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35)

  

다녀올게, 하고 내 입에 제 입을 맞춘 멋진 태종이가 집을 나섰다. 그리고 창밖만 유심히 보며 태종이가 꽤 멀리로 나가는 꼴을 보자마자 냅다 옷을 갈아입었다. 늦으면 안 돼, 하고 서둘러 갈아입은 옷은 내가 고등학교 때 입었던 교복이다. 인간적으로 난 옷이 정말 적고 변장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허를 찔러 고딩인 척 하면 모를 것 같았다. 거기다 태종이가 가끔 쓰는 안경도 쓰고, 가방을 맨 다음 서둘러 태종이를 따라잡았다.

  

머리도 일부러 태종이 감을 때 옆에서 괜히 같이 있고 싶은 척 같이 감았다. 태종이는 나 감겨주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미안해, 난 너를 못 믿어서 이러는 거야, 속으로 좀 괴로웠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난 태종이 뿐이고, 태종이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난 욕심이 은근히 많다. 아니지, 특히나 태종이에게 심한 욕심을 부리는 것일 수 있다. 아무튼, 난 태종이 없으면 못 산다!

  

간만에 입어서 그런지 약간 헛헛하면서 어색한 교복 때문에 계속 바지를 올려보고 칼라를 정리하면서 갔다. 이상하게 너무 불편하다.

  

버스를 타는 태종이 따라 태종이보고 과자 먹고 싶다고 졸라서 받은 돈을 꺼냈다. 뜬금없이 웬 과자냐며 과자 욕심 별로 없던 나를 새삼스럽게 여기던 태종이는 선뜻 내게 3천원을 줬었다. 지금 잔돈은 이거 밖에 없다고 했다. 미안해서 2천원만 갖고 천원은 돌려줬다. 어차피 버스 두 번만 타니 상관없다.

  

이것으로 내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드러났다. 버스비 2천원 쓰면, 하루 종일 뭐 먹고 지내지?

  

난 진짜 멍청하다. 그래도 하루 굶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부러 태종이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 숙인 채로 제일 앞쪽에 서서 갔다. 스물한 살이나 먹고 입은 교복이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조금 불안하다. 겉늙은 고딩이라고 하기엔 진짜 교복이 너무 어색하다. 하지만 확실히 교복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제일 신경을 안 쓴다. 그래서 미행하기 딱 인 것 같다.

  

살짝 살짝 돌아본 곳에는 태종이가 뒷문 앞에 서서 제 손목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옆모습도 근사한 태종이는 늦었는지 약간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아는 체도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 무슨 짝사랑에 빠진 남학생도 아닌데…….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올라타기 시작한다. 심상치 않을 정도로 끊이지 않는 카드 찍는 소리에 고갤 숙여가며 태종이 근처로 옮겨갔다. 역시 출근시간대, 등교시간대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일부러 모른 척 태종이가 서 있는 곳에서 두 자리 너머로 섰다. 동시에 그 가운데를 빼곡이 메우는 사람들로 태종이가 머리끝만 보이게 되었다. 이러면 좀 따라잡기가 힘들 것 같다. 약간 사람을 헤치며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으려고 다가갔다. 정말 딱 한 사람 사이에 두고 나와 태종이는 나란히 서게 되었다. 이렇게 가까이 하기가 힘들다니!

  

슬쩍 내다보면서 태종이가 계속 시계를 확인하는 것만 봤다. 역시 아직 눈치를 못 챈 모양이다. 좀 재밌는 느낌에 콧노래를 불러가며 태종이가 내릴 때만 기다렸다. 중간에 계속 돌아보고, 계속 있는 걸 확인하면서 좀 체 수그러들지 않는 인파로 내 몸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이 조금 졸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태종이가 없었다. 놀라서 서둘러 사람들을 헤치고 마침 우르르 내리는 고딩 애들 사이에 섞여서 내렸다. 언제 갑자기 태종이가 내렸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밖을 웬만해선 거의 나오질 않는 내가 길 한 번 잃으면 완전 끝장이다. 진짜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다.

  

버스 노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가 뭘 타고 왔는지조차 모르겠다. 아, 괜히 따라왔어, 하는 생각도 든다. 진짜 눈물 날 것 같다. 그러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어야했는데…….

  

일단 벤치에 앉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도 모르는 내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또 핸드폰을 안 챙기고 나왔다. 태종이에게는 입이 찢어져도 이런 곳에 있다고, 교복까지 챙겨 입고 미행하다가 이상한 곳에 내렸다고는 절대 말 못 한다. 그럼 외우는 번호도 없는데 어떡해야 할지 막막하다. 경찰서에라도 갈까, 사람 미행하다가 놓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할까?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또 있을지 의문이다. 몇 세기가 지나도 나 같은 미친놈이 태어날 확률은 아주 미미할 거다.

  

보나마나 태종이는 일 끝나고 또 석희와 희희낙락 해가면서 밥 처먹고 옷 사 입고 할 거다. 그 동안 난 뭘 하지, 천원 밖에 없는데 진짜 뭐 하지? 아, 진짜 답 안 나온다.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벤치 한 쪽에 놓은 다음 그걸 베고 하늘을 보았다. 쪽팔리고 무서워서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진짜 어떡하냐. 아니, 차라리 교복을 입고 오질 말걸. 태종이에게 전화도 못 해보고 이게 뭐냐?

  

누워서 다리를 덜덜덜 떨고 있으니 갑자기 내 위로 누가 서서 날 내려다본다. 노숙자 처음 보나보다. 하긴, 나도 교복 입은 노숙자는 처음 본다. 교복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그냥 옷 수거함에서 주웠다고 해야지.

  

“너, 혹시 깍두기?”

  

눈이 부셔서 안경을 벗고 있는 바람에 누가 날 알아본다. 흠, 근데 내 이름은 깍두기가 아닌데 듣기는 좋다. 내가 깍씨였으면 나중에 애 낳아서 두기라는 이름을 지으면 참 좋을 거다. 매일 같이 깍두기야, 깍두기야, 정말 듣기 좋은 이름이다. 애도 기뻐할 거다.

  

“어, 맞네, 그 맹한 얼굴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아, 너 그 교복 보니까 거기 다니네? 뭐였지, 영지고등학교인가? 별명이 영지버섯 해가지고 완전 깡촌에 있는 학교잖아! 학교 뒤로 논밭 있고, 골프장 있고……. 야, 너 거기 다니는 구나, 근데 여긴 어쩐 일이냐?”

  

내가 다니던 학교 이름이 영지고등학교였구나, 새삼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근데 나 3학년 때 몇 반이었지?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근데 너 몇 학년이냐? 온 김에 일주랑 보고 가라, 내가 너 얘기 했더니 너 엄청 보고 싶어 했어.”

  

아, 자세히 보니까 저번에 깍두기 뒤집어썼던 걔 같다. 그럼 우리 집 알겠네?

  

“그럼 나 집에 데려다줄 거야?”

“집?”

“너 깍두기 뒤집어썼던 데 있잖아.”

“아, 그 노래방 옆에? 어, 당연하지. 내가 아주 잘 모셔다 줄게, 일주 보고 가라.”

“응.”

  

그래도 다행이다, 아는 사람을 만났다니. 내 이름하고 엄청 비슷한 일주인지 이주인지를 보러 그 남자애랑 같이 갔다. 몇 학년이냐고 물을 정도면 내가 그렇게 교복이 안 어울리는 건 아닌가 보다. 그건 좀 다행이다. 남자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지나가는 애들마다 인사를 한다. 미스코리아가 된 기분으로 나도 덩달아 손을 흔들어 주고 있으니 그 남자애가 나 보고 재밌는 놈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소리다.

  

학교 뒤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 남자애는 곧장 보이는 무리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 무리는 내가 학교 다닐 적에도 익숙하게 보던 그런 애들과 비슷했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담배를 빨고 있는 그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담배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피는 걸까, 먹지도 못 하는데……. 참 이해가 안 간다. 반찬으로도 쓸모없는 담배를 저런 식으로 피우다니…….

  

근데 그 중에 이상하게 낯이 익는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은 나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날 데려온 남자애는 애들 중 가장 키가 크고 멋들어지게 생긴 놈한테 나를 소개했다.

  

“일주야, 데려왔어. 저번에 말했던 그 개…….”

“어, 이 새끼야?”

  

딱 봐도 18살 정도 먹어 보이는 놈이 나보고 이 새끼라고 한다. 자존심 상하지만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곧 집으로 데려다줄 거다. 일단 그냥 참아야겠다. 쓰지도 않던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코가 너무 간지럽다. 파고 싶은데 왠지 파다가 맞을 분위기다. 눈치 없는 나라도 이런 분위기에선 함부로 코에 손을 못 넣겠다.

  

간신히 욕구를 누르고 있는 와중에 내 근처로 아까 낯익다고 판단했던 놈이 다가온다. 교복을 입고 있어서 조금 헷갈렸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석현이였다.

  

설마 나를 알아보나 싶어서 일부러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더니 그래도 굳이 따라와서 내 얼굴을 유심히 본다. 급기야 안경을 벗기려는 통에 손을 밀어내고 얼른 나를 데려왔다는 그 남자애 뒤로 숨었다.

  

“뭐야, 너 왜 갑자기 관심이냐? 왜, 이 이쁜이가 일주 거라 배 아픈 거야?”

“아니, 내가 아는 사람 같아서……. 혹시 너, 남일수라고 알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어가며 더욱 열심히 남자애 뒤로 숨었다. 하지만 나와 키가 삐까하는 통에 별로 숨어지지 않아 아까 그 키가 제일 컸던 놈 뒤로 들어갔다. 아, 여기가 딱 가려지고 좋네, 석현이한테 들키면 완전 개쪽이니까 아닌 척 해야지. 내가 괜히 교복 입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눈치를 못 채는 것 같다. 왠지 뻔히 속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꽤 재밌다.

  

“이거 생각보다 귀엽게 노네? 야, 괜찮아, 안 잡아먹으니까 나와 봐.”

  

나를 숨겨주던 키 큰 놈이 내 손목을 잡아 당겨서 제 옆에 낀다.

  

“그냥 개로 만들기는 좀 아깝게 생겼는데, 너 이름 뭐냐?”

  

왜 다들 자꾸 이름을 붙잡고 늘어지는 거야, 생각해둔 이름도 없어서 머리가 아프다. 뭐라고 하지, 무슨 이름을 하지, 싶다가 떠오르는 이름 아무거나 댔다.

  

“두기.”

  

깍두기.

  

“두기? 진짜 그게 니 이름이야?”

“응.”

“이름이 뭐 그러냐, 뭘 둬?”

  

날 데려왔던 남자애는 내 이름 가지고 계속 웃는다. 옆에 석현이는 계속 저 혼자 뭘 생각하는 눈치로 ‘두기’라는 이름을 중얼거린다. 이러다 들키는 거 아니야? 왠지 초조한 기분에 얼른 그 남자애 팔을 끌었다.

  

“봤으니까 집에 데려다 줘.”

“뭐?”

“보러 오면 데려다 준다며, 봤으니까 갈래.”

“너 뽀뽀지?”

  

한참 남자애 팔을 붙잡고 말하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석현이를 돌아 봤다. 내 얼굴을 정확히 가리키면서 눈을 찌푸리던 석현이는 급기야 내 안경을 빼앗았고, 그대로 드러나는 내 얼굴을 보면서 화들짝 놀란다. 아, 진짜 미쳐버린다. 석현이에게 들키면 석희 귀로 들어갈 텐데 무슨 망신이냐, 이게!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서 있는 날 보고 그 남자애는 뽀뽀가 뭐냐, 그리고 키 큰 남자애는 왜 남의 거한테 관심 가지냐고 뭐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석현이가 외친다.

  

“너 고딩이었어?”

  

절절해 보이는 석현이의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던 손을 내려놓고 멍청한 얼굴로 석현이를 바라보다가 한 쪽 입꼬리만 올려가며 웃었다.

  

나보다 멍청한 인간은 몇 세기 동안 석현이 하나뿐일 거다.

  

“어, 그랬구나, 어쩐지 좀 뭔가 이상하다 했어.”

“뭐야, 아는 놈이야?”

“어, 아, 아니…….”

  

키 큰 놈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면서 말하자 석현이가 고개를 저어가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식 웃었다. 뭔가 이상하다. 뭔지 몰라도 별로 좋은 건 없을 것 같다.

  

“야, 일주 너 좋겠다, 이렇게 귀여운 개도 다 생기고…….”

“왜, 배 아퍼?”

“당연하지, 쓰다 남으면 나도 좀 줘라.”

“그래, 남으면.”

  

내 얼굴을 보면서 끽끽 웃는 석현이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가 내 어깨를 감싸는 동시에 나가자는 키 큰 놈의 말에 애들이 우르르 뒷문으로 학교를 나갔다. 애초에 수업 받을 생각이 없었나 보다. 특히 일주인지 하는 키 큰 놈은 계속 내 어깨를 만져가며 저한테 딱 붙이고 걷는다. 가끔 그 얼굴을 올려다보면 식 웃어주며 오늘 마음껏 이뻐해준다고 한다. 안 이뻐해줘도 되니까 집에 보내줬으면 한다. 아니, 데려다줬으면 한다. 혼자는 못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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