겹쳐져서 내 입술 사이로 제 혀를 집어넣는다.

  

음, 이상하다. 왜 나한테 뽀뽀를 이렇게 열심히 하지, 그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늘 눈여겨 봐뒀던 태종이의 이쁜 궁뎅이를 손으로 더듬다가 움켜쥐었다. 그러자 태종이 입이 떨어져나가며 약한 신음소리를 낸다.

  

“흠흠, 방뎅이가 삼삼한데?”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마라.”

“진짜야.”

  

한 번 더 우악스럽게 쥐자 태종이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입에다 또 제 입을 박는다.

  

말은 그렇게 했고 행동도 그렇게 했지만 지금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왜 태종이가 내게 이런 짓을 할까, 왜 태종이는 내가 편지에 관해 물은 것을 기뻐하고 있을까, 의문투성이다. 편지를 누구에게 썼는지 대답도 안 해주면서 내 옷을 술술 벗겨가며 내 목과 옆구리를 물어뜯어댄다.

  

온 몸은 벌겋다. 열이 올라서 식식거리고 있다. 그와 반대로 내 얼굴은 수줍고 다소곳하면서 별 말이 없다. 가끔 옆구리를 공략할 때 깜짝 깜짝 놀랄 뿐이다.

  

늘 봐서 지겨울 법도 한 그시기를 보기 위해 빤쓰를 내리는 태종이에게 이상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보통 남자애들 행세라도 하려고 손으로 그 곳을 가리면서 멍청한 표정으로 눈도 못 마주친 채 말한다.

  

“씨, 씻어야 돼.”

“됐어, 그냥 해.”

“안 돼…….”

  

우물거리며 돌아눕는 날 잠깐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는 태종이는 결국 무방비하게 있던 나를 갑자기 안아들어 올렸다.

  

“아, 깜짝이야, 애 떨어질 뻔했네.”

“일수야.”

“어, 어?”

“간만에 같이 목욕하자.”

  

대답도 못하고 욕실로 애처럼 들린 채 들어간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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