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35)

  

그 날 저녁이었을 거다. 나는 석희가 그런 내기를 걸고 한 2주,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뻐기다가 시작할 줄 알았다. 석희가 그 정도로 행동파인 줄 알았으면 나도 내기 같은 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다. 난 당연하게 태종이가 들어올 시간대에 얼른 세수를 깨끗이 하고, 이도 닦았다. 칭찬 받기 위해 옷도 꺼내 입고 내친 김에 이불도 잘 정돈 해 놨다. 개는 건 무리지만 정돈 정도는 잘 해놓을 수 있다.

  

그리고 현관 근처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태종이가 오길 기다렸다. 7시 때부터 시작했으니 30분이나, 늦어도 8시 안에는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늦게 되면 반드시 전화를 하기 때문에 혹시 몰라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꽂고 불안하게 현관 앞을 돌아다녔다. 처음 걸음 속도는 그다지 빠른 축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8시가 넘어가고, 9시가 넘어가자 점점 불안해지면서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계속해서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며 현관 앞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다 시계를 계속 돌아보고, 다시 뫼비우스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때 한 번만 더 시계를 돌아봤었더라면 그대로 집밖으로 뛰쳐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태종이를 찾아서 정처 없이 뛰어다녔을 거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돌아보려는 찰나 드디어 현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얼른 현관을 뛰쳐나갔다. 들어오다 말고 깜짝 놀라 선 태종이의 얼굴이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었다.

  

냅다 태종이를 끌어안아 가며 집안으로 인도했더니 모처럼 내가 엉겨오는 걸 놓치지 않고 태종이도 나를 꽉 안아가며 굉장히 좋아했다.

  

밝은 집안으로 들어오자 하룻밤 사이에 피곤에 찌들어 보이는 태종이의 지친 얼굴에 놀라서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이런 내 행동에 질세라 태종이도 계속 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옷도 올렸다 내렸다 해가며 뭐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빤쓰 안으로 들어오는 손은 내 똥꼬를 확인한다.

  

“그 씨발새끼 왔지?”

“어, 누구?”

“그 새끼 있잖아, 그 개새끼.”

“그게 누군데?”

“아, 왜, 그……. 이름이 그……. 똑같은…….”

“누구?”

“씨발, 손석희랑 이름만 똑같은 개새끼!”

“아, 석희? 응.”

“와서 뭔 짓 했어?”

“아무 짓 안 했어.”

  

몹시 불안해 보이는 눈초리로 또 내 여기저기를 살펴가며 ‘진짜, 진짜?’ 이 소리만 반복한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부산을 떠는지 모르겠다. 혹시 지금까지 잡혀 있다가 늦은 건가 싶어 석희에게 원인 모를 분노를 느끼게 된다.

  

“뭐 하다 늦었어?”

“뭐긴, 그 씨발 새끼 때문에 늦었지, 뭐겠어! 그 새끼 뭐야, 머리 존나 돈 새끼 아냐? 씨발, 요즘 모기들이 모기약 처먹고 개량 되나 봐, 그 새끼 두개골을 모기 침이 뚫고 들어가서 뇌수를 쪽 빨아 먹은 거 같애.”

“그게 뭔 소리야?”

“한 마디로 존나 뇌에 가뭄이 들었다는 거지! 머리 뚜껑 열어보면 거기에 호두 씨 같은 게 들어 있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고 계속 욕을 퍼부으면서 신경질 적으로 옷을 벗어 던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진짜 궁금하고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서 또 태종이 주변에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고 돌아다니자 정신없다며 나를 이부자리에 밀쳐놓고 그 옆에 앉아 마저 벗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안에 입는 티를 벗으려고 할 때 내가 옆에서 도와주자 태종이가 잠깐 얼굴을 벌겋게 했다가 내 손에 옷을 맡기고 가만히 있다. 벗겨달라는 거 같다. 왠지 신뢰 받는 기분에 우쭐해져서 최대한 배려해가며 옷을 벗겨주자 바로 드러나는 맨몸으로 나를 끌어 당겨 내 입안에 제 혀를 쑥 집어넣었다. 아주 못 참겠다고, 이제는 나를 눕혀놓고 기껏 입은 옷을 귤껍데기 마냥 마구 벗겨가며 드러나는 속살들을 주물주물 한다. 완전히 끝까지는 잘 가지 않지만 이젠 전혀 거칠 게 없다는 거다.

  

우린 서로 좋아하고 있고, 같이 살고 있고,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단 둘 뿐이다.

  

내 목을 물어가며 남의 그시기를 쥐고 휘둘러대던 태종이 손 때문에 입을 떼자마자 베개에 얼굴 처박고 소리를 죽였다. 옆집에 소리가 들리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이는 내가 소리 내길 원한다. 때문에 자꾸 내 입을 막던 베개를 치우고 입을 막으려는 손을 치운다.

  

“근데 서, 석희가 뭐래? 왜, 왜 붙잡고 있었……. 흐윽, 으응…….”

“씨발, 넌 꼭 지금 그 새끼 얘길 해야겠냐? 기껏 피곤한 몸으로 겨우 달아올랐는데 너 때문에 식잖아.”

“난 그게 더 중요하고 궁금해, 너한테 뭔 짓을 해서 늦었는지……. 어윽, 죽겠다.”

“그냥 말 안 하면 안 될까, 진짜 기분 존나 드러운데.”

“난 들을 거야!”

  

어디선가 괴력이 샘솟아 그대로 태종이에게 달려들어서 밀어 넘어뜨렸다. 다행히 이불 위라 머리를 박아서 두개골이 파손 되는 위험은 면했지만 태종이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나 보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얼마 본 적 없는 멍청한 표정이 된다. 내가 이 정도로 석희와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거다. 하긴, 나는 내가 봐도 남의 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게 생겼다. 그리고 원래는 늘 그랬었다.

  

태종이가 아마 최초일 거다. 자꾸만 나 없을 때 뭔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궁금해지는 인간은 태종이 뿐이다.

  

배 위에 올라타서 지금의 감정을 얼굴에 담은 채로 태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해보면 처음 개 모집하는데 사진을 보낼 때 태종이의 사진을 보냈었고, 태종이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 나보고 면접 보러 오라고 했었다. 개고 뭐고 간에 단박에 그들 마음에 들게 한 태종이의 얼굴은 정말 값지다. 만일 내 사진을 보냈더라면 그들은 날 서류심사에서 탈락시켰을 거다.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태종이는 한참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알았어, 얘기할게.”

“진 작 그럴 것이지.”

“아, 진짜 좆같은 걸 어떡하냐고, 입에 담기도 싫어!”

“대체 어떻길래 그래?”

“씨발, 말도 마라. 그 새끼 생긴 거 봐서 좀 생각이 있는 새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야. 내가 일 끝나고 나오는데 앞에 그 새끼가 차 대놓고 있더라고, 난 또 싸움 걸러 온 줄 알았지. 안에서 연장 챙겨가지고 나오니까 날 보고 뭐래는 줄 아냐?”

“뭐랬는데?”

“난 니가 존나 좋으니까 내 차에 타라.”

“진짜 그랬어?”

“아니, 존나는 내가 붙인 거야.”

“그, 그래서 차에 탔어?”

  

나도 모르게 얼굴을 바짝 내밀어가며 물었다. 내 적극적인 반응에 조금 놀란 태종이가 뒤로 물러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 끄덕거리는 고개가 굉장히 밉게 느껴졌다. 입을 쩍 벌려가며 놀라는 내 얼굴에 대고 태종이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한다.

  

“내가 살면서 그런 차에 언제 타보겠냐, 기회라고 생각하고 탔지.”

“태종아…….”

“승차감이 죽였었어.”

“아니, 그…….”

“괜찮아, 연장 챙겼었다니까. 아, 그리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갑자기 나를 그대로 데리고 밥 먹으러 갔어.”

“바, 밥? 막, 비싼 레스토랑 같은 데?”

“응.”

“그래서, 같이 밥 먹었어?”

“고기 먹어 본지 좀 오래 되서 배도 고프고…….”

“아, 태종아…….”

“스테이크를 거의 들이 마시다시피 처먹었어, 그 새끼가 나보고 얼마나 굶으면 그렇게 먹을 수 있냐고 묻더라고.”

“그럼, 밥만 먹고 온 거지? 그냥 배고파서?”

“어떻게 밥만 먹고 오냐!”

  

내 눈알이 쩍쩍 갈라지는 건 생각도 안 하고 큰 소리로 웃는 태종이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태종이를 믿었는데, 석희의 차에 탄 것도 모자라 밥도 먹고, 또 뭔가를 하고 왔다! 물론, 나도 석희를 집안에 들인 전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태종이에게 다 꼬바른 건 아니고, 태종이는 당당하게 자신의 바람기를 내게 폭로하고 있다.

  

어지러운 머리를 문지르면서 태종이의 꿈꾸는 눈을 바라봤다.

  

“옷도 사주더라고!”

“태종아…….”

“목걸이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고…….”

  

말하는 내내 웃으며 좋아하느라고 태종이의 날씬한 몸이 들썩거렸다. 어떤 것을 샀다고 내게 자랑하는 동안 태종이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사실 태종이의 외모나 인간성을 봤을 때 태종이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돈 잘 벌고 외모도 근사한 사람, 석희 같은 사람이 태종이 같은 인간을 그냥 내버려둘 리는 없다. 땡전 한 푼 없이 기어 들어와 밥만 축내는 벌레 같은 나보다 석희와 있는 시간이 훨씬 좋을 거다.

  

태종이가 드디어 자신이 들고 온 쇼핑백을 내게 내민다. 그리고 그것을 일렬로 늘어놓더니 하나를 앞 쪽으로 내 쪽으로 밀어 보여준다. 뭔지 몰라서 기웃거리자 태종이가 신발이라고 말한다.

  

“이건 장인어른 거.”

“응?”

  

환하게 웃으며 다음 쇼핑백을 민다.

  

“이건 장모님 목걸이.”

“뭐?”

“이건 니 동생 옷……. 씨발, 내가 왜 그 새끼 걸 챙겨야 돼?”

“엥?”

“그리고 이건…….”

  

마지막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낸다. 빨간 색이고, 둥그렇다. 그건 아무리 봐도 변기 커버였다. 그리고 줄줄이 뭔가가 딸려 나온다. 세제, 퐁퐁, 참기름…….

  

내 앞으로 척척 얹는 태종이는 제 이마를 닦는다.

  

“그 병신 새끼, 나한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다음 주에 니네 집 가기로 했잖아, 근데 내가 선물 살 돈이 없어서 계속 걱정이었거든. 근데 잘 됐지, 선물 살 돈도 굳었고……. 게다가 이런 비싼 선물 주면 그래도 좀 덜 맞을 거 아니야, 요 사랑스러운 아들을 내가 갖겠다는데. 그리고 세제랑 떨어진 게 생각나서 그 새끼 협박 해다가 이거 다 샀어. 병신새끼, 하필 고르고 골라도 나 같은 놈한테 빠지냐.”

“석희는 이 사실 알아?”

“알면 사주겠냐, 내가 존나 갖고 싶다고 난리쳤지. 그 새끼가 존나 의심은 많아, 돈 많은 새끼 주제에 나 같은 사람한테 적선 한 번 하는데 존나 비싸게 굴어서 내가 소리 지르고 난리 치니까 할 수 없이 사주더라. 다른 건 몰라도 목걸이는 확실히 내가 할 게 아니란 걸 알거든, 워낙 나이 있는 여자 취향의 목걸이라…….”

“이런 명품 매장에서 소리 지르고 난리쳤다고?”

“씨발, 계속 의심하는데 어떡해, 악이라도 써야지.”

“무섭다.”

“그리고 이건 너랑 내 선물.”

  

이번엔 쇼핑백이 아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또 무슨 물건이 나올까 두려움에 떨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짠, 소리와 함께 뭔가를 내민다. 귀 후비개였다.

  

“우와!”

“니가 저번에 장롱 밑으로 이거 떨어뜨리는 바람에 잃어버려서 그 뒤로 계속 귀 가렵다고 난리 쳤잖아, 나도 미칠 뻔했거든. 이것도 내가 난리쳐서 두 개나 샀어. 하나 잃어버려도 계속 팔 수 있다!”

“으아, 태종아 사랑해!”

  

내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태종이 몸이 또 뒤로 넘어갔다. 이번엔 아주 제대로 박아서 제법 큰 소리가 나고 말았다. 발버둥 치며 나를 밀어내려는 태종이 몸을 세게 끌어안으며 머리를 그 목에다 묻었다.

  

아무리 태종이가 별 마음 없다 하더라도 듣는 내가 진짜 심장 떨려서 못 살겠다. 지금이라도 그 내기 건은 취소해야 되지 않나 싶다. 진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상하게 태종이가 석희와 함께 있었던 얘기를 하면 굉장히 짜증나고 듣기 싫어진다. 설마 진짜 이게 그 찌질한 질투라는 건가? 지금 이 감정대로라면 그대로 태종이 직장까지 쫓아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미행할까, 그래, 몰래 쫓아가 봐야겠다. 불안해서 그냥 엉덩이 붙이고 못 앉아 있겠다.

  

“근데 왜 입에 담기도 싫다는 거야?”

“어?”

“또 뭔 일 있었어?”

“어, 씨발 그 좆뱅구 새끼가 집에 오는데 차안에서 내 옷을 벗기려고 하잖아, 그래서 쇠몽둥이로 마사지 해주고 왔지. 존나 소름 돋아, 옷 속에 그 새끼 손이 들어갔었다니까? 아, 목욕해야겠어.”

  

내일 진짜 따라가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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