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35)

  

난 일수보다 더욱 멍청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내 머리 위로 펑펑 터지는 폭죽에 잠깐 정신줄을 놓고 먼 산을 봤다. 혹시 일수가 말한 게 이거였나, 정말 모를 노릇이다. 언제 친했다고 케익까지 준비한 녀석들을 보면서 애써 웃어보였더니 얼른 촛불 끄라며 케익을 들이민다. 그거 불 꺼주고 축하 좀 받아다 생일빵도 받고 해가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놈들 생일 때 보다는 얌전하게 축하해줘서 다행이다. 옆에 앉아 있는 일수는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있다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상체를 일으키더니 날 보고 식식 웃었다. 이마가 벌건 게 귀여웠다.

  

그에 비해 눈은 맹해서 졸려 죽겠다고 말한다.

  

“잘 잤냐?”

“어, 어제 잠을 못 잤어.”

“뭐 하느라.”

“짠.”

  

내 앞으로 내미는 유리병에 가방을 걸다가 삐끗해서 가방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다시 그걸 주워서 걸면 되는 거지만 난 그러질 못하고 내 책상 위로 얹어지는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유리병 안에는 삼각형의 뭔가가 가득하다. 하나같이 반짝거리고 여러 가지 색을 띠고 있다.

  

그걸 손을 들어 올리며 흔들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일수가 신난 목소리를 냈다.

  

“돈 없어서 그걸로 했어.”

“뭐야?”

“학알.”

“이런 것도 접을 줄 알아?”

“그나마 병 빨로 좀 이뻐 보이는 거지, 모양은 병신이야.”

“기집애냐?”

“좀 고맙다고 해 봐.”

“그래, 고맙다.”

“말만?”

“어.”

  

표정이 구려지는 일수는 화가 나서 바로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잠을 청한다. 그 꼴을 보다가 유리병 여기저기를 쓰다듬으며 계속 병 안을 들여다봤다. 밤에 스탠드 하나 켜놓고 엉성한 폼으로 서툴게 접었을 일수를 생각하니 온 몸이 뜨거워진다. 그 뜨거움을 알리기 위해 일수를 세게 끌어안았더니 놀란 일수가 펄쩍거리며 날 밀치려고 한다. 더욱 큰 소리로 웃어가며 세게 끌어안자 결국 잠잠해진 일수는 조용하게 내 품에 안겨 있기로 결론을 내린다.

  

나는 어디서 그런 닭살스러운 손짓이 생각났는지 몰라도 계속 일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볼을 일수 머리에 비볐다. 그저 내 앞에서 하는 짓 모두가 다 이뻐 보인다. 기집애처럼 밤새 접은 학알을 내밀었을 때가 아마 절정이었을 거다. 딴 놈이 줬으면 닭살만 돋고 말았을 것을 이렇게 기쁘게 만든다. 비로소 그 계기로 깨닫게 된다. 난 일수가 좋다. 일수와 모든 걸 함께 하고 싶다.

  

때문에 나는 학교 끝나자마자 팬시점에 들렸다. 더 이상 못 견딜 것 같다. 일수가 너무 좋다. 그 새끼가 남자라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그 새끼가 좋다. 뽀뽀하고 싶고, 막 이상한 짓도 다 하고 싶다. 해본 적은 없어도 내 첫 상대도, 마지막 상대도 전부 일수였으면 한다.

  

팬시점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편지지를 사서 밤에 스탠드 하나 켜놓고 눈물을 흘려가며 편지를 썼다. 그냥 쓰는 순간부터 뭔가가 계속 울컥거렸다. 아마 처음부터 좋았을 거다. 그런데 이제야 그게 그만큼 특별한 감정이었는지를 깨달은 거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내 마음을 글로 써내려갔다. 물론, 야한 짓을 하고 싶다는 얘기는 뺐다. 그런 말을 했다간 일수가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편지를 전부 쓰고 나자 내 눈은 엄청나게 부어버렸다. 그 눈으로 내일 학교를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니, 새벽으로 넘어갔으니 그 날이다. 내가 과연 일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일수가 이 편지를 읽은 뒤 내 얼굴을 봐줄지가 먼저다.

  

나는 그것을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일수 서랍 안으로 넣었다. 일수가 읽기를 기다렸고, 일수는 수업이 전부 끝날 때까지 내 눈물의 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명도 교실에 남지 않았을 때 서랍 안을 살펴보자 아무렇게나 교과서를 쑤셔 넣어 엉망이 된 그 속에서 편지가 전부 구겨지고 찢어져버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쓴 건데, 이 개새끼!

  

열 받아서 전부 찢어버리고 다시 새로 쓰기로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복잡한 내용의 편지가 문제였다. 아무리 정성이 들어갔어도 일수 같은 깡통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냥 쓰레기나 다름없다. 이 편지는 지금 내게 그런 교훈을 안겨준 거다. 좀 화가 나고 짜증이 나지만 그렇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

  

난 다시 편지지를 사서 밤새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달랑 몇 줄만 기록했다.

  

‘이렇게 갑자기 편지를 써서 많이 놀랐을 거야. 하지만 말로 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글로 써봤어.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밤새 생각했지만 역시 묻지 않고 내 마음만 전하기로 마음먹었어. 조금 겁이 나고 상처 받을 것 같아서…….

사귀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 마음만 알아줬으면 해.

난 니가 좋아.’

  

이 정도면 일수도 알아먹을 거다.

  

이제 이 편지를 지금, 아니, 조금 더 일수의 마음을 얻은 다음 정확히 졸업식 날 일수에게 전해줘야겠다. 그 때까지 노력하면 일수도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좋게 헤아려줄 거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결과가 그리 좋진 않다. 그걸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답을 구하지 않기로 했다. 사귀어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저 내 마음을 일수가 알아줬으면 한다.

  

그래도 내게 저 많은 학알을 접어줄 정도면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기대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알 하나 때문에 기대하게 된다. 무슨 어장관리 하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학알은 왜 줘?

  

괜히 열 받아서 병을 구석에 처박았다가 좀 죄책감이 들어 다시 잘 놓아두었다. 머리가 복잡하고 돌아버릴 것 같다. 졸업식날 확 그냥 납치해버릴까, 방 미리 구해놓고 감금시켜 버릴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일단 학교부터 가야겠다. 일수가 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일수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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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편의점 앞에 나란히 서 있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100미터.”

  

일수는 멍청하게 있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매일 밤잠과 싸우며 짜준 갈색 목도리를 한 채로 돌아본다. 정말 엉성하지만 일수는 그 목도리 없이 밖을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혼자 못 감는다. 내가 아침마다 내 머리를 감는 동시에 감겨줘야만 한다. 그게 정말 귀찮지만 싫고 좋고를 떠나서 완전히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침이면 밥을 하듯 당연한 일과가 된 거다.

  

일수는 허연 입김을 토하면서 말한다.

  

“190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데 뭔 100미터야?”

“100미터, 저 새끼 농구해야 돼, 센터.”

“뭔 100미터야, 김태종 돌았냐.”

“나보다 이 만큼 컸어, 100미터야.”

“190 정도 되어 보인다니까.”

  

금방 편의점을 나간 키 존나 큰 남자 하나 때문에 우리는 100미터냐 190센티냐로 열띤 논쟁을 벌였다. 아무 짝에 쓸모없고 결론은 나와 있는 토론이지만 그냥 우리는 병신 같은 동문서답을 했다. 일수는 중간 중간 목도리를 볼에 비비면서 추위를 달랬다.

  

그런 다음 추워서 옹송그린 채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는 나를 감싸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 목도리 짜줄 동안 어떻게 장갑 한 짝을 안 해주냐, 삐친 척을 하니 진짜 장갑 한 짝만 짜준 일수 덕분에 내 손은 늘 한 쪽만 따뜻하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다른 쪽은 일수의 체온을 빌리면 된다.

  

목도리 속으로 손을 넣고 있던 일수가 그 손을 빼내어 어디로 향하나 했더니 내 허리로 두른다. 그래서 내 손도 일수의 허리로 갔다. 존나 춥다. 손 좀 잡아 달라니까 엉뚱한 데로 손이 간다. 진짜 마음 드럽게 안통하고 손발 존나 안 맞는다. 이 새끼랑 나는 평생 이럴 거다. 오늘은 밥하기 귀찮으니까 라면 사다가 삶아 먹어야겠다. 집에 김치는 손석, 아니 이석희가 보내오는 걸로 엄청 많으니 돈 굳고 기분도 좋다. 말 그대로 쌀만 제때 사 놓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 필요악이란 게 바로 이런 거다.

  

***

말 그대로 머릿속을 텅 비우고 써제낀 이 글이 드디어 완결을 보네요.

 그저 재밌으라고, 웃기라고 쓰는 글인데도 쓰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어요.

그리고 드디어 외전을 올립니다.

 태종이의 고등학생시절 시점으로 썼습니다. 원래는 그냥 그대로 끝나는 거였는데 템템님 댓글 보고 후의 이야기를 아주 짧디 짧고 짤막하게 덧붙였습니다.

둘은 항상 그런 모습 그대로 한결같으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걸 그냥 귀띰하고 싶었어요.

이런 유쾌한 소설을 쓸 땐 저도 참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상쾌해요.

 근심도 많이 덜고....제가 쓰면서도 솔직히 웃거든요.

자기 소설 자기가 읽으면서 재밌다고 웃고 좋아하면 진짜 되게 그래보이지만,

 근데 진짜로 제가 써놓고도 웃겨서 웃을 때가 많아요.

 그럴 땐 아무리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웃고 있는 동안은

"아 내가 왜 짜증을 냈지, 진짜 쪽팔리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보시는 분들에게 어느 정도의 웃음과 재미를 줄진 보장 못하지만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웃으시면서 금방의 짜증스러웠던 상황을 호쾌하게 웃어 넘기셨으면 합니다.

쪽팔려도 됩니다. 남들도 다 똑같이 매일 하던 짓인데요.

후반부로 가면서는 솔직히 제가 글 쓰는데 조금 소홀히 했습니다.

 원래 그 전까지는 내가 약을 먹었었거든요, 꽤 오랫동안..

근데 약을 먹는 동안 부작용이 너무 많이 일어나서

 후반부 쯤 갈 때 그때 쯤에 제가 그 약을 끊었어요.

자꾸 토나오고 없던 수전증이 생기고 하니 너무 이상하더라구요.

 알고보니 약이 너무 독해서 중독이 된다더라고요. 의존한다고 하나...

전 생각없이 몸에 좋으니 먹은 건데 그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요;

 약을 끊고 나서는 이상하게 온몸이 축축 쳐지고 기운이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감정표현도 제때 못하고 화내야할 부분에서 웃거나 웃어야할 부분에서 표정 구려지거나 하구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그런 부분이 조금씩 고쳐지는게 느껴졌습니다.

 수전증은 완전히 가라앉았고요. 타자치는게 효과가 있는건지 뭔지도 모르겠고 시간이 지나서 그런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요. 구역질은 완전히 멈췄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드러운 소설을 쓰는데 구역질하던 것이 멈추는게 참 신기합니다.

여튼 이 소설은 제게 있어서 포션같은 겁니다.

 여러분도 그 기(?)를 이어받아 지금 제일 아픈 곳이 치유되었으면 해요.ㅎ

다음 소설에서는 훨씬 낫고, 훨씬 안정적인 모습 보이겠습니다.

여기까지 달려주신 분들, 댓글 달아주시던 분들, 추천 열심히 눌러주신 분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다음 소설에서 또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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