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5)

  

 [개를 만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담임에게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드디어 돌아가셨구나!’

  

결코 내가 아버지에 관해 못된 감정을 가지고 한 생각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 즘 내내 오늘 내일 하면서 굉장히 아프셨기 때문에 나도 하루하루가 불안불안 했었다. 특히나 술을 오지게 좋아하셨던 아버지라 생각하는 것도 단순하고 깊게 생각하려들지 않으셨다. ‘술 그만 먹어, 아빠!’라고 말하면 ‘그래, 아빠 이제 술 안 먹어!’라고 대답해놓고 그날 저녁 고주망태가 되어서 들어오시곤 하셨다.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 그의 마지막도 참 아버지답게 가셨다.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자주 가는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오셨다. 그리고 내 이부자리에서 누워 주무시다가 갑자기 구토를 하셨는데, 그 토사물이 기도를 막아 돌아가신 거라고 한다.

  

일생을 술로 보내시더니, 마지막도 그 좋아하는 술과 함께 가셨다. 어쩌면 괴롭게 각혈을 하거나 아픈 위를 끌어안으며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게 가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친척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당시에도 돈에 미쳐 살았다. 아니, 돈의 노예였다. 돈을 악착같이 모으기 위해 남들 하는 입시 준비도 하나도 하지 않고 알바만 죽어라 뛰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남들 다 사는 크리스마스 씰도 하나 안 사봤고, 남들 다 마련하는 새 학기 공책도 한 번을 안 사봤다. 필기는 학교 앞에서 나눠주는 학원홍보용 노트로 충분했다.

  

남들 다 타고 다니는 등굣길 버스도 이용 한 번을 안 해봤다. 지각을 하더라도 나는 2시간 거릴 매일 걸어 다녔다. 친척집에선 이쪽으로 전학을 오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장학금 때문이다. 1년이나 공짜로 다닐 수 있는 기회를 그냥 차버릴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벌려고 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짐작되는 것이 없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와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나의 집착을 전부 설명하기 많은 부족함이 따른다. 황금 같은 나이에 여자도 모르고 살고, 남 주기 아까워하면서 나 혼자만 아주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가끔 아빠와 일찍 이혼해서 따로 가정을 꾸리신 엄마에게 용돈도 타러 가고, 그 용돈을 위해서 별로 기억에 없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엄마에게 엄마 소리를 잘도 했다.

  

일수와의 첫 만남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린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아니, 거의 일방적으로 일수가 유독 내게 친한 척을 했다. 그렇게 심하게 친하진 않지만 언제나 같이 밥을 먹는 친구녀석들 사이에 끼게 된 일수는 이상하게도 내게 진한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조언을 구하고 내 말 없이 혼자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내 말을 아주 잘 듣는 일수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신경이 온통 일수에게만 쏠렸다. 일수가 넘어지면 내가 ‘아차!’하게 되고, 일수가 혼나면 내가 또 ‘저런!’이라고 하게 되고, 일수의 물건이 망가지면 내가 ‘아이고!’하게 되었다. 결국은 자리까지 바꿔가며 일수와 같이 앉아야 했다. 왠지 그냥 지켜보면 너무 불안한 부분이 많아서 내가 곁에서 지켜봐주고 싶었다. 게다가 당시 일수는 정말 귀엽게 생겼었다. 여자같이 사랑스럽게 생긴 건 아니었지만 맹해 보여서 상당히 귀염성 있었다.

  

그건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 중간고사를 대비하면서 생긴 일이다.

  

일수는 그 날 날짜 때문에 자신의 번호가 걸릴 걸 예상하고 내게 자신의 영어책을 내밀었다.

  

“나 이거 발음 좀 밑에 써줘.”

  

영어라곤 정말 쥐뿔도 모르는 일수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부탁이었다. ‘고등학생씩이나 되어서 영어교과서에 나온 본문을 한 글자도 읽지 못할 수가 있나!’ 생각해봐도 그런 상식이 통할만한 상대가 아니다. 나는 샤프로 밑에 발음들을 써가며 이걸 어떤 식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내 말을 열심히 듣던 일수는 혼자서 읽는 연습을 했고, 괜히 신경 쓰여서 시간이 없어 항상 쉬는 시간에 끝내오던 내일 숙제를 하다 말고 그런 일수를 구경했다.

  

내가 써준 대로 발음을 열심히 굴리던 일수의 필사적인 옆모습을 볼 때의 그 감정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중요한 건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는 거다. 진짜 웃고 싶었다. 웬만한 시트콤보다 더 재밌어서 진짜로 멍하게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기까지 했었다.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지어본 웃음은 그 때까지 전혀 있을 수가 없었다. 매일 돈과의 전쟁 속에서 나는 한 가지 목표를 가졌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독립을 하는 거다. 친척집은 숨 막히고 답답해서 있을 수가 없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반 지하 방이라도 하나 얻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껄끄럽지만 아빠의 부재 때문인 것 같다. 친척집에서 산다고 하면 진짜 고아 같고 불쌍해 보이는 놈 같아서 그게 싫다. 그냥 따로 나와 살고 있다고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다.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멍청한 발음으로 영어를 읽는 일수를 보며 옆에서 그러고 웃자, 한참 영어책에 빠져있던 일수가 날 이상하게 봤다.

  

“왜 그래?”

“뭐가?”

“내가 웃겨?”

“어, 아니, 재밌어서.”

“뭐가?”

“아니, 어떻게 된 게 몇 번을 해도 발음이 안 나아지는 게 너무 재밌잖아.”

  

순식간에 표정이 구려지는 일수는 갑자기 책을 탁 덮고 그 위에 제 이마를 박았다. 뭐 하는가 싶었더니 내 말에 삐쳐서 연습 안 하겠다고 반항하는 거다. 그 모습까지 하도 웃겨서 나도 이마를 책상에 박고 끅끅거리면서 웃었다. 나란히 이마를 박고 있는 우리를 보고 애들이 지나가면서 뭐하냐고 물어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특별히 일수가 무리해서 개그를 치거나 말재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수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애들이 축구 하는 운동장을 돌아다니다 뒤통수에 볼맞고 쓰러지는 것도 웃기고, 수학시간에 나와서 문제 풀어보라고 했더니 조느라 맹한 얼굴로 일어나자마자 냅다 넘어지는 것도 웃기다. 다른 녀석들도 일수를 재밌게 여기며 모두의 남동생처럼 대접받고 있었다.

  

일수는 항상 뭔가에 쫓기든 내게 답을 구했다.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내가 악착같이 공부했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건 그냥 말 그대로 장학금을 위해서였다. 1년만 장학금으로 어떻게 하고 나면 그동안 모은 돈으로 남은 2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공부를 소홀히 해서 평균 정도의 점수만 유지했다.

  

늘 돌아오는 체육시간은 시험기간이 다가오자 자주 자유시간을 주었다. 그냥 공 차놓고 ‘축구해라’라는 말을 했다.

  

애들은 일수를 귀여워 해주면서도 축구에 잘 끼어주지 않았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인간적으로 축구의 룰조차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수가 끼면 진행이 잘 안 되었다. 한 마디로 그냥 이쁜 인형 취급은 하지만 같은 반 친구로 대해주진 않는다는 거다. 못 하는 부분은 함께 하면서 가르쳐주고, 일깨워주면 되는 것을 저들 놀기 불편하다고 나 몰라라 한다. 그 점이 정말 불만이었다. 알게 모르게 화가 나고 그런 애들을 보면서 이상한 배신감이 들었다. 내 자신이 일수 나름대로 보통 애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축구를 시작하려는 찰나 내가 애들에게 말했다.

  

“야, 그러지 말고 일수 좀 껴서 하자, 계속 저렇게 앉아서 구경만 하잖아.”

  

일수는 정말 할 일 없는 표정으로 모래장난을 하면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꽤 안 되어 보이는 그 모습 때문인지 내 말에 너도나도 찬성을 하더니 결국 일수를 골키퍼로 들여보내 주었다. 애들은 간단하게 룰을 설명해줬고, 일수도 열심히 알아들은 눈치였다. 서 있는 폼이 정말 불안해보이고 자세도 영 시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어차피 노는 거라 골 좀 먹혀도 뭐라 하진 않겠지 싶었다.

  

문제는 다른 반 녀석들 몇 명이 끼었다는 거다. 몇 명의 친구로 보이는 놈들이 끼기 시작하면서 점점 놀이가 아닌 진짜 경기가 되어 갔다. 이상할 정도로 볼에 집착하고, 몸싸움에도 감정을 실어갔다.

  

급기야 다치는 놈이 나오자 애들 눈에 독기가 피어갔다. 나도 엎어져 팔꿈치가 까지고 나서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화가 나서 심하게 밀치다가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일수였다. 하필 이럴 때 골키퍼를 맡아서 골 한 번 먹을 때마다 욕이란 욕은 다 먹어야 했다. 내심 그런 부분에서 괜히 끼어줘 가지고 욕먹는다고 미안해했다.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체육시간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 다른 반 녀석들 중 가장 덩치 크고 힘이 센 녀석이 찬 공을 그냥 차라리 먹히고 말지, 욕먹은 게 억울하다고 제 나름대로 막아보려는 일수가 몸을 날려 그 공을 막았다.

  

막아도 손으로 막을 것이지, 못 막으면 그냥 피하고 말 것이지, 굳이 그걸 얼굴로 받아 버린 바람에 코피도 터지고 기절도 하고 그랬다. 것도 그냥 코피도 아니고 쌍코피였다.

  

양호실로 급하게 데려다주고 교실로 올라가자 애들은 상당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저들이 욕이란 욕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못 막을 거면 말을 하던가, 그냥 말든가 하고 궁시렁거렸다. 그렇게 이뻐할 땐 언제고, 진짜 한심한 놈들이다.

  

  

***

  

  

내가 본격적으로 일수가 정말 좋아진 건 외부봉사활동 시간이 있었을 때였다. 그 전에도 봉사활동 시간은 많았지만 그 날은 아주 특별했다. 꽤 멀리까지 나가서 쓰레기를 주웠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일수와 그리 친하지 않았으니 함께 행동하지 않아 몰랐지만 그 때부터는 일수와 계속 붙어 다녔다. 일수도 나와 다니고 싶어 하는 눈치라 자연스럽게 일수와 2인 1조가 되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고등학생들에게 가장 큰 추억거리가 될 수 있는 곳은 아주 단순하고 전혀 쓸데없는 것에 있다.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처럼 소풍을 자주 나가진 못하지만 대신 봉사활동은 정말 토 나오게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나가서 힘들게 누구 수발을 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근처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는 정도만 한다.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교실을 나가, 그것도 하나 같이 경치 좋고 공기 맑은 곳에서 쓰레기 몇 개씩 주워가며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그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물론, 줍는 게 귀찮아 쓰레기통 터는 건 기본이지만 어쨌든 그 공기 좋고 햇빛 따사로운 때에 교실을 나와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때가 굉장히 새삼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하교하고 나면 대부분 해질 무렵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일수는 계속 자신이 봉투를 들려고 했다. 들기 불편하니까 내가 든다고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질 않고 꼭 내 말에 토를 달았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수가 근처 매점을 발견하고 거기를 가리켰다.

  

“태종아, 물 사먹자.”

“뭔 물, 방금 사다 먹었잖아.”

“아, 목말라.”

“넌 1분에 한 번씩 물을 사다 마시냐? 아주 2리터짜리 하나 사서 들고 다녀라.”

“그럴까?”

“만일 니가 내 말대로 그런다면 난 쪽팔려서 더는 너랑 못 다녀.”

“그런 게 어디 있어? 아, 나 목 마르다고!”

“알았어, 알았어.”

  

하는 수 없이 매점까지 가줬더니 또 물을 사다가 열심히 들이마신다. 난 옆에서 껌을 사다 씹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카시아였다.

  

난 껌 한 번 씹기 시작하면 뱉는 걸 잊어버리고 계속 씹는다. 이 닦기 전까지는 절대 입에서 뱉는 법이 없다. 저번에는 모르고 그냥 칫솔을 입안에 넣었다가 완전 난리 났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징그럽고 토 나온다. 내가 껌을 씹고 있으니 지도 씹고 싶은 눈치로 내 입만 열심히 바라보는 일수 때문에 ‘껌 줄까?’하고 묻자 갑자기 놀라면서 ‘됐어.’라고 대답했다.

  

자갈길 따라 걷다가 분수대가 나오자 일수는 정말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아카시아는 맛있긴 한데 단물 다 빠지면 고무풍선 씹는 느낌 들지 않아?”

“어, 좀 그렇더라.”

“나 진짜 껌 언제까지 씹을 수 있는지 씹어봤거든.”

“며칠 걸렸냐?”

“몰라, 이틀인가, 그 쯤 되니까 껌도 다 녹아서 흐물흐물 해지더라. 휴지 씹는 것 같았어.”

“존나 토 나온다.”

“너도 해봐.”

“됐어.”

“재밌어, 이 닦을 땐 껌 벽에다 붙여놓고 닦은 다음 다시 떼서 먹고…….”

“그럴라면 뭐 하러 이를 닦냐?”

“기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

  

분수대에 일수와 나란히 앉아서 사람들 산책하는 꼴과 내리쬐는 햇살을 구경했다. 정말 기분 좋았다. 시간을 보니 2시 반쯤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교실에 박혀서 수업을 받았을 시간이다.

  

내 어깨로 기대오는 일수에게서 나는 굉장히 좋은 뭔가를 느꼈다. 보통 남자새끼들은 여자의 샴푸냄새 가득한 젖은 머리에 그런 감정을 갖는다지만 나는 달랐다. 땀에 절여진 일수의 머리칼이 내 볼에 달라붙으면서 나도 모르게 일수의 어깨로 팔을 둘렀다. 정말 더운지 온 몸이 뜨겁고 물을 자주 찾는다. 금방 산 물병에 물이 벌써 30프로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땀내가 가득한 그 머리를 쓸어 넘겨주면서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느긋해지는 통에 그 머리에 내 머리를 댔다.

  

우리는 집합시간까지 그러고 있었다. 일수는 물을 마시고, 나는 일수의 머리에 내 머리를 대며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그렇다고 많은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내 볼에 들이닥치는 선선한 바람이나 이마로 닿는 뜨거운 햇살 같은 걸 느끼면서 그러고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일수는 반장의 ‘야, 집합이래!’라는 말 한 마디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제 가랑이를 쥐었다.

  

“나 오줌 마려.”

“뭐? 야, 어차피 출석체크만 하고 바로 가니까 그 때까지만 참아.”

“쌀 거 같애, 진짜로…….”

“에이, 씨.”

  

서둘러 매점 뒤에 있는 화장실로 일수를 끌고 갔다. 진짜로 마려운지 걸음이 웃긴 일수는 무릎을 모아서 병아리 걸음으로 걸었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냥 병아리가 생각났다.

  

화장실에는 우리 반 녀석 몇 명이 시시덕거리면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저 병신들, 생각하면서 그 옆을 지나갔더니 너도 나도 나한테 인사했다.

  

“야, 태종아, 담임 벌써 왔데?”

“몰라, 나도 얘 다 싸고 나면 바로 가볼 거야.”

“애들은 뭐래, 학교 들렀다 간데?”

“미쳤냐, 그럼 가방 뭐 하러 싸왔겠어?”

“와, 바로 간데!”

  

시원하게 뽑느라 표정이 웃겨진 일수를 구경하고 있으니 좋아서 황진이 춤을 추고 있던 세 명 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야, 우리 바로 노래방 갈 건데, 태종이 너도 갈래?”

“나 알바 가야돼.”

“그래? 그럼 언제 시간 한 번 내서 가자, 애들이 너 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얼굴을 붉혀가며 수줍게 말하기에 나중에 한 번 시간 내보겠다고 했더니 다른 두 명을 끌고 나갔다. 그 두 명도 ‘온데, 온데?’하고 물으면서 끌려갔다. 내가 노래 지질나게 잘한다고 누가 개뻥을 까놓지 않는 이상 남자새끼 오는데 저렇게 기대할 이유가 없다. 왠지 이상한 느낌에 온 몸이 으스스 떨리면서 그냥 나가려는 일수를 붙잡아 손을 씻게 했다.

  

멀찍이 우리 반 녀석들이 보이는 곳으로 향하면서 몸이 가벼워져 기분이 좋아진 일수를 상대해줬다.

  

“오늘 집에 갈 때 같이 가자.”

“가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같이 가?”

“그럼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나 알바 가야 돼.”

“아, 맞다.”

  

몹시 아쉬워하는 일수는 제 머리를 긁으면서 다른 곳을 보다가 다시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알바를 많이 해?”

“어, 나 졸업하고 바로 독립하려고.”

“오, 진짜? 짱이다.”

  

은근슬쩍 내 손을 잡는 일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뿌리치자 일수는 상처받지 않고 오기를 부리면서 깍지껴가며 다시 잡았다. 워낙 내 손을 잡으려고 하며 장난치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반사적으로 그랬다. 그러다 문득 일수의 다른 쪽 빈손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기껏 산 물병을 화장실에다 두고 왔구나, 물도 좀 남았었는데.

  

생각해보니 오늘 물 떨어졌다고 오면서 물 사오라던 고모의 말이 생각난다. 알바 끝나고 편의점에서 사가야겠다. 아, 머리가 그냥 빙빙 돈다. 오늘은 진짜 가기 싫다. 계속 일수와 여기를 돌아다니면서 걷고 햇빛을 쬐고 싶다. 왜 오늘따라 봉사활동을 1시간 밖에 안 하는 걸까, 진짜 불만스럽다.

  

“야, 이방원, 남대출 너네가 꼴찌야!”

“제발 그 이방원 소리 좀 하지 마라, 차라리 태종이 낫지.”

“근데 너 본명이 태종이냐, 종태냐?”

“김종태라고!”

“아, 맞다, 애들이 하도 태종이라고 하니까 선생들도 다 헷갈려 하는 것 같던데. 담임도 너 태종이라고 부르잖아.”

“시끄러.”

  

반장에게 남대출이라고 불린 일수는 별 느낌도 안 받고 그냥 멍청하게 졸린 눈을 한다. 졸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 동생이 여기로 마중 온데.”

“너 동생 있었냐?”

“어, 있어.”

“설마 니 동생 이름이 남대출이야?”

“아냐, 내 동생 이름 이수인데.”

“이수?”

“일수, 이수.”

“대단하다.”

  

본격적으로 출석체크를 하는 담임은 내일 일정에 관한 전달사항에 관해 말하고 반장과 뭐라고 주고받다가 잘들 돌아가라고 했다. 그 때까지도 별 생각 없이 일수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던 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중학교 교복의 덩치 큰 놈을 봤다. 저 덩치가 중학생이라고, 게다가 일수가 아는 척 하는 걸 보니 일수 동생 이수인 모양이었다. 진짜 저 키에 저 덩치가 중학생 교복을 빼앗아 입은 게 아니라 진짜로 중학생이 맞긴 맞나 보구나.

  

교복을 살피니 오늘 축제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그 중학교인 것 같다. 덕분에 일찍 끝나서 여기까지 날아와 준 거다. 나를 팍 째려보고는 손을 세게 떼어내더니 일수의 팔을 잡아끌고 간다.

  

“야, 끝났으니까 빨리 가자.”

“어, 어……. 태종아, 내일 봐.”

“오냐.”

  

나를 기분 나쁘게 흘겨봐가면서 멀어지는 이수와 그 손에 끌려가는 일수를 구경하다가 같이 가자는 반장과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반장은 계속 뭔가를 얘기했고 나는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이수란 놈한테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아서 기분 나쁜 거였는지, 일수와 헤어진 게 아쉬워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정말 답답하면서도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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